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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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7 ㅣ No.134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8)


II.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1) ‘말씀’은 하느님이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이 말씀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말씀’은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아버지’와 다르시면서도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결국 ‘말씀’도 ‘아버지’처럼 하느님이시다. 곧 하느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다.”(주석성경,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 355면) 위의 성경말씀을 보면 ‘말씀=하느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 주석의 내용처럼 결코 무리가 없는 말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창조 수단이 다름 아닌 ‘말씀’이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는 말씀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세상 창조 과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표현되는 말씀이 열 번이나 나온다. 창조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말씀’은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힘으로 해석되지만 곧 ‘말씀’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역시 이 말씀도 요한복음 1,1의 말씀처럼 ‘말씀=예수님’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말이다. 우리는 전례 때에 복음환호송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라고 자주 노래한다. 역시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말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 정기총회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다.(주님의 말씀 15면)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말씀’이 없으면 하느님도 안 계신다는 말이다. 또한 ‘말씀’이 없으면 예수님도 안 계신다는 것이다. 하느님 없는 믿음이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으며 예수님 없는 믿음이 어찌 믿음일 수 있겠는가? 교회는 지금 결정적인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공동체를 통하여 교회를 복음화하고 쇄신하고자 하는 것은 멀어진 복음을 가까이 하고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소공동체를 통하여 복음나누기를 함으로써 복음을 되찾고 복음과 가까이 하며 복음 중심의 신앙생활로 우리들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의례히 묵주신공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그보다는 복음나누기를 통하여 복음을 가까이 할 뿐만 아니라 복음도 나누고 자신도 나누고 삶도 나누는 ‘나누는 삶’의 매력과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일까? 그것을 마리아가 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그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요즈음 교회는 ‘복음화’를 부르짖고 있다.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찾아낸 방법이 바로 ‘복음화’이다. 이 말 속에는 복음과 멀어진 교회를 복음과 함께 사는 교회로 만들자는 말이다. 어쩌면 말씀이 없거나 말씀과 멀어진 교회를 ‘말씀 중심의 교회’, ‘복음 중심의 교회’로 변화시키자는 말이다.

저 유명한 모리스 준델 신부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구원을 찾아 모스크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유럽의 황폐이고,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빛나게 보여 주지 못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황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일은 수백만의 프랑스 사람들이 전적으로 비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교회도, 그리스도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모리스 준델, 성 바오로 87면) 다시 말해서 유럽의 사회가 ‘신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황폐해진 유럽 교회’, ‘신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복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말씀’이 없는 교회, 혹은 ‘말씀’과 멀어진 신앙생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으로 복음화하기보다는 로마화 혹은 유럽화 내지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과 멀어짐으로써 교회의 정체성을 잃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이다.

3) 말씀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거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12)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마태 7,23)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기쁨과 행복!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8)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원리를 깨닫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목욕탕에서 나와 벌거벗은 몸으로 연구실로 달려가면서 “알았다! 알았다!” 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만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결코 그분을 떠날 수가 없다.

오늘날 냉담자가 많은 이유도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말씀’ 중심의 사목과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소공동체이며 소공동체를 통하여 복음나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화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월간빛, 2013년 5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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