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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유럽 성지순례: 알퇴팅과 비스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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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80

[유럽 성지순례] 알퇴팅과 비스 성지

 

 

1. 비스성당의 '쇠사슬에 묶이신 예수상.' 1730년께 나무로 조각된 이 예수상은 특이하게도 예수가 십자가가 아닌 쇠사슬에 목과 팔이 묶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2. 알퇴팅 은총경당 전경. 700년께 세워진 팔각형 성당 위에 성모의 기적이 일어난 후 순례자들을 위해 고딕 양식 성당으로 증축했다.


3. 바이에른 영주들의 심장을 담은 은괘로 장식돼 있는 알퇴팅 은총경당 내부, 제대 가운데에 '검은 옷을 입은 성모상'이 안치돼 있다. 사진은 홍경완(왼쪽)신부의 미사 강론을 경청하고 있는 김연범 신부.


4. 비스성당 제단 위에서 사제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순례단.

 

 

유럽 수도원 순례 일정 중 중세 때부터 순례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쇠사슬에 묶인 예수의 기적 성지를 찾았다. 오늘날까지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알퇴팅' 성모 성지와 알프스 산록에 있는 '비스'성지이다.

 

 

알퇴팅 성모 성지

 

알퇴팅은 독일 뮌헨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고대 바이에른 영주의 고향이자 가톨릭 신앙의 중심지여서 '바이에른의 심장'으로 불린다.

 

대성당과 시청사가 있는 광장 중심에 아담한 '은총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오전 10시가 갓 지난 이른 시각인데도 경당 입구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팔각형 모양의 이 경당은 700년경에 세워졌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잘츠부르크의 성 루페르트(Rupertus) 주교가 이 경당에서 바이에른 영주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를 기념해 성모 마리아 상을 안치했다고 한다. 이후 이 경당은 바이에른 왕족의 세례경당이 됐고, 907년 훈족 침입으로 전 도시가 파괴됐지만 이 경당만은 온전히 보존됐다고 한다.

 

차례가 돼 경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른 50여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성당 내부는 바이에른 영주들의 심장을 담은 은괘로 빼곡하게 장식돼 있다. 제단 한가운데에는 '검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성모상은 루페르트 주교의 성모상이 아니라 1300년경 부르군드에서 제작해 1330년 이곳에 모셔놓은 것이라 한다.

 

검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상의 첫 기적이 일어난 것은 1489년 가을 무렵.

 

익사한 아이의 시신을 안고 온 부모가 성모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호소하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다는 것. 이 기적 소식을 듣고 전 유럽에서 순례자들이 몰려오자 바이에른 영주는 1499년 증축 공사를 시작해 1511년 고딕 형태의 순례성당을 완공, '은총경당'이라고 명명한다.

 

이후 황제들과 귀족들뿐 아니라 서민들의 성지로 사랑받아온 이곳은 지금도 유럽인들이 가장 순례하고픈 성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지난 1989년 알퇴팅 성모 기적 500주년을 기념해 이곳을 방문했다.

 

또 독일 30년 전쟁(1618~1648. 가톨릭과 개신교도간 전쟁) 당시 바이에른 영주 막시밀리안은 검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과 알퇴팅의 운명을 맡기는 혈서를 봉헌, 기적적으로 패전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1681년 레오폴드 1세 황자와 바이에른 영주 마르크스 임마누엘도 이슬람교도인 터키군이 침공하자 성모상 앞에서 '거룩한 알퇴팅 동맹군'을 결성, 적을 무찌른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바이에른 영주들은 20세기에 이르도록 죽은 뒤 자신의 심장을 은괘에 담아 자랑스럽게 은총경당 제단과 벽에 안치하도록 해왔다.

 

경당을 관리하고 있는 카푸치노회 노 수사 신부 도움을 받아 서울대교구 김연범 신부와 독일 유학중인 부산교구 홍경완 신부 공동주례로 우리말 미사를 드렸다. 미사 도중 한 할아버지 순례자가 순례단원인 성경희(막달레나)씨에게 영어로 "알퇴팅에서 구입한 성물이니 순례단과 함께 기념으로 가져라"며 묵주 한꾸러미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순례 일정 때문에 미사를 함께 할 수 없어 미안하다"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는 빠져 나갔다.

 

미사 후 노 수사신부는 "한국에서 이곳을 찾은 첫 순례단"이라며 "순례자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라며 홍 신부에게 50유로를 주었다. 한사코 거절하자 "음료수라도 사 마셔라"며 홍 신부 손에 돈을 꼭 쥐어주며 수도원으로 사라졌다.

 

은총경당 인근에 카푸치노회 콘라드(1818~1894) 성인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콘라드성당을 둘러보고 식당에서 노 수사신부가 준 돈으로 순례단 모두가 음료를 사 마셨다. 그리곤 낯선 순례자를 예수님처럼 극진히 모시는 따뜻한 마음을 되새기며 가난한 이웃에게 작은 베품을 실천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고 서로 격려했다.

 

 

비스 성지

 

알프스 산록에 있는 비스 성지는 1738년 6월14일 쇠사슬에 묶이신 예수상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기적이 일어난 성지이다.

 

'쇠사슬에 묶이신 예수상'은 1732년부터 성 도미니코회 슈타인가든 수도원에서 성 금요일 '십자가의 길 행렬 예식' 때 사용하던 성상으로 1738년 6월14일 농부인 로리 부부에 의해 피눈물이 흐르는 기적이 목격된다.

 

기적이 일어나자마자 성 도미니코회 슈타인가든 수도원은 예수상을 안치할 경당을 짓기 시작해 1740년 완공했으나 너무나 많은 순례자가 찾아와 1745년부터 10년간 대성당을 지어 봉헌한다. 성 도미니코회 짐머만 수사가 설계한 비스성당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독일뿐 아니라 러시아 페터스부르그, 스웨덴 괴테보리,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덴마크 코펜하겐, 프랑스, 스페인으로부터 수많은 순례자들이 운집하고 있다." 1779년 비스 순례지 영성 신부였던 벤노 슈로플 신부의 증언이다. 이 증언은 오늘에도 유효해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순례자들이 매일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로코코 양식의 백미로 알리진 비스성당은 예술가들로부터 "이 시대의 비참한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일부분을 보게 해준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아름답다. 특히 제단 가운데에 안치돼 있는 '쇠사슬에 묶이신 예수상'과 천장에 그려진 '무지개 위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상' 그림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과 예수의 부활로 인한 화해의 죄사함,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드러내는, 다시오시는 구세주 예수의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한마디로 비스성당은 '구원 신학'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성당이다.

 

비스성당에서 순례단은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한국에서 미리 미사 예약을 했지만 성당이 너무나 커 "사제와 함께 제단에서 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또 우리를 위해 제단의 모든 촛불을 켜주고 미사 복사도 해 주었다. 주임신부는 미사를 마칠 때까지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순례단 모두가 서로 얼싸안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몇몇은 울음을 터뜨렸고, 신자석에서 우리말 미사에 함께 했던 외국인 순례자들 몇몇도 훌쩍거렸다. 미사를 바치자 주임 신부는 "너무나 아름다운 미사였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다.

 

예수님의 피눈물이 흐른 성지에서 미사를 바치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오는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평화가 그러한 것일까.

 

[평화신문, 2004년 4월 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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