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문헌ㅣ메시지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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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1 ㅣ No.712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1) 자비, 형제를 향한 따스한 얼굴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11일 ‘자비의 희년’ 칙서 『자비의 얼굴』을 발표했다. 『자비의 얼굴』은 오는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막을 올려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 이어지는 ‘자비의 희년’ 선포 배경과 실천 지침 등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그리스도 자비의 얼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자비가 드러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앞으로 열두 번에 걸쳐 『자비의 얼굴』 해설을 통해 자비에 관한 교황 가르침의 정수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다. 25항으로 구성된 『자비의 얼굴』에서 교황은 자비의 신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약이며, 나자렛 예수 안에서 아버지의 자비가 정점에 도달하는 가시적인 표지(1항)라고 말한다. 교황은 기쁨과 평온, 평화의 원천인 자비의 신비를 계속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자비는 인간을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연결하는 사랑과 희망의 다리이다.(2항) 자비는 늘 어떤 죄보다 크다. 교황은 우리가 하느님 자비의 전능을 드러내는 훈련을 하도록 제안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자비가 약함보다 전능의 표지라고 말한다. 구약은 하느님의 본질을 인내와 자비로 가득히 묘사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계시한다.(6항) 하느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구원역사로 초대하고, 아버지의 자비로운 시선을 선사한다. 수난 전 예수는 자비의 시편을 기도하였고, 자비의 빛으로 파스카 희생과 그 영원한 기억의 성체성사를 세웠다. 자비와 함께 예수는 수난과 죽음으로 들어갔다.(7항)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마태 5,7) 인간의 사랑은 확실히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느낄 때, 내가 원할 때, 내가 선을 베풀 때 나는 사랑한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에서 같이 그분의 사랑은 받지 않고 선물하는 데 있다.

세상에서 우리는 한 마디로 불의와 억압과 폭력이 넘친 인간의 무자비한 모습이 자행된 시기를 지난 세기에 보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이를 증명하고 그 후로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인간은 무자비하다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였다.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모두 지구의 고통과 어려움에 한몫을 하고 있다. 인류가 저지른 엄청난 죄와 고통 앞에서 우리는 깊은 의식성찰과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속이 쓰릴 줄 아는, 마음을 열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자비는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선포한 교회 정체성의 구체적인 목표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는 야전병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즉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2015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2) 품어라 아주 품어라



우리는 예수의 시선에서 성삼위의 사랑을 경험한다. 예수 행적의 징표들은, 특히 가난한 자, 병자, 고통 받는 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비를 가르친다. 예수는 모든 것을 자비로 말하고, 모든 연민을 피하지 않는다.(마태 9,36)(8항) 예수는 연민과 자비로 잘못을 용서하며, 누구도 - 잃은 양, 잃은 은전, 돌아온 아들 -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자비를 하느님의 본질로 계시한다.(루카 15,1-32) 예수는 자비가 아버지의 행동만이 아니라 어린 자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표준이 된다고 단언한다.(마태 5,7) 성경 전체가 가리키는 핵심어, 자비는 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제한이 없고 가시적이고 명백한 사랑은 추상 개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의 태도와 생활습관으로 아버지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자비로운 것처럼 우리도 자비롭도록 부르심을 받았다.(9항)

하느님은 본디 사랑이신데(1요한 4,16), 그 사랑을 사는 방법이 자비와 관련된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이다. 성경에서 자비(hesed)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죄 지은 사람에 대한 용서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바로 자비다. 곧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죄인에게 선물로 용서를 하시는 사랑이 바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자비이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구약성경에서 364번이나 나오는 자비는 히브리말 헤세드(hesed)인데 선량함에서 오는 은근한 자세, 자신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을 지는 남성적 특징을 띤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파기한 죄로 법적으로 정의를 내세워 하느님의 자비(hesed)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계약 당사자 하느님은 당신 사랑에 책임을 지므로 그 자비(hesed)를 베풀 수 있다. 이 사랑에서 오는 열매가 용서, 은총의 회복, 계약의 갱신이다.

라하밈(rahamim)은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서 품에 안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자비다. 이 자비는 권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으로 연인 관계, 부모자식 관계, 부부 관계, 하느님과 백성 관계다. 그 생명이 저지른 잘못과 죄의 유무를 떠나 생명을 감싸 안고, 받아들이며 접촉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자비가 잘 나타나는 성경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자비의 또 다른 사랑은 후스(hus) 연민이다. 불쌍히 여기고 감정적인 동정을 나타낸다. 약자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자비는 구체적으로 용서로 나타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시편 103,2-4) [2015년 9월 27일 한가위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3) 자비는 교회 삶의 기초이다



교황은 교회의 사목활동이 모두에게 온유할 것을 요청하며, 교회의 신뢰는 자비와 연민의 사랑을 얼마나 보이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자비를 실천하는 길을 잊은 지가 오래된 듯하다. 오직 정의에 초점을 두는 유혹은 자비가 먼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게 만든다. 교회에 자비가 없는 삶은 사막처럼 황폐하다.(10항)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았다. 쇄신된 사목활동의 주제도 자비이고, 새로운 복음화의 과업에서 교회는 자비를 증거하는 신뢰와 책임을 보여야 한다. 교회의 언어와 제스처들이 자비로 전달되어야 한다.

교회의 첫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교회가 현존하는 어느 곳에서나 아버지의 자비가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자비의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12항) 교황은 자비의 성년을 주님 말씀의 빛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13항)

하느님 자비의 모습이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마태 18,12), 잃어버린 아들 등, 복음의 비유를 통해 볼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29-37)은 인간의 자비를, 돌아온 아들(루카 15장)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고 있다. 공통점은 행동으로 자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최후심판에서 주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자비하였나이다.

생태계에서 동물은 무리를 지으면서 돌아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하지만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 죄에서 돌아올 수 없다. 곧 은총 없이 회개할 수 없고, 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자신이 치룬 삶의 비용에서 그것을 배웠다. 어떤 죄인도 홀로 회개할 수 없다. 강한 의지를 가졌든 약한 의지를 소유하였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어깨 위에 죄인을 둘러매지 않고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므로 죄인은 은총이 자신을 인도하도록 청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힘에 따라 은총에 의해 협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의지는 무장될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희망이 없는 중환자에게 생명을 구해주는 의사는 아주 큰 기쁨을 경험한다. 자기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이겨낼 때도 기쁨이다. 그런데 영생을 위해 영혼이 살아난다면 얼마나 더 큰 기쁨이겠는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요한 금구 성인은 우리가 하는 기도들 가운데 어떤 것은 허락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 뜻에 상응하는 청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에 반하는 원의를 동의하지 않는다. [2015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4) 특별한 회개의 은총을 선사하는 자비의 성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판단과 단죄를 내려놓도록 요청한다.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려면 형제·자매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겉에서 못 보는 아버지 영혼의 아주 깊은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비의 도구가 되는 것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버지와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이 성년의 모토다.

자비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발견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당신을 온전히 거저 내어 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주러 오신다. 우리가 간청하는 도움은 이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비의 첫 단계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놓인 나약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다. 그분의 도우심은 당신의 현존과 가까이 계심을 우리가 깨닫도록 도움을 주신다.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어 우리도 나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수 있다.(14항)

고해소는 죄를 고백할 때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은총의 거룩한 장소가 된다. 은총의 매력은 우리가 자격은 없지만 죄인에게 필요 이상의 과분한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오늘날 무자비한 세상에 가장 아쉬운 것은 자비다. 특히 제도가 무자비한 듯해서 정말 마음이 불편하다. 자비 없는 자본주의 제도, 약한 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소유와 배척의 경제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경계하라고 지적한다.

한국사회 역시 오십년 동안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자비와 멀게 달려왔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 있는 생명의 가치보다는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마음과 영혼의 성장, 인격의 성장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한국사람 열 명 가운데 반 이상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가지고 있고, 그 중 10%의 사람은 분노조절장애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도로에서는 보복운전으로, 집에서는 층간소음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보복운전이 성에 차지 않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흉기를 들고 보복을 하고, 심지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자동차로 밀어붙이기도 한다. 층간소음문제로 무림의 검객, 서부활극 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세상은 자비로운 사람을 원하고 자비롭게 생활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성장이 가능하고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연민을 느끼지만 상처를 준 자, 해친 자에게 풍부하게 믿음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아는 자 곧 자비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용서다. 특히 공동체의 용서는 동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다. 자비를 입은 사람이 자비를 베풀 수 있다. [2015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5) 주님을 위한 24시간과 자비의 선교사 파견



하느님 자비의 특별한 경험을 지닌 가난이 우리를 복음 속 깊이 들어가도록 초대한다. 먼저 자비의 육적 활동으로 초대한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자에게 입을 옷을 주고, 낯선 자를 반기며, 아픈 이를 치유하고,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주며, 죽은 자의 장례를 치러주기다. 또 자비의 영적 활동을 기억하고 실행할 것을 청한다. 의심 품은 자(믿음이 약한 자)에게 조언하고, 신앙을 모르는 자에게 가르쳐주며, 죄 지은이를 타이르고, 역경 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며, 성낸 자를 용서하고, 우리를 아프게 한 자를 인내로 견디며,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기다(15항).

교황님은 내년 사순 제4주일 이전 금요일과 토요일에 거행되는 주님을 위한 24시간에 모든 이를 초대한다. 젊은이들과 많은 이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길, 삶의 의미를 되찾는 길을 다시 발견하고, 하느님의 위대하신 자비를 직접 깨닫게 될 것을 바란다. 고해성사는 고해자에게 참된 내적 평화의 원천이 될 것이다.

고해 사제는 하느님 아버지 자비의 참된 표지가 되라고 강조한다. 좋은 고해 사제가 되려면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 고해 사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고해 사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참회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를 되찾은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 고해 사제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자비의 으뜸가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17항).

교황님은 자비의 선교사들을 파견한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배려의 표지가 되어 참으로 신앙의 근본이 되는 자비의 신비가 지닌 부요에 하느님 백성이 깊이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그들은 용서를 구하는 이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표지가 될 것이다. 자비의 선교사들은 자신이 “자비로우시며 충실하신 대사제”(히브 2,17)이신 예수님으로 보일 수 있음을 깨닫고 자비의 부르심을 실행하여야 한다.

교황님은 형제 주교들이 이러한 선교사들을 초대하고 받아들여 그들이 확신에 찬 자비의 설교자가 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교구가 만민 선교를 조직하여 이러한 선교사들이 용서의 기쁨을 전하게 격려한다.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희년이 우리에게 선사한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특히 사순 시기에 목자들은 열심히 신자들을 다시 불러들여, 그들이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도록” 하기 바란다(히브 4,16)(18항). [2015년 10월 18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6) 세상을 떠날 때 돈을 가져갈 수 없다. 19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은총의 초대에 회개하며 나아가는 행동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였다. 교황은 삶이 돈에 달려 있지 않고, 돈과 대비해서 다른 것의 가치 또는 존엄성이 결여된 것을 생각하는 처절한 올가미에 빠지는 착각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부패는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를 방해하고, 무모한 탐욕으로 우리의 계획을 약화시킨다. 부패는 돈이 힘의 형태로 드러나는 착각이고, 하느님을 배반하는 마음이 범죄로 경화되는 어두움의 작업이다.

교황은 특히 모든 범죄 조직에 속한 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간절히 요청한다. 세상을 떠날 때 그 돈을 가져갈 수 없다. 피묻은 돈을 긁어모으려고 폭력을 행사해 보아야 그 누구도 강해지거나 영원히 살지도 못한다. 사회의 이러한 곪은 상처는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근간을 위협하기 때문에 하늘에까지 이르는 중대한 죄다. 부패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부패는 우리 마음을 죄로 완고하게 만들어 하느님을 멀리하고 돈이 곧 힘이라는 허상에 빠지게 한다. 부패는 의혹과 음모로 조장되는 어둠의 활동이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최고의 부패는 최고의 악이다.”라고 바르게 말하였다.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이 부패를 척결하려면 현명함, 경계심, 정직성과 투명성 그리고 어떠한 부정행위라도 고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공개적으로 부패와 맞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부패에 가담하여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교회가 마련한 자비의 특별한 시기에 모두 회개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정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나라마다 부패지수가 다르게 나타난다. 대개는 부패의 원인이 되는 것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의 사람들 가운데서 발생한다. 아는 자들 사이, 친구들 사이에서 편애함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이다. 공직사회에서도 친인척 혈연, 학연, 지연 등에서 부패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어떠한 희생이라도 바르고 정의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율법의 목적은 하느님을 위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바리사이의 생각과 반대해서 말하길 “사랑은 계명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듯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모든 계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 세상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보아야 그 사랑이 보일 것이다. [2015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7) 정의와 자비는 싸우지 않는다. 20항



정의와 자비는 대립하는 두 개의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충만 속 정점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두 차원의 현실이다. 성경은 정의가 하느님의 계명들을 따르는 정직한 이스라엘의 관습이고, 율법의 충만한 준수로서 행동을 말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정의와 판관이신 하느님을 언급한다. 하지만 종종 정의의 본래 의미가 왜곡되고 그 깊은 가치를 모호하게 만들어 율법주의에 이르게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정의가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보다 신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예수님은 법 준수를 넘어 신앙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이 의문을 제기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의미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은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자비를 해방 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다. 바리사이들과 다른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가렸다. 율법 준수의 권유가 인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 된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호세 6,6) 예수님은 몸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그 무엇보다도 자비가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시고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자비가 예수님 사명의 근본임이 드러난다. 자비는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이들에게 도전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으신다. 율법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깊은 자비를 깨닫게 된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 2,16) 바오로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신앙을 앞세우게 된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가져다주신다. 성 바오로는 정의가 아니라 신앙을 첫 자리에 놓는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의 노예들과 억압된 이들을 해방하는 힘이 된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이고 정의는 용서다.(시편 51[50],11-16) [201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8) 자비보다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쉽다. 21항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신다. 호세아 예언자의 경험은 자비가 정의를 뛰어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이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이스라엘 왕국이 붕괴 직전에 있었다. 사람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선조들의 신앙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불충한 이들을 배척하시려 한다는 것이 타당해 보일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으므로 그에 따른 형벌, 곧 유배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호세 11,5)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질책 바로 다음에, 예언자는 어조를 완전히 바꾸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8-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치 이 예언자의 말씀에 주석을 다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보다 분노를 참으시는 일이 더욱 쉬우셨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이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신다. 그렇다고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정반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이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신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 10,3) 하느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와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주셨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9) 자비의 성년에는 대사도 수여됩니다. 22항



희년에는 대사도 수여된다. 자비의 성년에 대사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시는 당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힘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보이신다.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와 교회의 중개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여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고 또한 늘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신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죄를 저지른다. 우리는 완전하게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한 죄의 무게를 무겁게 느낀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힘을 느끼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죄의 힘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지만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로 그에 맞갖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고해성사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 그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신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강하시다. 그 자비가 하느님 아버지의 대사가 된다. 하느님의 용서는 한계를 알지 못한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통하여 이미 용서 받은 죄인에게 다가가시어 죄의 결과로 남은 모든 것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시어,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고 자비롭게 행동하며 사랑을 키울 수 있게 해 주신다.

교회는 성인의 통공(通功)으로 살아간다. 통공(commnunio sanctorum)은 하늘의 교회, 땅의 교회, 연옥의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로(功勞)를 서로 나누고 공유함을 뜻한다. 곧 삼중 교회 공동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어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루면서 자신의 선과 공로를 나누고, 기도 안에서 영적 도움을 주고받음을 말한다. 성찬례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 인 이 통공은 우리를 성인들과 복자들과 묶어주는 영적인 결합을 이루게 한다.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묵시 7,4)

성인과 복자들의 거룩함은 우리의 나약함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어머니인 교회가 기도와 삶으로 거룩한 이들이 나약한 이들을 도울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성년의 대사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믿는 이의 삶 전체에까지 이른다는 확신으로 우리가 당신의 자비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사는 교회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구원의 열매를 모든 이에게 전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이 희년을 충실히 살아가며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비로운 대사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간청한다. [2015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10) 사랑이 꽃이라면 자비는 열매입니다. 2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거행하는 희년이 다른 숭고한 종교전승들과 함께 만나고 서로 돌보는 것을 신뢰한다. 서로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열렬한 대화로 서로의 문들이 열리고, 경멸하는 모든 형태의 닫힌 마음을 제거할 것이며, 폭력과 차별의 모든 형태를 배격할 수 있다고 바란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사랑, 자비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다. 만일 하느님의 사랑이 꽃이라면 하느님의 자비는 열매이다. 공자도 수제자인 자공이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뜻으로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시진핑의 신조어이기도 하다.

기원후 2세기 랍비유대교 경전 미쉬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는 이방인의 질문에 랍비 힐렐은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각주일 뿐입니다. 가서 이것을 공부하고 실천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자신이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토라의 전부이며 핵심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토라와 논어의 말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그 가르침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루카 6,31) ‘하지 말라’는 부정문 대신 예수님께서는 ‘하라’는 긍정문으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요청하신다.

이와 같이 자비는 교회 밖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자비는 우리를 유다교와 이슬람교와 관계를 맺게 해준다. 이 두 종교는 자비를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여긴다. 이스라엘은 이 계시를 처음으로 받았다. 이 계시는 온 인류와 나누어야 하는 헤아릴 수 없는 풍요의 원천으로 역사 안에 남아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구약 성경의 내용은 자비로 가득차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하신 활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창조주를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분이라고 부른다. 무슬림들은 그들의 나약한 일상에서 자비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지지하여 준다고 느끼며 이 호칭으로 자주 기도한다. 무슬림들도 하느님 자비의 문이 늘 열려 있기에 그 누구도 그 자비에 한계를 둘 수 없다고 믿는다.

교황님은 이 자비의 희년에 이 종교들과 또한 다른 고귀한 종교 전통과의 만남이 촉진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희년에 우리가 더 활발한 대화를 나누어 서로를 더욱 잘 알고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희년에 모두 닫힌 마음과 서로 무시하는 마음을 없애고 모든 폭력과 차별을 몰아내기를 바란다. [2015년 11월 22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11) 하느님 자비의 신비에 가장 깊게 참여하신 마리아 24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칙서 마지막에서 자비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께서 다정한 모습으로 이 성년에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온유함이 주는 기쁨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심오한 신비를 마리아만큼 꿰뚫어 본 분은 없다. 마리아의 온 생애는 사람이 되신 자비의 현존을 따라서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의 어머니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어머니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가장 깊게 참여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성년에 성모 마리아의 부드럽고, 친절하며, 신선한 표정이 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고 희망한다. 그 희망은 마리아의 전 생애가 ‘살이 된 자비의 현존’을 모방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하느님 자비의 현존을 따름으로써 가능하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한다.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되신 마리아께서는 처음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의 궤가 되도록 준비되셨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당신 마음 안에 하느님 자비를 고이 간직하셨다.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서시며 부르신 마리아의 노래는 “대대로”(루카 1,50)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바쳐진 것이다. 동정 마리아의 예언자적 말씀 안에 우리도 있다. 하느님 자비의 열매를 얻고자 성문을 지나가는 우리에게 이 노래는 위안과 도움이 될 것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께서는 사랑의 제자인 요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용서의 말씀을 직접 들으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에게 하신 최고의 용서는 하느님 자비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자비에는 그 끝이 없으며 모든 이에게 예외 없이 이른다는 것을 증언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래되었지만 언제나 새로운 기도인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Salve Regina)를 부르며 성모님께 다가갈 것을 제안하시며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성모님께서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끊임없이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자비의 얼굴을 바라보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느님 자비를 자신의 평생 사명으로 삼은 성인과 복자들에게도 기도합시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사도인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성녀를 기억한다. 하느님의 깊은 자비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름 받은 성녀가 우리를 위해 전구하여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얻는 확고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해 주기를 비신다. 교황은 신적 자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도록 불린 자비의 사도, 성녀 파우스티나가 우리를 중재하고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확고함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생활하는 은총을 우리 모두에게 전구한다. [2015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 (12) 주님!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25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성년을 선포하며, 희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놀라게 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려고 언제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두신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다. 교회가 확신을 가지고 자비를 선포할 때 교회의 삶은 참되고 믿을 수 있게 된다. 특히 큰 희망과 심각한 모순으로 가득찬 이 시대에 교회의 첫째 직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먼저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인 자비를 찬양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하느님의 심오한 삼위일체의 신비핵심에서 자비의 커다란 물결이 일어나 끊이지 않고 넘쳐흐른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시더라도 결코 마르지 않을 샘이 자비이다.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다가가 마실 수 있다. 하느님 자비는 결코 끝이 없다. 이 신비의 깊이는 그 샘물에서 샘솟는 풍요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다. 마르지 않는 하느님 자비의 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에 갈 수 있다. 교회는 자비를 확장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고, 연민과 위로를 제공하면서 인내해야 한다. “이 희년에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여, 용서와 지지, 도움과 사랑의 행위와 말씀이 강렬하고 분명하게 울려 퍼지게 하소서. 언제나 용서하고 위로하며 끊임없이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대사를 얻기 위해 신자들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열망의 표시로 주교좌 성당이나 교구장 주교가 지정한 성당들, 또는 로마의 네 교황 대성전에 있는 성문(聖門)으로 짧은 순례를 한다. 또 자비의 문이 열려 있는 순례지와 전통적으로 대사를 얻도록 지정된 희년 성당에서 대사를 얻을 수 있다. 이 때 고해성사를 보고 성찬례에 참여하며 자비를 묵상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와 온 세상의 선익을 위하여 마음에 담고 있는 지향으로 기도한다. 병자들과 외로운 노인들도 성체를 모시거나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서라도 미사 성제와 공동 기도에 참여하면서 이 시련의 때를 살아가는 것은 희년 대사를 얻는 방법이 된다. 자유가 제한된 수인들도 대사면의 계기가 되어 감옥의 경당에서 대사를 얻을 수 있다. 감방의 문지방을 넘어갈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다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성문을 지나가는 상징이 된다. 하느님의 자비는 마음을 변화시키고, 창살을 자유의 경험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직접 자비의 영적 육체적 활동을 한 번 이상 할 때마다, 희년 대사를 반드시 얻게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해서도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성찬례 거행 때에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자비의 아버지께서 그들의 잠벌을 없애 주시어 영원한 참행복 안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도록,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끝> [2015년 12월 6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대전주보 3면, 곽승룡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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