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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44-46: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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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21 ㅣ No.1020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4)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상)


프랑스 고딕 성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궁전’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출처=Daisy Peel

 

 

초기 고딕 건축이 지향한 최고의 열매 맺어

 

쉬제르에 의한 생드니 성당의 재건 사업은 일드프랑스에서 재빠르게 대단한 평판을 얻었다. 그는 제단부와 서쪽 정면을 완성하고서 카롤링 왕조에 세워진 회중석 부분도 재건하고 싶어 했다. 이때 여러 이웃 도시가 앞을 다투며 생드니 성당의 구조나 예술성을 보고 배워 쉬제르보다 빨리 본격적인 대성당을 지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성당 건설은 상스(Sens)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고, 얼마 안 되어 파리, 노와용(Noyon), 상리스(Senlis), 랑(Laon)이 그 뒤를 따랐다. 이 도시는 대성당 건축에 따르는 정치적인 위신도 닮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생드니 성당의 장려한 성전 봉헌식이 있은 지 30년 후인 1174년, 상스 출신 건축가 기욤(Guillaume)이 영국에 초청되어 대화재를 입은 캔터베리 대성당의 제단 건설공사를 감독했다. 고딕 양식이 서서히 국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80㎞ 정도에 떨어진 프랑스의 곡창지대 보스(Beauce) 평야의 파도 치는 밀밭 저쪽에 100m가 넘는 아름다운 두 개의 첨탑이 떠오른다. 600년이나 넘게 약탈, 전란의 격동을 견뎌온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Cathdrale Notre-Dame de Chartres)이다. 몇 번의 화재를 견디며 기적과도 같이 서 있는 성당, 프랑스 고딕 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 건축공사는 1130년부터 13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끊어졌다 이어지며, 최종적으로는 최고 기술로 초기 고딕 건축이 지향한 최고의 열매를 이 대성당에서 맺었다.

 

적어도 이 성당이 서 있는 자리에는 모두 전쟁이나 화재로 손상된 건물을 대체하느라 다시 세워진 5개의 대성당이 있었다. 최초의 성당은 늦어도 340년 경이었을 것이다. 6세기에 새 성당이 건설되었다가 743년에 불탔고, 이 성당도 858년의 화재로 손상되었다. 이것을 확장하여 재건축했는데 카롤링 시대의 성당도 102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시 22년에 걸쳐 새 성당을 짓고 1024년 헌당했다. 또다시 1134년 이 마을에 일어난 대화재로 서쪽 끝 부분이 불탔으나 곧바로 재건에 착수했다. 그런데 1194년에 큰 화재가 다시 일어나 이 마을의 절반을 태웠고 대성당도 소실되었다. 이에 재건에 착수하여 1150년에 공사를 마쳤다.

 

고딕 대성당이 유럽에 건설되기 시작한 12세기 후반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어져 갔다. 성모 공경은 12세기 초부터 노르망디나 브르타뉴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아일랜드계 신앙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온 유럽에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 공경과 함께 많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대부분 ‘노트르담(Notre-Dame)’이신 성모께 바쳐졌다. 이런 때 프랑스의 성모 공경의 중심이 바로 샤르트르 대성당이었다.

 

‘성모의 베일’,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Leon Reed

 

 

‘성모의 베일’ 가진 성모 공경의 중심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 샤르트르 지방은 기원전부터 켈트의 한 분파인 카르누테스(Carnutes)의 거주지였고, 로마령 갈리아 시대에는 켈트 사제 계급인 드루이드가 신성한 샘과 동굴을 중심으로 신성한 의식을 거행했던 드루이드교(Druidism) 예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복음을 받은 켈트인은 그것을 예수 탄생의 전조로 해석하고, 드루이드교의 처녀 신앙의 동굴을 성모 마리아(노트르담) 신앙의 장소로 바꾸었다. 그래서 중세까지 지하 경당에서 ‘검은 성모자’ 상을 공경해 왔다. 현재 샤르트르 성당 지하 경당의 북쪽에 안치된 검은 성모는 프랑스 혁명 때 타버린 상을 1857년에 복원한 것이다.

 

12세기에는 유해 공경이 한창이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유해가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유해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으므로 유해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당신이 매달리셨던 그 십자가와 가시관, 토리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다. 성모 마리아의 몸은 죽은 후 천사들에 의해 하늘나라로 올라갔으므로 유해가 없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가 생전에 입었던 옷이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귀중한 유해가 된다.

 

이런 곳에 세워진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성모 마리아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가지고 있었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모의 베일’ 곧 ‘상타 카미사’(Sancta Camisa)는 비잔티움의 이레네 황후에게 샤를마뉴(Charlemagne)가 선물로 받은 후, 876년 그의 손자 대머리 왕 샤를 2세가 이 공경받는 유해를 샤르트르 대성당에 기증했다. 이 옷은 천사 가브리엘이 수태고지 할 때 입었고, 그리스도를 낳을 때 성모 마리아가 입었다는 옷 조각, 성모가 일할 때 입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직사각형의 비단 조각이다. 20세기에 조사했을 때 천에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꽃가루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고, 현재의 과학적 판정에 의하면 이 옷감은 사산조 페르시아(3~7세기) 산이라고도 한다. 그 이후 ‘성모의 베일’을 가진 대성당을 찾는 순례 행렬은 8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아름다운 유리창의 성모',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pilgrimtothepast.com

 

 

화재로 1220년 ‘고전 고딕 대성당’ 재건축

 

그런 샤르트르 마을에 1194년 6월 10일 밤부터 11일 아침까지 화마가 다시 덮쳤다. 이 화재로 서쪽 정면의 ‘왕의 문’, 그것에 새겨진 조각과 12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초기 고딕의 남쪽 탑 기단부 등이 거의 다 타 버렸다. 단지 화마를 피한 것은 12세기에 건조된 서쪽 정면부와 지하 경당뿐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성모의 베일’을 잃었다고, 그래서 성모께서 샤르트르 마을을 버리셨다고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지하 경당에서 무사히 화마를 피했던 ‘성모의 베일’이 운반됐다. 그러자 비탄은 순식간에 환희로 바뀌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성모가 옛 성당을 부수기를 허락하셨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새롭고 더욱 아름다운 성당을 원하고 계신다고 성모의 집에 맞게 다시 지을 것을 청하셨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각지에서는 기부금이 답지했다. 불과 26년 후인 1220년에 다섯 번째 성당이 대체로 완성되었고, 본래는 서쪽 정면까지도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세울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전체 길이 130.2m, 회중석 너비 16.4m, 천장 높이 36.55m인 당시로써도 가장 컸고 지금도 프랑스에서 제일의 큰 대성당이, 그 후 이 건물을 본받아 지어진 랭스(Reims)와 아미앵(Amiens) 대성당과 함께 ‘고전 고딕 대성당’이라 불리는 성숙한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이윽고 1260년 10월 24일 성왕 루이 9세가 임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거행했다.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답게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정말 많은 성모상이 있다. 지하 경당의 ‘지하의 성모(검은 성모)’, 주보랑 남쪽에는 12세기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아름다운 유리창의 성모’, 주보랑 북쪽에 선 ‘기둥의 성모’(1510년 제작), 샤르트르 대성당의 가장 유명한 제단부 고창 중앙에서 하늘의 여왕으로 푸른 옷을 두르신 ‘성모자상’ 등. 하나의 성당에 이 정도의 성모 마리아상을 가진 대성당은 없다. 그래서 샤르트르 대성당을 두고 ‘성모 마리아의 궁전’에 가장 어울리는 성당이라 말하는 것이다.

 

 

'기둥의 성모', 복원 전,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Walwyn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9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5)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중)


문설주 인물 조각, 그리스도 자신이신 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제단부. 출처=photographfrance.com

 

 

회중석 기초는 대부분 로마네스크 양식

 

8세기 주교 성 풀베르투스(St. Fulbert, 960 ~1028)가 건립한 샤르트르 대성당은 목조 지붕을 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이 대성당은 1100년 무렵에도 있었다. 지금의 대성당은 1194년에서 12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회중석 기초는 대부분 로마네스크 성당의 것이다. 제단부에 있는 세 개의 방사형 경당도 옛 로마네스크 성당을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그 옛 성당이 지금 성당의 평면, 특히 양 측랑과 중랑의 베이를 규정하고 있다. 1130년대에 확장되었을 때, 두 개의 탑을 가진 새로운 정면은 옛 성당의 서쪽 끝에서 거리를 띄우고 착공되었다. 이때 정면의 조각은 이곳에서 90㎞ 떨어진 생드니에서 쉬제르가 재건 사업에 열중했던 1140년 무렵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쪽 정면의 쌍탑은 12세기에 만들어진 기부(基部) 위에 올린 것이다. 높이 115m인 북쪽 탑은 1150년에 완성되었고, 이어서 높이 106m인 남쪽 탑(‘옛 탑’)은 1160년에 세워졌다. 남쪽 탑의 8각 대첨탑은 높이 40m에 이르는 초기 고딕 양식이다. 그런데 섬세한 플랑부아양 식(Flamboyant style, 불꽃 식)으로 지어졌던 북쪽 탑의 목조 첨탑부가 낙뢰로 소실되고 말아 1513년 후기 고딕 양식에 재건되었다. 그래서 이 탑을 ‘새 탑’이라 부른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고전 고딕의 기본 형식이다. 회중석이 3랑이고 제단부는 5랑이며, 주보랑에는 방사형 경당이 5개가 있다. 수랑에는 평행 경당이 없으며, 중랑 벽면은 3층 구성이고 천장은 4분 볼트로 되어 있다. 보통 회중석이 3랑이면 세 개의 문은 각각의 ‘랑(廊)’과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3개의 문이 중랑으로만 열려 있다.

 

중세 성당의 정면은 이념적인 의미일 뿐 정서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샤르트르 대성당의 정면은 남서향이다. ‘왕의 문’을 지나면, 높이가 37m나 되는 어둑한 공간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춰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채색의 빛의 진동이 전해져 온다. 질과 양에서 모두 최고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해와 구름의 움직임과 함께 미묘하게 변화하며 빛나는 공간이 이 성당 안에 나타나 있다. 이때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내부에 울려 퍼지면 그 다채색의 빛도 함께 진동한다.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서쪽 포탈 '왕의 문'. 출처=lonelyplanet.com

 

 

찬연히 빛나는 남북의 중후한 장미창

 

이러한 공간에서 제단의 깊은 곳에 13세기 스테인드글라스의 고창이 빛나고 있다. 그 중앙에는 성모자상이 서 있는데, 이를 향해 똑바로 걷는 중랑의 장축은 곧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나타내고 있다. 제단은 7변형의 부채꼴을 이루며, 그 위로 교차 리브가 만나는 보스(boss) 아래에 성모의 주제단이 놓여 있다. 폭은 16.5m인데 중랑의 길이가 110m로 비교적 짧은 것은 동쪽 끝에 지형상 단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사상 경당의 돌출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회중석과 수랑은 중랑에 좌우 측랑을 하나씩 더한 3랑식이지만, 제단부는 5랑식이다. 바깥의 주보랑에는 깊이가 깊은 세 경당과 깊이가 얕은 네 개의 돌출부가 있다. 돌출부 중 하나는 14세기의 고딕 레요낭(rayonnant) 식의 생피아 경당(St. Piat chapel)에 이르는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발달한 제단부는 동쪽을 향한 축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동쪽 주보랑에서는 제단을 클로튀르(clture) 곧 스크린(1715년)으로 막아 축선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랑을 따라 걷던 움직임은 길이 60m가 넘는 강력한 횡랑과 만나는 교차부에서 멈추고 만다. 찬연하게 빛나는 남북의 중후한 장미창 때문이다.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북쪽 포탈. 출처=Steven Zucker

 

 

제단부에 이르는 직사각형의 중랑 베이와 측랑 베이가 1대1로 대응하고 있다. 이른바 단식(單式) 베이 시스템이다. 중랑 벽에는 커다란 원기둥에 4개의 작은 8각 기둥을 덧붙인 복합기둥과, 8각 기둥에 4개의 작은 원기둥을 붙인 복합기둥이 번갈아 나타난다. 로마네스크의 복식(複式) 베이 시스템의 자취다. 그 위를 4분 볼트가 균질하게 덮여 거대한 장당(長堂) 공간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8세기에 대리석이나 회반죽으로 장식되어 제단의 기둥은 회중석의 리듬은 잃고 말았다.

 

중랑 벽은 트리뷴이 없이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비로운 빛이 들어오는 고창층도 높이 12m나 되는데 대(大) 아케이드 높이와 대략 비슷하다. 이 두 요소는 4련(連) 아케이드의 트리포리움 띠가 어두운 수평층을 이룬다. 이것은 어두운 것은 트리포리움 바로 뒤에 측랑 지붕 밑을 가로막는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평 띠는 동시에 수직성도 강조하고 있다.

 

샤르트르 성당도 다른 대성당처럼 서쪽 정면, 남쪽 수랑, 북쪽 수랑 등 세 방향에 포탈을 두었다. 1194년에 건조된 북쪽 포탈은 ‘노트르담’ 성당의 이름처럼 ‘성모의 대관(戴冠)’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남쪽의 포탈은 심판자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남쪽 포탈. 출처=Steven Zucker

 

 

문설주상의 출현으로 고딕의 조각 탄생

 

이렇듯 세 포탈에는 조각가들에 의해 거룩한 세계가 돌로 장대하게 번역되어 있다. 정면의 ‘왕의 문’에는 하층부가 1155년경에는 대략 완성했다. 세 개의 문마다 반원의 팀파눔과 그 밑의 수평 부재인 상인방에는 절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군림하고 계신다. 중앙에는 요한 묵시록의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오른쪽에는 ‘탄생과 유년의 그리스도’, 왼쪽에는 ‘승천하시는 그리스도’가 새겨져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포탈은 로마네스크 시대에 등장한 성당 포탈 조각의 정점을 보여 준 것이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지방마다 달리 팀파눔만 강조하거나 그것을 둘러싼 테두리만을 강조했으며, 조각도 여러 곳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포탈에서는 조각이 전체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남쪽 ‘최후의 심판’ 포털에서 볼 때 다양한 요소가 이어지는 문설주와 아치볼트가 대각선으로 벌어지면서 조각이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건축과 일체를 이루었고 원기둥의 틀을 따랐다. 그러나 샤르트르 대성당 포탈 ‘왕의 문’ 주위에는 1150년경에 완성된 정교한 인물 조각인 문설주상(jamb figures)이 원기둥에 붙어있는데, 바로 이 문설주상의 출현으로 고딕의 조각은 탄생했다. 문설주상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려는 듯이 똑바로 서 있고, 옷의 주름도 수직선을 따르고 있다. 로마네스크와는 달리 머리 등이 완전히 원기둥에서 돌출해 있어, 원기둥에 종속되면서도 독립하고자 했다. 이렇듯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각은 로마네스크 조각을 집대성하면서도 초기 고딕 조각을 대표하고 있다.

 

문설주상 원기둥의 주두(柱頭)도 주목해야 한다. 왼쪽 문 좌우와 중앙의 왼쪽 원기둥의 주두는 성모님의 생애를, 중앙의 오른쪽과 오른쪽 문 좌우의 원기둥의 주두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이 새겨졌다. 그 사이에 세 문의 문설주 6곳과 정면을 향한 두 벽기둥에는 천사와 구약의 인물이 배열되어 있다. 원기둥의 주두를 딛고 있는 문설주상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조상인 유다의 임금들이다. 우리는 구세주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까지 몇백 년을 기다린 구약의 그들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이신 문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26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46)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하)


세 개의 장미창, 영원한 진리이자 빛의 근원인 그리스도 표현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배치도. 출처=Wikimedia Commons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나온 신비한 빛이 성당을 가득 채웠을 때 사람들은 눈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늘나라를 상상할 수 있었다. 성당 안을 가득 채운 신비로운 빛으로 빛의 근원,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1요한 1,5)는 성경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하느님의 신비함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표현 수단이었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중랑 바닥에는 지름 12m인 동심원이 있다. ‘미로’라고 불리는 통로다. 성지 예루살렘 또는 골고타 언덕에 이르는 순례의 길을 걷거나 무릎걸음을 하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추체험(追體驗)하는 통로다. 지금은 없어진 꽃장식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다 걸으면 그 길이는 294m나 된다. 밝은 밖에서 성당에 들어와 포탈의 문이 닫히면 이 ‘미로’를 앞에 두고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롭고 선명한 빛에 둘러싸인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은 12~13세기 후반의 걸작인 스테인드글라스를 거의 잃지 않은 유일한 대성당이다. 건축 기술의 진보, 특히 성당 밖에 마련된 강력한 버팀벽과 플라잉 버트리스는 거대한 창문을 만들 수 있게 하여 내부 공간의 비물질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해줬다. 그런데 플라잉 버트리스를 건물 전체에 처음 본격적으로 도입한 고딕 성당은 샤르트르 대성당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플라잉 버트리스에는 두 단이 작은 원기둥으로 엮여 있다.

 

성당에는 모두 176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모두 합치면 그 면적은 2000㎡가 넘으며 그려진 인물도 4000명에 가깝다. 샤르트르 대성당과 같은 13세기 중기의 고전 고딕 건축으로 명석한 건축 구성에 긴장감이 감돌지만, 본래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대부분 잃어버린 랑스나 아미앵 대성당에서는 샤르트르 대성당과 같은 빛의 신비로움을 감동적으로 체험하기 어렵다.

 

대성당의 ‘빛’을 말할 때 “성당이 빛으로 채워지고 있다”, “공간을 둘러싸는 벽 자신이 발광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색유리라는 투광 재료로 만든 벽, 곧 ‘은은히 투과하는’ 빛의 벽이다. 물리적으로는 빛이 지나는 벽이지만 시각적으로나 상징적으로는 스스로 빛나는 벽이다. 돌의 벽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실체적인 벽이다. 따라서 스테인드글라스는 결코 창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빛은 눈부시게 빛나는 빛이 아니다. 짙은 빨간색, 짙은 파란색을 기조로 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풍부한 빛을 통과시키는 유리가 아니다. 그것은 어스레한 어둠 속에서 색채가 풍부한 빛을 공간에 떨어뜨린다. 로마네스크에 비해 고딕 성당의 창이 점점 커진 것은 내부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내부를 신비한 색채의 빛으로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세 사람들은 빛나는 하느님의 손안에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고딕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이 주는 본질이 이것에 있다.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북쪽 수랑 장미창. 출처=Wikimedia Commons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남쪽 수랑 장미창. 출처=Wikimedia Commons

 

 

하느님의 말씀 형상화한 세 개의 장미창

 

고딕 대성당에는 수직을 향하는 방향성과는 상반되게 자기 완결적인 원의 형태를 한 장미창(rose window)이 있다. 장미창은 고딕 대성당의 정면인 서쪽, 횡랑의 남쪽과 북쪽 등 세 개의 포털을 통괄하듯이 그 위에 크게 뚫려 있다. 신비한 장미창의 빛은 약간 어두운 성당 안에 들어서야 비로소 강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일 드 프랑스 지방에 있는 고딕 대성당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장미창은 ‘태양창’ 또는 ‘차륜창(車輪窓, wheel window)’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그리스도를 빛의 아들이시며, 중앙에 군림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열두 개의 바큇살로 방사하는 열두 사도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창을 ‘장미창’이라 부르는 까닭에 장미라는 말에 성모를 연상하여, 이 창이 성모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나 장미창은 성모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생드니에 처음으로 나타난 장미창은 구약 성경의 예언자 에제키엘이 본 구세주의 비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니, 생물들 옆 땅바닥에는 네 얼굴에 따라 바퀴가 하나씩 있었다. 그 바퀴들의 모습과 생김새는 빛나는 녹주석 같은데, 넷의 형상이 모두 같았으며, 그 모습과 생김새는 바퀴 안에 또 바퀴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에제 1,15-16)는 말씀을 형상화한 것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세 장미창은 남쪽, 북쪽, 서쪽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북쪽 장미창은 강생하신 그리스도를, 남쪽 장미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서쪽 장미창은 심판자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북쪽 수랑의 장미창(1235년)은 구약을 형상화했고, 남쪽 수랑의 장미창(1225~1230년)은 신약을 형상화했으며, 서쪽 정면의 장미창(1215년)은 요한 묵시록을 따르고 있다.

 

빛나는 장미창은 극도로 중심적이며 모든 빛의 근원을 뜻한다. 세 개의 장미창은 영원하신 진리이자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영광송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처럼, 과거(“처음과 같이”, 구약)와 현재(“이제와”, 신약)와 미래(“항상 영원히”, 장차 오실 심판)라는 세 개의 시간을 나타낸다. 이렇게 성당은 세 개의 시간이 합쳐진 영원한 현재를 재현하고 있었다.

 

 

-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 서쪽 정면 장미창. 출처=Wikimedia Commons

 

 

중세 사람 눈으로 스테인드글라스 보아야

 

그런데 흔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중세 사람들을 위해 성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렸다는 말을 많이 한다. 현대와는 달리 성직자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중세에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은 강론을 들은 다음, 성당을 장식한 그림과 조각 등으로 강론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은 그것에 그려진 도상(圖像)을 어디까지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었을까?

 

폭이 좁고 높이가 낮은 작은 성당이라면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을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르트르 대성당과 같이 거대한 성당에서 많은 곳에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림 대부분은 이미 성경의 내용을 잘 아는 이도 인식하기 어렵다. 저 높은 데 있는 그림은 더욱 그렇다. 중세 사람들의 시력이 우리보다 좋았다고 말한들 그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성당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 한 장 보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도 많이 든다. 그러니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시각적 성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늘의 내 눈이 아닌, 그것을 만든 중세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먼저 800년 전에 그들은 성당 바닥에 서거나 앉아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닿는 빛을 받았고, 이에 감탄하여 그것에 그려진 이미지를 읽고 있었다. 그다음 하나의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서서 그것을 구성하는 복잡한 틀과 다양한 도형을 일일이 음미하며 서로 관련을 맺었을 것이다. 이어서 회중석 측랑이나 주보랑을 걸어가면서 이어지는 창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교차부에 서서 몸의 방향을 바꾸어 내부 공간 전체를 바라보면서 보이는 모든 창을 서로 연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거룩한 도상을 통해 안쪽에서 쏟아지는 빛과 방대한 도상에 그저 압도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성당을 이렇게 읽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2월 3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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