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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5: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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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24 ㅣ No.966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5)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


"천주님은 천지의 큰 임금이시니"...한국교회 '디딤돌'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읍 능내리) 정다산 유적지에 정씨 형제 생가가 복원돼 있다. 약종을 비롯한 정씨 형제들은 이곳에서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 신앙 선조들과 자주 서학(西學)을 논하며 천주 신앙에 눈을 떠갔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부친 재원의 3년 시묘(侍墓)살이를 끝내는 날, 형제들에게 말했다.

 

"저는 아버님 제사를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러자 맏형 약현은 "아버님이 그토록 천주교를 멀리하라 타일렀거늘, 그것을 끝내 버릴 수 없단 말이냐?"하며 약종을 꾸짖었다. 약종은 위로는 약현과 약전, 아래로는 약용을 둔 4형제의 셋째였다.

 

약종은 형의 질타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결심을 굳힌 터였다.

 

"저는 형님이나 아우처럼 벼슬길에 나간 것도 아니고…. 천주는 천지의 임금이요 큰 아비이니, 초야에 묻혀 천주를 섬기고 교리를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천주교에 눈뜬 마재의 정씨 형제들

 

경기도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읍 능내리)의 명망 높은 가문 후손인 정씨 형제는 누구보다 일찍 천주교에 눈을 떴다. 1784년 겨울 한양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될 때 약전과 약용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약종도 2년 후 형 약전한테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정씨 형제는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 발각돼 고초를 겪고, 이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외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조상제사를 폐한 죄로 1791년 신유년에 참형을 당하자 천주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약전과 약용은 다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약종은 달랐다. 형제들이 천주교를 택하는 것을 보고 잘못된 교리라며 배척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이 찾아 헤맨 철학적 진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깨닫고 오로지 거기에 매달렸다. 약종은 형제들과 달리 애초부터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문예 공부에 거리를 두고 도교에 빠져 들기도 했다. 진리 탐구에 뜻을 둔 그의 학문적 열의와 신중함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약종은 벼슬과 권세에 대한 미련을 버린 터라 아내와 아들 철상(가롤로)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그의 형과 아우만이 마재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근심어린 시선으로 약종을 배웅했다.

 

마재 강 건너편 양근 분원으로 이주한 약종은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하층민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교리를 가르쳤다. 충청도 출신 머슴 임대인(토마스)과 천민 출신 최기인 등에게 천주 신앙을 전했다. 불평등한 봉건적 신분제를 복음의 평등사상으로 타파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맏아들 철상, 둘째 아들 하상(바오로), 딸 정혜(엘리사벳)에게도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황사영(알렉시오)은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한 백서(帛書)에서 약종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세상일은 도무지 관여하지 않으며 특히 철학과 도덕 공부를 좋아했다. 그는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였고, 교리에서 한 부분이 모호하게 되면 식욕도 잃고 잠잘 생각도 잊은 채 그침 없이 탐구하여 끝내는 그것을 밝혀내고야 말았다. 말 위에 있든 배 위에 있든, 깊이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무지한 이들을 보면 그들을 가르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는데…."

 

약종은 1794년 무렵부터 한양에 자주 올라와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했다. 당시는 교황청의 조상제사 금지 조치로 인해 양반층 신자들이 천주교에 등을 돌리고, 대신 양반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이나 중인 이하 신분층 인물들이 교회를 이끌어갈 때였다.

 

약종은 천주 신앙만이 진리라는 믿음에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조상제사 폐지로 양반사회가 술렁이건, 형제들이 관직에 오르건 동요하지 않고 신앙에 정진할 수 있었다.

 

 

탁월한 교리지식으로 교리서 편찬

 

정약종은 신유박해(1801년) 때 옥에 갇혀 수 십번의 신문과 매질을 당했지만 천주 신앙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큰아들 철상이 옥고를 치르는 아버지 약종을 찾아가 먹을 것을 전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약종의 42년 생애에서 명도회(明道會) 초대회장 직책 수행과 한글교리서 「주교요지」 편찬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조선 잠입에 성공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796년경 교리연구와 전교활동을 위해 명도회란 평신도단체를 조직하고 약종을 초대회장에 임명했다. 약종은 그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특히 교리연구에 공을 들였다. 당시 교우들은 선교사 없이 신앙을 수용한 터라 교리지식이 일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명도회를 통해 신자들 교리지식 수준을 높이고, 그 신자들을 파견해 재교육과 선교활동을 강화하겠다는 게 주 신부와 약종의 계획이었다. 명도회 집회 장소는 서울 약현에 있는 황사영(약종의 조카) 집을 중심으로 서울 각처 6곳으로 늘었다. 신자들은 이를 육회(六會)라고 불렀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약종은)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보면 혀가 굳고 목이 아프도록 힘을 다해 가르쳤는데,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라도 깨우치지 못하는 자가 드물었다"며 그의 교리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또 "그는 사람들이 별의별 도리를 다 물어도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말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 데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고 밝혔다.

 

최초의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는 그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매달린 교리연구의 독창적 결과물이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서학서는 양반이나 일부 중인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종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교리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교요지」는 상ㆍ하 두 편 1책 96장으로 이뤄져 있다. 상편은 천주의 존재, 천주의 속성, 속론(俗論)ㆍ도교ㆍ민간신앙에 대한 비판, 상선벌악 순으로 서술돼 있다. 하편은 성경에 기초해 천지창조, 강생구속, 천주교 봉행 순으로 정리돼 있다. 1801년 5월 관헌들이 한신애(아가타) 집을 수색해 압수한 서적 중에 「주교요지」 1권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신자들이 이 교리서를 많이 필사해 읽었음을 알 수 있다.

 

1801년 신유년에 접어들자 박해의 먹구름이 또 밀려왔다. 어린 순조를 왕위에 올리고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들어간 정순왕후 김씨는 정적(政敵)인 남인들을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다. 서학에 연루된 양반들이 남인계에 많았다. 천주교인에 대한 검거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약종을 꼼짝 못하게 옭아맨 책롱(冊籠)사건이 이 때 일어났다. 박해가 시작되자 머슴 임대인이 포천에 사는 홍교만(프란치스코)의 집에 숨겨두었던 약종의 책 농짝을 한양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됐는데, 그 농짝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 서한, 황사영 서한, 정씨 형제 서한 등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노론 벽파는 이 증거들을 들이대며 남인 친서계를 공격했다.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등이 줄줄이 잡혀왔다.

 

 

차라리 하늘을 보면서 죽겠다

 

추국(推鞠, 의금부에서 임금 명에 따라 중죄인을 신문하던 일)이 시작됐다. 약종은 교주의 소굴과 무리를 대라는 추관의 신문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물보다 높으신 천주를 공경하고 흠승하는 사람으로서 죽어도 후회가 없다"며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약종은 수십 번의 신문과 매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추관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므로 무엇을 물어도 소용이 없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1801년 2월 26일(음) 참수형을 선고했다.

 

약종은 판결 당일 수레에 올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나가면서 군중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은 비웃지 마시오. 저를 비난하지 마시오. 저처럼 오히려 하늘의 크신 주를 흠숭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영원한 불행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약종의 확고한 믿음은 순교 순간에 더욱 빛을 발했다. 형리들이 목을 형구 밑에 대라고 하자, 그는 하늘을 우러르는 자세로 머리를 두고 "땅을 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뒤 칼을 받았다.

 

 

정약종 가족은 모두 순교자

 

약종(若鐘)은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과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이복 맏형 약현(若鉉)과 중형 약전(若銓), 아우 약용(若鏞)이 있다.

 

약종은 같은 남인 집안인 이수정의 딸과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유조이(체칠리아)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나머지 형제들도 남인 계열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벽(요한 세례자)은 약현의 처남이다. 이승훈(베드로)은 약전의 매부다. 약현의 딸 명련은 훗날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했다.

 

약종의 부인 유조이와 철상(가롤로)ㆍ하상(바오로)ㆍ정혜(엘리사벳) 3남매도 모두 순교의 길을 걸었다. 철상은 부친 약종이 체포되자 감옥 근처에서 머물며 옥바라지를 하다 부친 순교일에 체포돼 한 달 뒤 순교했다. 유 체칠리아, 하상 바오로, 정혜 엘리사벳은 기해박해(1839년)때 순교하고 1984년 성인 반열에 들었다.

 

[평화신문, 2011년 9월 25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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