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강완숙 골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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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7-28 ㅣ No.1321

[124위 시복 특집] 강완숙 골롬바 ① (1761~1801년)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1761년 충청남도 내포의 양반 집안에서 서녀(庶女)로 태어난 강완숙 골롬바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습니다. 강완숙은 여느 사람과 달리 강건하고 정직하여 도리가 아닌 일에는 물들지 않았습니다. 한때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생각하여 남장을 할까도 고민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강완숙은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장성한 강완숙은 덕산 지방에 살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가 시어머니, 전처의 아들 홍필주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혼인 후 시집살이가 너무 고된 나머지 머리 깎고 출가할 생각까지 하던 그녀는,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에게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그 가르침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강완숙은 즉시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어다 읽으며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강완숙이 보인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통한 계명 실천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훗날 강완숙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아들 홍필주 필립보의 예는 강완숙의 모범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179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강완숙은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피다 붙잡혀 홍주의 지방 관리에게 끌려갔습니다. 당시는 강완숙이 세례를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남편 홍지영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충청 감영에서는 홍지영에게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죄를 물었고, 이후 홍지영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했습니다.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와 의논한 뒤 함께 한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강완숙은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여 주문모 신부를 모셔 오는 데 필요한 경비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한양에 도착하였을 때, 강완숙은 ‘골롬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완숙의 인품을 대번에 알아차린 주문모 신부는 그녀를 조선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일 서울주보 6면]

 

 

[124위 시복 특집] 강완숙 골롬바 ② (1761~1801년)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한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



1795년 을묘박해 때 강완숙 골롬바는 자신의 집을 주문모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습니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주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윤점혜 아가다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완숙의 집이었습니다. 강완숙은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습니다. 왕실 친척인 송마리아와 며느리 신마리아가 주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완숙의 덕택이었습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6일 집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박해자들은 강완숙에게서 주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강완숙은 신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습니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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