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연중 24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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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9-13 ㅣ No.369

연중 제 24 주일 (가해)

 

            집회서 27,30-28,9 로마 14,7-9 마태 18,21-35

 

       2002. 9. 15.

     

주제 : 내가 세상에서 진정으로 용서 받으려고 한다면? - 조건(條件)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순교자 성월 9월의 세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에서 순교자 성월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내 삶을 통하여 순교성인들이 보여주셨던 삶을 내 삶에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교자들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분들의 삶을 내 안에 드러내려고 해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거듭되면서 같은 말 표현이기는 해도 ‘순교’가 의미하는 뜻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그렇게 우리시대에 필요한 순교의 의미를 생각하고 삶에 적용할 방법을 살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이라면 내 것을 퍼주는 일보다는 내 힘이 닿는 곳에 쌓아놓기를 원하고 내가 먼저 사용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흔히 구별되는 정치인이라고 특별히 더 나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만,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 국회에서 꽤 높은 직책을 지냈던 분이 말하기를 ‘남한을 적화시키려고 애쓰는 북한에 남한의 식량을 지원하는 일보다는 그 식량으로 수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국민들을 먼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당연하고 옳은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웠던 것은 이웃을 위한 희생은 내가 사용하던 것을 절약하여 내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마음은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나를 먼저 도와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반복되는 세상의 이러한 서글픈 모습을 2000년 전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보다 앞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었던 그는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질문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제가 일곱 번을 용서해준다면 아주 많이 하는 사람에 들겠죠?”  시간도 다르고 상황도 다른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압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고 자신이 하는 그런 일은 충분히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응답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은 그 차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대와는 다른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베드로 사도가 했던 이 질문의 의도를 잘 알아들으려면 그 말 표현을 바꾸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된 일을 행해서 용서를 받는 사람이 됐다면, 저는 그들에게서 몇 번이나 용서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현실을 돌아보는 자신의 마음일 텐데 베드로 사도의 의도를 알아보자는 뜻으로 질문의 모양을 바꾼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용서를 받아야 만족할지 그 분량이나 횟수는 각자가 더 잘 아는 일입니다.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은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내가 한번 실천하는 선행은 그 분량을 아주 큰 것으로 생각하고 남들이 하는 선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는 일들이 자꾸 반복되면서 내 삶을 좀먹는 것이고, 그런 일이 자꾸 쌓이면서 이웃을 하찮게 보는 것인데도 우리는 그 심각함을 별로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좋게 말한다면, 이런 현상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크게 봐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돈에 대한 단위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는 사람이라면 백 데나리온 정도는 아낌없이 남을 위해서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바꾼다면, 내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받고 싶은 분량의 ‘6십만분의 1’정도는 남을 위해서 베풀어 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내게 베풀어주는 것은 크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보통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귀중하게 보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내가 정성을 들여서 다른 사람을 돕는 일도 좋은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아름다운 일이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되기 위해서는 ‘똑같은 분량을 되받으려는 생각으로 선행을 실천하지 말아야하며, 아주 작은 모습으로 드러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삶에서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아주 당연한 삶의 자세 몇 가지가 집회서에 나옵니다.  ‘원망과 분노를 떨어버리고, 내가 이웃을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이 앞서야만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담는 계명에 대한 자세를 올바로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사용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그 좋은 것들을 나 혼자 사용하고 없애버릴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으려는 자세’를 버리고, ‘말로 주고 되로 받아도 행복을 느끼는 자세’야 말로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행복을 내가 누리며 살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하느님은 우리더러 어떻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시겠는지 잠시 생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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