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강론자료

승천 대축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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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5-10 ㅣ No.358

예수님 승천 대축일 (가해)

            사도 1,1-11      에페 1,17-23      마태 28,16-20

       2002. 5. 12.

 

주제 : 이별의 의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기간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일은 ‘만남’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만나는 일, 사랑하던 사람들이 오래 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극적인 장면들을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가끔씩 봅니다. 이 만남이 우리에게 행복을 선물로 주기도 하지만, 그 만남의 반대편에는 ‘이별’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남과 이별’, 두 가지를 묶어서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오늘 성당에 오신 여러분 가운데도 ‘만남과 이별’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날마다 생활은 ‘만남과 이별의 곡예를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이점을 구별하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만남과 이별’의 참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명을 마치고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별의 의미를 찾는 날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중의 그 누구도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이별’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는 일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3년간의 복음전파 활동, 무덤에서 머물렀던 3일의 시간, 그리고 부활하신 뒤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면서 재교육하느라 보낸 시간을 다 마치고 예수님은 하늘로 오르십니다.  지난 부활 6주간동안 평일미사를 통하여 우리는 이별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그 이별의 의미를 강조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일미사 사도행전 독서에서 그 이별이 실현되는 승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복음에서는 그 이별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듣는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별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했던 처음의 제자들은 당혹했기 때문에 그저 ‘멍청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떠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나타난 천사는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고 묻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삶에서 천사를 만날 일은 드물고 만난다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듣는 일도 어렵기는 합니다만, 직접적으로 천사의 말을 듣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압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대답’이 옳은 답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행복이 지상의 삶에서 완성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까지 연결될 것인지, 나 혼자만 즐기며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까지 연결되는 것인지 하는 것은 내 삶을 조금만 돌이켜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실로 돌아오도록 깨우침을 안겨준 천사들의 소리도 나 혼자만 만족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움직이라는 요구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올리브 산 위에 멍청하게 서서 구름을 타고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야 달라지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만 쳐다보면서 내가 할 일에서 도망치거나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다시 오실 하느님을 맞아들일 올바른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의 준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된 기쁨을 올바로 간직하고 그 기쁨을 드러내며 사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내가 가진 신앙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일입니다.  내 앞에 기쁨이 놓여있고 내가 움직임으로써 나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면 우리는 서글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만족한다면 내 삶 역시도 달라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영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 싸워야 할 순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숨어 다녔던 어떤 사람이 레지스탕스와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닥쳐온 죽음의 순간에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저 레지스탕스 무리와 똑같이 죽이려고 하느냐?”고 항의합니다.  이어서 여러 가지 설명이 따르기는 합니다만,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좋은 결과가 생기면 거기에서 뭔가 얻으려고 했다는 자세가 바로 죽을 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위협하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드러내야 할 올바른 삶의 자세를 제때에 드러내지 못했다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축복에서 스스로 멀어지는 이유라는 소리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도움 없이 하느님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성인의 말씀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드러내야 할 올바른 삶의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일, 그렇게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머물게 하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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