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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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하느님 안에서의 내적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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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10 ㅣ No.865

[레지오 영성] 하느님 안에서의 내적 자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예수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예고에 대한 성모님의 응답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신 예수님의 삶이 사랑의 결정체라면 이 사랑에 기꺼이 협력하신 성모님의 삶은 순명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물론 참된 순명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그러한 의미에서 순명과 사랑을 엄격히 구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성모님께서는 이 피앗(Fiat: 그대로 이루어지소서)의 순명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에 온전히 실현되도록 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순명입니다. 그리고 이 순명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너무나 잘 어울리고 또 참 닮았습니다. 사랑으로 조성된 한 피조물이 그 창조주를 향한 겸허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순명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로움’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겸손과 더불어 그분의 자유로움을 봅니다. 연약하고 가난한 아기로 구유에 뉘어지신 그분은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여느 사람처럼, 아니 머리 둘 곳 없는 떠돌이로 사시기조차 하셨으며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그분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으로 충만한 자유를 보여주셨고, 이 자유로움은 세상의 어떠한 힘도, 죽음의 힘조차도 누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순명, 공통점은 ‘자유로움’

 

성모님의 순명 속에서도 우리는 온전한 자유로움을 봅니다. 인간의 이해와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천사의 예고를 믿고 받아들이고 또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은 장차 천사의 예고가 이루어질 때 자신에게 닥칠 온갖 역경과 생명의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바로 그 자유로움입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임신을 두고 전전긍긍하다가 남모르게 조용히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히기도 했던 착한 요셉의 고민은 마리아의 순명에 내포된 이러한 갈등과 시련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아주 열악하여 투표권도 없었고 법정에서의 증언도 거의 효력이 없었으며, 남성과 자유롭게 대면하거나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금기시되었다고 합니다. 필경 마리아는 요셉에게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었을 터인데 (비록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겠지만) 이러한 혼인 전 임신은 죽음까지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늙은 나이에 임신한 친척 엘리사벳을 도우러 나자렛을 떠나 있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데에 좀 더 유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걸어서 사나흘은 족히 걸리는 먼 길을 떠나 엘리사벳과의 뜻깊은 만남도 이루면서 석 달가량 그녀와 함께 지내고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 1,56) 여기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순명, 이 자유로운 응답은 단순히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루고자 하는 사려 깊은 식별과 어떤 적극적인 선택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루카복음에서는 묵상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1,2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그리고 즈카르야가 요한의 출생 예고에 대하여 천사에게 한 질문(“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하여 천사에게 한 질문(“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을 이들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의 상이한 응답으로써 은밀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즈카르야는 의심의 질문을 한 반면 마리아는 계시의 신비를 믿고 이해하고자 하였고, 나아가 이 질문을 통해서 알게 된 바에 따라서 실천적인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사는 즈카르야에게는 따끔한 훈계를, 마리아에게는 상세한 설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자유롭고도 관대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분들이 누릴 수 있었던 이 자유로움을 우리는 ‘영적인 자유’ 또는 ‘내적인 자유’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삶의 자세를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제23번에서는 ‘원리와 기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하느님,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성모님께서 “주님, 나의 구원자, 전능하신 분”이라고 부르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으로 장엄하게 선포된 대로 오로지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이분을 나의 주님으로 내 삶의 한 가운데에 모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자유로움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하시며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셨고, 성모님께서도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심으로써 명실공히 주님께서 당신 삶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내 삶 한가운데로 모시는 것이 자유로움의 비결

 

영신수련 ‘원리와 기초’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관계(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와 다소 불편하더라도 없어도 괜찮은 상대적인 관계(나와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를 창조질서라는 조명하에서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상대적인 것들은 과감하게 상대화시키고, 절대적인 것, 즉 존재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꼭 붙들고 놓지 않을 때 우리 삶 속에 질서와 균형과 조화가 자리 잡게 되고,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잘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과 질병, 가난과 부, 명예와 불명예, 단명과 장수 등 모든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심을 극복하고 이들 한가운데에 설 수 있는 불편심(不偏心: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이러한 상대적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이고 수단적인 것들이며, 절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일치, 나의 구원을 위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가난이든 부든, 단명이든 장수이든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에서 그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생명이시며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뿌리이시며 내 삶의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하느님만이 내 인생의 참된 의미이며 해답이십니다. 삶도 죽음도 성공도 실패도 그분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저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서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며 또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고 그분 안에 머물고자 노력하며, 바로 그분 안에서 참된 자유, 내적인 자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 자유를 발견하고서 외쳤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 4,12)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4월호,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이주노동자 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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