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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콘스탄티누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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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7-04 ㅣ No.37

[성미술 이야기] 콘스탄티누스의 꿈

 

 

- ‘콘스탄티누스의 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2~1466년, 329x190㎝, 프레스코. 이탈리아 아레초의 성 프란치스코 교회 소장.

 

야전 막사에서 곤히 잠든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붉은 이불을 덮고 잠든 주인공이 콘스탄티누스다. 천사가 왼쪽 위에서부터 가파른 각도를 그리면서 날아든다. 손에는 황금 십자가를 들었다.

 

 

- ‘십자가의 발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2~1466년, 356x373.5㎝, 프레스코. 이탈리아 아레초의 성 프란치스코 교회 소장.

 

십자가를 파묻은 곳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베누스 신전이 버티고 있었다. 헬레나는 이교 여신의 신전 기둥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고랑을 파서 밭을 만든다. 땅 밑을 삽으로 스무 자쯤 파 들어가자 십자가 셋이 나왔다.

 

‘주님의 십자가를 찾아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2~1466년, 356x373.5㎝, 프레스코. 이탈리아 아레초의 성 프란치스코 교회 소장. 헬레나는 세 개의 십자가 가운데 어떤 것이 주님의 십자가인지 알 수 없었다. 십자가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다 옮겨다 놓고 아홉 시간쯤 지났을까, 마침 장례 행렬이 그곳을 지났다. 죽은 시신을 꺼내서 세 개의 십자가 위에다 차례대로 눕혔더니 주님의 십자가에 닿는 순간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십자가 표식 안에서 승리하리!”

 

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은 계기가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한 해 전, 그러니까 312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숙적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하루 앞두고 잠이 들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황제를 깨우더니 『위를 보라』고 말한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밤하늘에 십자가가 밝은 빛을 뿜으면서 걸려있고, 그 위에 황금 글씨로 「이 표식 안에서 너는 승리를 거두리라」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기운과 용기를 얻은 황제는 잠에서 깨어나 당장 군단 깃발의 휘장에 십자가를 그리게 한다. 이튿날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버려둔 채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큰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가 된다.

 

델라 프란체스카의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야전 막사에서 곤히 잠든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붉은 지붕을 얹은 막사는 황금빛 휘장을 둘렀다. 붉은 이불을 덮고 잠든 주인공이 콘스탄티누스다. 천사가 왼쪽 위에서부터 가파른 각도를 그리면서 날아든다. 손에는 황금 십자가를 들었다. 막사를 지키는 초병들은 천사의 출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침상 위에 누운 황제는 눈을 감고 있지만, 눈썹이 꿈틀대는 것을 보면 꿈속에서 천사를 만난 모양이다.

 

델라 프란체스카는 천사가 날아와 황제에게 십자가 표식을 내밀어 보이는 순간을 재현한다. 이것은 꿈속의 풍경이다. 화가는 빛과 어둠을 붓으로 그려서 꿈과 현실, 예언과 역사를 한 장면에 섞어놓는다. 잠든 황제의 꿈속을 몰래 엿보는 화가의 솜씨가 볼 만하다.

 

그림은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신비롭다. 역사와 신화를 넘나드는 은유의 풍경은 그의 붓이 스치는 순간 생동감 넘치는 현실이 된다. 꼭 필요한 배경 장치와 등장인물 서넛 밖에 사용하지 않는 그의 그림은 마치 잘 짜여진 무대 장치 위에서 연기하는 배역들처럼 보인다. 그림 속 연극의 연출은 화가의 몫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또 어머니 헬레나에게 부탁해서 예루살렘 원정을 떠나게 한다. 그곳에 가서 골고타의 십자가를 발굴해내기 위해서였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헬레나는 곧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헬레나의 십자가 발굴 이야기는 성 암브로시우스가 쓴 「테오도시우스의 추모사」를 비롯해서 여러 출전에 실린 기록들을 야코부스가 「황금전설」에 정리해둔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아담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깊은 병에 걸렸다. 아담은 아들 셋(Seth)을 에덴 동산으로 보낸다. 그곳 인식의 나무에서 짜낸 기름을 바르면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산을 지키던 대천사 미카엘은 셋에게 나무 기름을 주지 않고 그 대신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준다. 셋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 아담은 이미 운명한 뒤였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 무덤 위에다 나뭇가지를 꽂아두었더니, 어느덧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자랐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아름드리가 된 나무를 솔로몬 왕이 켜서 가지고 왔다. 성전 건축에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목수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목재를 사용할 수 없었다. 길이를 꼭 맞추었다 싶었는데도 항상 짧거나 길어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목수들은 그 나무토막을 호수 위에 던져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솔로몬을 찾아온 시바 여왕이 그 나무를 보고는 『장차 이 나무에 달릴 사람이 있을 터인데, 바로 그 분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며, 유다 왕국은 그로 말미암아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놀란 솔로몬 왕은 나무토막을 땅 속 깊이 파묻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곳에 연못이 고이고 양떼들이 와서 목을 축이곤 했는데, 간혹 병든 자들이 연못물을 마시면 감쪽같이 병이 낫곤 했다고 한다. 이윽고 주님이 수난을 당하실 때가 다가오자 나무토막이 연못 위로 떠올랐다. 유다인들은 그 나무를 가지고 십자가를 만들었고, 그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못 박혀서 돌아가신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300여 년이 흐른 뒤, 예루살렘에 도착한 헬레나는 우여곡절 끝에 유다스라는 이름의 유다인으로부터 십자가가 묻힌 장소를 알아낸다. 헬레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어서 한 토막은 로마로 가지고 오고, 나머지 한쪽은 은으로 만든 궤짝에 넣어 예루살렘에서 보관하도록 했다. 또 주님의 사지를 박았던 쇠못을 따로 챙겨다가 하나는 아들 콘스탄티누스의 왕관에, 그리고 또 하나는 군마의 고삐 장식에 녹여 넣었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 일을 두고 『정수리에 얹는 왕관의 쇠못은 황제의 영혼을 비추어 믿음을 돋구고, 손에 쥔 고삐를 통해서는 세상에 대한 권력을 지배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칙령을 내려서 이후부터 로마제국에서는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처형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오랫동안 수난과 모욕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마침내 영광과 구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9월 28일,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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