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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의 중심은 감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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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

성당의 중심은 감실? (1)

 

 

신부님께서는 이전에 제대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시면서 성당의 중심은 제대이므로 성당 안에 들어설 때 제대를 향해 인사하는 것이 옳다는 뜻의 글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많은 본당에서는 제대가 아닌 감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기 위해 본당신부님께 여쭈었더니, 전례 중에는 제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지만 전례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감실이 중심이 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당의 중심이 때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어쩐지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신부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대와 감실의 싸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성당들 구조는 대부분 비슷합니다. 즉, 감실이 제대 뒤 성당 벽 중앙에 놓여 있거나 아니면 제대 왼쪽이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수녀님이 계신 성당은 감실이 제대 바로 뒤 성당 벽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제의방에서 나와 제대와 감실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제대에 등돌린 채 감실에 인사하려다 보니 갑자기 "성당의 중심은 제대이다"라고 교육받았던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몸을 돌려 감실을 뒤로 한 채 제대를 향해 인사를 하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왠지 감실 안에 모셔진 예수님께 죄스런 마음이 들어 다시 몸을 돌려 감실을 향해서 인사를 하고서야 그 사이를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마침 본당신부님이 성당 안에 들어오셨다가 그 광경을 보시고는 수녀님을 불러 그 까닭을 묻기에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그 본당신부님 왈, "수녀님, 전례중에는 물론 제대가 중심이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 전례도 거행되지 않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계신 감실이 중심이 아니겠어요?" 하시더랍니다.

 

신학원에서 저한테 "성당의 중심은 제대이다"라고 단단히 교육받은 그 수녀님, 본당신부님 말씀을 거역하기도 쉽지 않은 일, 그래서 그 다음부터 감실과 제대 사이의 지름길을 포기하고 제대 앞으로 지나가기로 결심하셨답니다. 제대 바로 뒤에 감실이 있으니, 제대에다 절한 것인지 아니면 감실에다 절한 것인지 본당신부님은 알 수 없을 것이요, 또 한 번으로 제대와 감실 모두에 인사한 격이니 일석이조가 아니냐며 웃으시던 그 수녀님이 생각납니다. 제대와 감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닐진대, 오늘날 각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제대와 감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일을 자주 볼 수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요?

 

 

감실에 관한 간단한 역사

 

제대와 감실 사이에 이러한 쓸데없는 오해가 생겨난 까닭을 알려면 먼저 감실이 성당을 어떻게 점령(?)해 왔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생겨난 아주 이른 때부터 미사중에 축성한 빵을 보존하는 관습이 존재했습니다.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이들이나 병에 걸려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이때는 지금처럼 성당이 있던 것은 아니고 예배드리기에 적당한 가정집에서 미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에 성당 안에 성체를 보존하는 장소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제의 집에 성체를 보관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종교 자유를 누리게 됨에 따라 성당이 건축되었으나 성체를 보관하는 장소는 여전히 성당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7~8세기의 문헌에는 성체가 제의방에 보관되어 있음이 나타납니다. 미사중에 축성한 빵을 쉽게 보존하고 미사 밖에서 사용될 성체를 보관하기 위해서 아마도 제의방이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가 봅니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신자들의 신심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천사주의" 또는 "윤리적 엄격주의"라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죄인의 몸으로 어찌 성체를 모시겠는가 하는 생각이 널리 퍼져서 미사중에 영성체를 안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미사는 라틴어로 드려졌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드려지는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성찬례 자체보다는 대중 신심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미사 중에 축성된 빵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믿음이 더욱 구체화되면서, 성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해 계시다는, 성체는 그 자체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믿음이 신자들의 마음을 잡아당겼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영성체는 하지 않고 대신 성체를 "바라보는" 영광을 갖고자 열망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열망은 결국 성찬 전례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의 축성 후 신자들이 볼 수 있게 받들어 올리는 예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신 성체를 성당의 가장 고귀한 자리에 모시고 싶어하여 그때까지 성당의 중심 자리에 놓여 있던 제대 위에 감실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감실은 신자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제대를 물리치고 성당의 중앙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감실에는 화려한 장식이 따름은 물론, 예수님이 계심을 알리기 위해 언제나 빨간 등을 켜두는 관행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성당은 하나의 건축물이긴 하지만, 그 구조나 장식은 언제나 그 시대의 신학과 신심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고딕식 건축 양식은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눈길을 돌리고 그분만을 중심으로 삼았던 중세에 꽃핀 양식입니다. 화려한 장식이 주를 이루는 로코코, 바로크 양식의 성당은, 신앙 생활이 내적으로보다는 외양적인 데로 흐른 중세 후기에 발달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당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자리를 어느 정도나마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지어진 성당은 과장된 성체신심으로 인해 감실이 성당의 주인공인 양 배치되고 장식되었으며, 대부분 제대 위나 제대 바로 뒤 성당 중앙 벽에 자리잡았습니다. 영성체하기보다는 성체공경을 더 좋아하던, 신앙 생활의 실천보다는 미사의 의무를 더 강조하던, 말씀에 따라 사는 삶보다는 정적인 성체조배를 더 강조하던 당시의 신앙인의 모습이 이렇듯 감실이 주가 되는 성당 구조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잘못된 신심을 일소하고 말씀이 주가 되는 신앙, 성찬례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 생활, 행동하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전례도 이에 맞추어 개혁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이후에 지은 소위 현대식 성당은 외양이나 내부 장식에서 변화가 있을 뿐, 여전히 감실이 주가 되는 옛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공의회 이전의 왜곡된 신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당 구조가 이러하니 신자들은 여전히 성찬례 자체보다는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를 공경하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성당 안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감실과 그 옆에 켜둔 감실등이니, 자연히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아무리 말로는 말씀이 우리의 중심이다, 성찬례가 우리 신앙의 원천이다 해보았자 정작 신자들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감실과 그 안에 모셔진 성체입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고는 하나 우리 신자들의 성서에 대한 관심은 어떠합니까?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단지 주일 의무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화려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감실에 비해 말씀이 선포되는 독서대는 사정이 어떠합니까? 감실 안에 책이나 잡동사니를 넣어둔다면 펄쩍 뛸 우리들이 독서대는 어떤 식으로 관리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제대마저도 소홀히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김인영 신부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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