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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미신행위와 교회: 미신행위 버리고 거룩한 영에게서 위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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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1 ㅣ No.774

[경향 돋보기 - 미신행위와 교회] 미신행위 버리고 거룩한 영에게서 위로를



새해가 되면 신년 운세나 토정비결 그리고 사주 등을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도 점이나 관상, 사주, 궁합을 보는 이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십 년 전의 통계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신앙인의 미신행위

2005년 대전교구에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새 복음화를 위한 조사연구’에서 28.5%가 ‘점보는 것을 나쁘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응답하였다. 2007년 「가톨릭신문」 창간 80주년에 실시한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조사에 따르면 세례 받은 뒤, 토정비결을 본 경험에 대해 1987년 6.3%, 1998년 6.5%와 비교할 때 2006년에 신자들의 11%가 ‘여러 번 있었다.’고 답했고, 30.1%는 ‘한 두 번 있었다.’고 응답했다.

전체 신자 가운데 41.1%가 세례 받은 뒤 한 번 이상 토정비결을 본 셈이다. 또 택일 · 작명 · 궁합 등의 경험에서도 25.5%가 ‘한 번 이상’이라고 답했다. 4명 가운데 1명은 민간신앙을 접하고 있다는 뜻이다.

필자는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을 살피고, 교회의 가르침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그것에 대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그동안 사목현장에서 제시된 문제의 해법들을 바탕으로 신앙적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미신행위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지적한다.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뢰의 자세에서, 하느님께 우리의 앞길을 맡겨드리는 의탁의 정신이 결여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여 혹시 마술적일 수도 있는 방식까지도 포함한 경신례를 하여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마땅한 공경과 흠숭을 다른 신에게 드리는 불경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곧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앞날이 더욱더 불안한 세상에 무엇인가에 의지하고픈 나약한 모습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첫 번째 계명은 귀신이나 미신적인 관습에 따르는 것을 금지한다. 심령술사나 무당에게 의탁하여 점을 보거나, 부적을 붙이거나, 징조나 꿈에 의존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악마적인 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첫 번째 계명에 어긋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115항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리고 이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라고 밝힌다.

또한 2116항은 이렇게 명시한다.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이나 마귀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본다.’고 하는 그릇된 추측 등이 그러한 예이다.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점쟁이(무당)에게 물어보는 일 등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른 것이다.”

점을 보고 고해성사를 보는 이중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이제 신앙과 점술의 상관성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저 고해성사 죄목 하나 늘어난 정도이다. 신앙은 신앙대로, 점은 점대로 공존하고 있다.


점술과 기복신앙 현실

오지섭 교수(서강대학교 교육학과)는 말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특히 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관점에서 초월적 진리는 인간의 기준에서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점은 인간이 대리자를 통해서 그 진리를 미리 알겠다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종교인의 관점을 떠나 점 문화는 사회적 측면에서도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점에 자주 노출되면서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재수 없다. 운이 없다.’는 식의 변화는 개개인의 수동적인 삶을 부추기고 사회 전반에 걸쳐 소극주의나 적당주의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노길명 교수(고려대 사회학과)의 말이다.

점 문화가 기복적이고 상업적으로 치달으면서 점을 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점 문화 자체가 사회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고 각종 부작용을 낳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대처는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성당에 가도 누구 하나 시원하게 신자의 고민을 풀어줄 사람이 없다. “기도나 열심히 하라고 하니 답답하다. 점집에 가면 동쪽으로 가서 소리 나는 일을 시작하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한쪽은 지극히 신앙적이고 한쪽은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문제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신흥종교 현상을 연구해 온 노길명 교수는 사람들이 점을 보는 심리적 원인으로 무속적인 한국 기층문화의 영향,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한 사회상황, 자기가 부당하게 취급받는다는 상대적 박탈감 등을 꼽았다.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점술이나 신흥 영성운동의 조류에 취약하다는 점은 신앙적 정체성과 자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념이다. 뚜렷하지 못한 신앙 정체성 때문에 이미 뿌리 깊은 무속적인 종교심성과 접합되는 신앙요소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해, 신앙과 점술이 내면적 갈등 없이 공존한다.

결국 그리스도교 복음과 신앙이 기복적인 종교심성과 만나, 혼합주의적인 신앙이 되고, 기복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왜곡된 신앙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 해법

먼저 점을 보는 행위가 신앙교리와 신학에서 명백하게 위배된다는 점을 신자들이 깨달아야 한다. 호기심에서라도 점술로 자신의 운을 거는 것은 신앙에 반하는 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점술에 의지하는 신자들의 피폐한 정신 상황을 위로하는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다.

인간의 현실로부터 멀리 있는 초월적 하느님보다는 고통과 불안에 싸인 사람들 곁에 머무르시며 위안과 위로를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교회가 보여주어야 한다. 눈앞의 결단에 도움을 주고, 비록 그 진정성이 의문스럽다고는 해도,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주는 듯이 보이는 점술에 의지하는 신자들에게, 교회는 좀 더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말을 건넬 필요가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점 보는 것이 성당 다니는 것과 다른 문제라며 스스로 위로한다. 꺼림칙하다 싶으면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면 된다고 말한다.

노길명 교수는 “무속의 르네상스 현상이라 불릴 만큼 점 문화가 엄청난 기세로 파급된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정치 · 사회적 불안감과 급속한 지식 정보화 사회로의 변혁에 치인 결과”라고 말한다.

최근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살찌우는 각종 영성심화 피정과 프로그램, 상담심리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이 잇달아 마련되는 것은 이 같은 점 문화의 성행에 대해 교회가 대처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점집을 찾지 않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신앙 안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역할이다.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에 대한 문제 해법에는 무엇보다 먼저 교회의 연구가 필요하다. 점 보러 가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점 보면 속이 좀 풀리고 안심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점을 보고 고해성사를 본다.

교회는 그동안 점에 대해 관대했거나 또는 무지했다. 사실 점을 비롯한 기복신앙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못했다. 「한국가톨릭대사전」도 기복신앙이 그리스도교계 안팎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기복신앙은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한국교회와 복’에 대한 신학적 입장 정리가 시급하다고만 밝히고 있다.

몇 건의 설문조사를 제외하면 교회에서 점 보는 신자들의 현황과 실태 그리고 신앙에 끼치는 영향 등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연구가 거의 없다. 사목자들도 “봐서는 안 된다.”라고는 말해도 ‘왜 보면 안 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벅찬 형편이다.

따라서 기복신앙 특히 현대에 들어와 지극히 기복적이고 상업적으로 변질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마저도 훼손시키는 각종 점 문화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아울러 교회 교리가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에도 점 문화가 신자들 사이에 만연하는 이유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신자들이 점집에서 찾는 갈증 해소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공해 주어야 한다.


성령에 이끌리는 기도생활

신앙인이 이끌리는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에 대해 지금까지 교회의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분석한 원인들을 살펴본다.

첫째 신앙인이 지녀야 하는 자격의 결여, 신앙인에게 부족한 신뢰와 의탁, 진리를 미리 알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신앙인의 정체성과 자의식의 부족을 말하고 있다.

둘째 불안한 사회상황과 상대적 박탈감이다. 또한 교회가 보여주어야 하는 자비와 위로의 부족, 그리고 점술문화 금지에 대한 합리적 설명 부족이다.

이 같은 원인분석들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이 지속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다. 이는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 곧 신앙인들이 성령에 이끌리는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한국 종교사상의 관점에서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은 풍류사상이나 신바람의 정감으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사실 한국사와 함께해 온 종교사상은 불교와 유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이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무속사상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는 종교 신학적 관점에서 인격적인 신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는 깨달음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고, 유교는 이기(理氣)의 철학적 원리로 세상의 움직임을 말한다.

한국 종교사상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역시 인격적인 신론과 그리스도론을 넘어서는 성령에 이끌리는 신앙으로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을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은 무엇인가에 이끌리는 종교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학적으로 영의 이끌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인들은 단순히 자신의 앞날을 점술로 알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삶이 진리와 영의 신성한 힘에 이끌리고 싶은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인들은 하느님다운 하느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진리와 사랑의 성령에 이끌리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성령 체험이 부족한 신앙인이 거룩한 영의 자리에 점술과 기복신앙이 대체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에 관한 해법으로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성령에 이끌리는 신앙 심화와 기도생활을 통해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점술문화와 기복신앙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곽승룡 비오 - 대전교구 신부. 1989년에 사제품을 받고, 2013년부터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곽승룡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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