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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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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성의, 예수 수난과 부활의 증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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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171

토리노의 성의, 예수 수난과 부활의 증거인가?


가혹한 고문을 당한 흔적과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도 뚜렷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지난해 5월 2일 토리노 성요한주교좌성당을 방문해 예수의 시신을 감싼 천이라고 전해지는 성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그들(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그 여자(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19,40; 20,2-7).

 

2010년 4월,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토리노대교구 성요한주교좌본당이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라고 전해지는 성의(聖衣, 길이 436㎝, 폭 109㎝)를 10년 만에 공개하자 이를 보려고 몰려든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 성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토리노 성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는 최고 아이콘"이라고 말했다. 물론 성의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의 이콘과 흔적 가운데 토리노의 성의만큼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운 것도 없다. 14세기 역사기록에도 나타나는 이 성의를 1898년 이탈리아 고고학자이자 사진가인 세콘도 피아가 촬영해 필름을 공개하자 유럽 대륙이 발칵 뒤집혔다. 네거티브 필름에 옷이 벗겨진 한 남자의 시신 윤곽이 뚜렷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육안으로는 흐릿해서 형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분석 결과 이 남자는 신장 175㎝의 30~40대였다. 가혹한 고문을 당한 흔적과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도 뚜렷하다. 필름에는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못이 박힌 것으로 나타났다. 손가락이 4개만 찍혀 있는 이유는 손목에 못이 박힐 때 신경과 근육이 당겨져 엄지손가락이 손바닥 쪽으로 접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양쪽 발과 옆구리에는 혈흔이, 온몸에는 찰과상과 타박상이 남아 있었다. 찰과상 흔적은 로마제국 당시 로마 병사들이 사용한 납구슬 달린 채찍(플라그룸)과 그 모양이 일치했다. 얼굴도 심하게 구타를 당해 양쪽 볼과 오른쪽 눈꺼풀은 부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남자의 오른쪽 갈비뼈 부근에 큰 상처자국이 있고, 거기서 피가 많이 흐른 흔적이다. 또 이마와 뒤통수에 생긴 상처로 미뤄 머리에 가시관을 썼을 것으로 추측됐다.

 

 

1357년 성의 공개전시 기록 있어

 

학자들은 이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실제로 감쌌던 수의이거나 아니면 후대에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모사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회는 학자들의 견해에 흥분했다. 예수 수난과 부활 사건을 입증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명백한 물증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성의에는 여러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십자군 전쟁 때 성전기사단이 터키에서 발견해 프랑스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프랑스 브장송성당, 성전기사단의 후손 제프리 드 샤르니, 사보이 왕가 등을 거쳐 1578년 토리노로 옮겨졌다. 사보이 왕가 수중에 있을 때는 화재로 인해 성의 일부가 불에 타기도 했다.

 

현재 확인된 확실한 자료는 1357년경 샤르니 가문이 프랑스 북동부 리레(Lirey)에서 이 성의를 전시했다는 것이다. 이때 성의를 보기 위해 몰려온 순례자들을 새겨 넣은 큰 메달이 파리 클뤼니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성의 공개 당시 그 지역 교구장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전시를 강력히 반대했다.

 

성의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이뤄진 것은 1988년이다. 토리노대교구장 안토니오 발레스테르 추기경은 진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공신력 있는 3개 독립연구소의 방사성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을 허락했다. 측정 결과 그때까지 밝혀진 사실과 대부분 일치했다. 하지만 한가지 결정적 차이가 드러났다. 제작 시기가 1260~1390년 사이, 즉 중세시대라는 것이다.

 

그러자 성의가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의가 1532년에 화재를 당하는 바람에 탄소동위원소가 정상적인 것에 비해 많아졌다"며 반박했다. 또 화재로 손상된 부분을 수선한 천에서 떼어 측정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샘플 채취와 분석실험 방법에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했다.

 

 

과학기술로도 밝혀내지 못하는 비밀

 

진위 논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천에 투영된 형상(시신 윤곽)과 혈흔이다. 과학자들은 성의 형상에서 붓을 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누군가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의 전문가들은 형상이 사진기 원리처럼 천에 투영돼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게 토마스 웨지우드(1771~1805)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웨지우드는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 방의 지붕이나 벽에 작은 구멍을 내서 외부 풍경을 투사시키는 것)를 사용해 화상(畵像) 착상을 고안했으나, 1802년까지 실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토리노 성의를 촬영한 필름을 전환시켰더니 육안으로는 희미하게 보이는 시신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 성의가 진짜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천이라면 성경 다음가는 예수 부활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럼 사진기가 발명되기 훨씬 전인 1300년대 전후에 누가 어떤 기술로 남자의 시신 윤곽을 천에 투영시킬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일부에서 사진기 원리를 고안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지목하기도 하나 그는 1452년에 태어났다.

 

과학자들은 1978년 조사 결과 성의의 혈흔은 알부민과 철 성분이 있는 진짜 사람의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하지만 혈흔이 피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려 있을 때 흘린 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성의가 십자가에서 모셔온 시신을 닦고 감싼 천이라는 것이다.

 

성의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시신 윤곽은 '예수에게서 나간 힘'(루카 8,46)이라는 설도 있고, 십자가 고통과 사후열(死後熱)에 의한 화학작용 결과라는 설도 있다.

 

이런 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토리노 성의를 진품이라고 믿고, 이를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키워가고 있다. 성의는 신앙의 신비 영역에 속한다 하더라도 최종적 판단은 어차피 과학기술이 내려야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도 진위 논란을 잠재울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1988년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을 의뢰한 토리노대교구장 안토니오 발레스테르 추기경은 공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결론에 대한 평가는 과학에 맡겨 두면서, 교회는 신자들의 신심 대상으로 남아 있는 이 성상에 대한 존중과 경의를 확인한다. 그 형상의 기원과 보존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대부분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기에 계속적 조사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

 

[평화신문, 2011년 4월 24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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