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하느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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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3 ㅣ No.860

[레지오 영성] 하느님의 사랑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죄로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레지오 단원들을 쓰시려 하시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 제9장,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신비체)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레지오 단원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으로서 평신도 사도직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복음 선포의 일선으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관대한 마음으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들을 투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성화를 위한 길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임을 천명하면서 레지오 단원들은 이 모든 것을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께 의탁하여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끊임없이 성모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성모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의 사명은 바로 성모님의 사명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또 성모님의 삶에서 계속 그 영감을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신비체의 모든 부분에 고루 보내시어 신비체가 생명을 얻고 자라게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돌보시는 당신의 사명을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수행하십니다.(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 90쪽 참조) 그리고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한 숭고한 사랑입니다. 성모님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신 것은 종으로서의 단순한 순명정신이 아니라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찾고 또 이루려는 충실한 종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은 성모님의 삶 전체의 튼튼한 바탕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시듯이 하느님을 잘 알고 계셨고, 당신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성모님의 기쁨과 희망에 가득 찬 노래, 마니피캇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 특히 약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노래하는 찬미가이겠지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셔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누구에 대해서 아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낳고 키우셨고, 또 아드님의 공생활에 마음으로 함께 하셨던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온전히 아셨고 또 그만큼 하느님을 잘 아시게 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남겨주었습니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바오로는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다는 명분 하에 아주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새롭고도 참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한 분이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지만 각자가 품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으로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필립보에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계속 기도 안에서 또 삶 안에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삶이 온전히 변화된 바오로 사도는 이분 때문에 그동안 자신에게 이롭던 것들을 이제는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분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역설합니다.(필리 3,4-8 참조) 일찍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코 8,29)라고 물으셨는데, 나에게는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분은 정말 만나고 싶고, 알고 싶고, 감사하고 싶고, 열렬히 사랑하고 싶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이 예수님의 인격 안에 눈물겹게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께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성자를 구세주로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고,”(1요한 4,10)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여 은총을 구해주시는 성모님께 전구 청해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하여 묵상할 때 우리는 그분의 크나큰 두 가지의 은혜, 즉 창조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도 이 두 가지의 큰 은혜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거침없는 응답 속에는 당신을 사랑으로 빚어 만드신 창조주께 대한 피조물의 충성 어린 사랑의 고백이 녹아있습니다. 시편 구절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합니다.”(시편 139,13-14)를 성모님께서는 즐겨 읊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짐에 있어 당신 자신이 은혜로운 도구로 선택되셨음을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과 함께 깊게 인식하셨고(루카 1,41-45 참조), 시메온과 한나와 함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나의 전부를 꿰뚫어 아시는 그분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고, 또 언제나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 부모, 형제, 친지와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내 삶의 역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시는 그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성사이며, 죄인인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사랑의 증표입니다.

 

그러나 종종 그리고 자주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잊기 쉬우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은총을 구해주시는 성모님께 거듭거듭 전구를 청하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3월호,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이주노동자 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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