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그리스도교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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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154

그리스도교 영성

 

 

인류가 생긴 이래 요즈음처럼 말이 많은 때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중에 텔레비젼, 라디오, 신문 등 매스컴에 의해 말의 홍수속에 살게 됩니다. 또 어디를 가든지 말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인지 말을 잘 해야 대우받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든 말 잘 하는 사람이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어디로 가서 기도를 해도 남들보다 더 멋지게 기도를 해야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보이는 것이나, 은사와 축복 같은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얻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그러기에 요즈음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의 흐름속에 우리 신앙도 무엇인가 어수선하게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영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영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고독이고, 둘째는 침묵이며, 셋째는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오늘 이 시대와는 거리가 먼 말들처럼 생각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00년의 교회를 이끌어온 것은 바로 여기에 뿌리박힌 소중한 영성 때문입니다.

 

첫째로 고독이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온전히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거나 행하는 것들 중 어느 것이 참된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그런 산란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조차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텔레비젼이나 신문을 보는 시간은 있으나, 기도할 시간이 거의 없는 우리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속에 비어있는 시간과 비어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온전히 함께 있기 위한 시간과 자리입니다. 고독은 우리가 하느님이신 그분을 생각과 마음을 다해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영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막의 성인들은 침묵을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 찬양했습니다. 일찍이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말많은 세상에 오염되어 침묵의 소중함을 잊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로 표현하려 할 때 거짓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원한 침묵으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과 온전히 홀로 함께 있는다면, 침묵중에 말씀하시는 그분의 소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침묵속에서가 아니라 밖에서만 그분을 찾으려 합니다. 거창한 기도회나 피정, 철야기도 등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려 합니다. 또한 기도할 때도 침묵중에 기도하기보다, 보다 유창하게 하려하고, 소리치며 하려합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떠들석한 곳보다는 당신께서 침묵중에 오셨듯이 오늘도 침묵중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이유는 하느님보다도 나 자신의 영적인 만족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혹시 나 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식의 기도는 아닙니까?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혹시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셋째로 항상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끊임없는 기도를 위한 것입니다. 고독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침묵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면 고독과 침묵은 기도가 행해지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 혹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한정시킵니다. 이런 생각은 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느님과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 자신에게 중얼거리는 독백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도생활의 위기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의 머리는 하느님에 대한 관념으로 꽉 차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독백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온갖 장식적인 말로 우리 자신을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오히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오히려 조용한 한마디의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한다'는 말을 들을 때 이를 실천한다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일 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 즉 잠을 자거나, 다른 일을 할 때 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자선행위를 통해 나의 이웃은 나의 기도의 동반자가 되고, 나의 기도를 끊임없는 기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이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진주를 얻으려면 우리는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만 합니다. 바닷가에 앉아서 진주알들이 바구니로 굴러들어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시킬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만나려면 우리 마음 속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바깥에서만 하느님을 만나려할 때 우리 마음은 더욱 혼란해질 뿐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갈등이 생기고, 또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장작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만, 나중에는 바라던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서 우리 자신안에 있는 거룩한 불을 지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적은 어떤 은사나 축복을 얻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은사와 축복은 깨달음을 얻는 신앙인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은사와 축복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어수선한 이 시대에 우리는 잃었던 우리의 영성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박희원 신부님 / 수서 성당 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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