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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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평신도의 영성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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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36

평신도의 영성 생활

 

 

1. 영성

 

광범위한 의미에서 '영성'(spirituality)은 사람의 생활, 사고, 행동을 유발하는 어떤 근본 자세, 내면 원리, 정신으로서, 어떤 구체화된 윤리적, 정신적, 종교적 가치를 총칭한다. 그것은 사람의 윤리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어떤 초월적 존재와의 내면적 관계 또는 윤리·도덕적 원리를 가리킨다. '영성'은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윤리적, 정신적, 종교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각자의 윤리적, 정신적, 종교적 확신에 따른 어떤 사고 방식과 행동 및 생활 양식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은 그리스도인 생활을 이끄는 초자연적 내면성 또는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을 내부에서 활성화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영성의 목적인 하느님과의 일치 곧 성화와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여건들, 은총, 성화, 기도, 성덕, 선행, 정화, 시련, 영적 지도, 영적 독서 등과 그에 방해가 되는 모든 여건들, 죄, 유혹, 육, 벌 등과 영적 체험 및 영적 현상을 포함한다.

 

성령은 영성 자체이시며 영성의 원천이시고, 영성 생활의 원동력, 스승, 인도자이시다.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영성', '영적'의 '영'은 직접 성령을 가리키며, '영성'은 '성령성'을, '영적'은 '성령적'을 의미한다. 신앙 생활과 영성 생활은 신앙과 영성의 대상(하느님, 하느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죄, 복음 등)을 성령 안에, 성령으로 인하여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활은 본질적으로 영적 대상 곧 성령적 대상을 영적으로 곧 성령적으로 체험하는 영적 체험 곧 성령적 체험, 영적 생활 곧 성령적 생활이다. 모든 것은 성령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성령으로 인하여 가능해진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혼이신 성령으로 인하여 가르치고 활동하고 기적을 행하셨고, 제자들은 역시 자기들의 혼이 되신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신앙과 영성을 살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도 역시 자기의 혼이 되신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신앙과 영성을 산다.

 

'신앙'과 '영성'을 비교하면, '영성'은 '신앙'의 좀더 내면적 측면 또는 하느님과의 좀더 직접적인 관계를 따르는 측면을 가리킨다. '신앙'은 하느님, 그리스도, 성령, 마리아와 성인 성녀, 천사, 복음, 교회, 칠성사, 선행, 덕, 죄, 벌, 구원 등을 외적-내적, 형식적-정신적, 조직적-카리스마적, 가시적-불가시적, 법적-영성적 면에서 포괄적으로 따르지만, '영성'은 위의 대목들의 내적, 정신적, 카리스마적, 불가시적, 영성적 면을 좀더 심오하고 전 인격적 차원에서 따르고 하느님과 좀더 직결된 면을 취급한다.

 

 

2. 평신도의 영성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보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세상과 함께 하느님께 일치하고 그분께 도달하려는 면이 강하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하느님의 일(성직, 수도 생활, 기도, 선교, 봉사 등)에 전적으로 종사하고, 하느님과 '갈라지지 않는 마음'(1고린 7,32-35 참조)으로 일치하고 그분께 좀더 전면적, 직접적, 직선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면이 강한 한편, 평신도는 세상의 일(가정, 직업, 사회 생활, 경제, 문화, 문명, 정치, 교육, 과학, 교양, 오락, 환경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께 일치하고 그분께 도달하려는 면이 강하다. 따라서 '갈라진 마음'으로 하느님께 일치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성직자, 수도자가 하느님의 일에 종사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세상 일에 휘말리면 그 마음이 '갈라져' 하느님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못하고 하느님께 직접적, 직선적으로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평신도가 세상의 일에 종사하면서도 세상 일 안에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다면, 바로 거기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일치하고 그분께 온전하게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성직자, 수도자가 하느님의 일에 전적으로, 직접적, 직선적으로 종사한다고 하는 것도, 평신도가 하느님의 일에 간접적으로 종사한다고 하는 것도 서로 비교해서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원칙론적으로만 말할 뿐이지, 실제로는 개개인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긴다. 성직자, 수도자도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한, 하느님을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직접적 직선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드시 어떤 세상 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체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세상과 함께 하느님을 체험하기 때문에 그 영성 생활은 성직자, 수도자만큼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으며, 비교적 복잡하고 어렵다. 평신도 영성 생활의 복잡성과 어려움의 근본적 이유는 바로 평신도 영성 생활의 본질 곧 세상 체험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점에 있다.

 

세상은 원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하고,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존재 일부분을 이어받아 존재하기 때문에 '좋은 것'(창세 1,12.21.25.31)이고, 생명체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의 생명의 어떤 부분을 이어받아 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며, 사람은 하느님의 의지와 지성에 참여하고 그분의 의지와 지성의 일부분을 이어받아 사랑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느님다운' 은혜로운 존재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한 후부터 세상의 피조물과 생명체와 사람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거역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것은 피조물과 생명체와 사람을 자신의 부당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악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일어나며, 이렇게 해서 사람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이 유혹을 극복하고 물리쳐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세상의 피조물과 생명체와 사람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선용하고 섬기는 것이 선행, 덕행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세상 체험 안에 하느님을 체험하는 평신도의 영성이다.

 

세상의 만물만사 안에 어떻게 하느님을 보고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을까? 만물만사를 통해서 어떻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을까? 만물만사와 함께 어떻게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만물만사를 어떻게 활용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만물만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대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평신도의 영성 생활에서 풀어야 할 과제다.

 


3. 평신도의 영성 생활

 

평신도의 영성 생활은 자기 인격과 생활 안에 (1)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여 상호 간의 화해를 이루고, (2) 그 두 가지 체험을 통합, 일치시켜 마침내 단 하나의 체험으로 하는 데에 있다.


1)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 간의 화해

 

세상 체험(가정, 직업, 사회 생활, 경제, 문화, 문명, 정치, 교육, 과학, 교양, 오락, 환경 등)을 옳고 적절하게 하지 못할 경우, 이것은 하느님 체험과 대립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세상 체험을 옳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 체험을 윤리 도덕과 복음 정신에 거슬러 할 경우이며, 세상 체험을 적절치 않게 한다는 것은 그 체험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하지 않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하고, 그 시대와 장소의 요구와 그 현실과 상황의 필요성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경우이며, 이 모든 것은 다 옳고 적절한 하느님 체험과 대립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서, 부부 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부부로서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저지르거나 사회인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안정, 갈등 등을 일으켜 하느님 체험을 옳고 적절하게 하는 데에 방해와 장해가 된다.

 

한편 하느님 체험(신앙, 기도, 복음과 성덕의 실천, 죄의 극복, 봉사 등)을 옳고 적절하게 하지 못할 경우, 이것은 세상 체험과 대립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하느님 체험을 옳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 체험을 정당한 신학, 교리,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신학, 교리, 가르침에 따라 할 경우이며, 하느님 체험을 적절하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 체험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하지 않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하고, 그 시대와 장소의 요구와 그 현실과 상황의 필요성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경우이며, 이 모든 것은 다 옳고 적절한 세상 체험과 대립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서, 기도와 미사를 거르거나 묵상을 옳지 않고 적절치 않은 방법으로 하는 것은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안정, 이변 등을 일으켜 옳고 적절한 가정, 직장, 사회 생활과 인간 관계에 방해와 장애가 된다.

 

결국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옳고 적절하게 함으로써 이 두 가지 체험이 대립하지 않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화해하게 되며, 사람의 인격과 생활에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2)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 간의 통합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 간의 화해만으로는 영성 생활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 체험(가정, 직업, 사회 생활, 경제 등)의 지켜야 할 최저선을 지키고, 하느님 체험(신앙, 기도, 죄를 피하고 덕을 실천함, 봉사 등)의 해야 할 최저선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화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성의 목적인 성화, 완덕,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최저선을 지키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 체험과 세상 체험을 하나의 체험으로 통합시켜야 한다.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유리시키고 이 두 가지 체험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따로 가지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체험을 화해시켰으나 통합시키지 못했던 것을 말하며,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고, 비그리스도인 또는 무신론자, 물질주의자, 과학 만능주의자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은 사람이 이중적 인격을 가지고 위선적 생활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할 때도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의 체험으로 통합시키고, 세상 체험 안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체험 안에 세상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의 영성, 특히 현대 평신도의 영성은 바로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통합하는 데에 있다. 현대 교회가 바라는 성화, 완덕은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자기 인격과 생활 안에 통합하는 것이다. 현대의 이상적 그리스도인상, 곧 성인(聖人)상은 신앙과 기도로써 하느님 체험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체험만 잘하는 것도 아니며, 이 두 가지 체험을 자기 인격과 생활 안에 하나의 체험으로 조화 있게 통합시킨 사람이다.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통합시키는 방법은 세상 체험을 하는 가운데 수시로, 자주, 끊임없이 하느님을 의식하고 사랑하고 그분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활하는 가운데 수시로, 자주, 끊임없이 모든 인간적인 일을 하느님과 연결시켜 그분의 섭리와 사랑 안에 보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며, 자기가 하는 일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그분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모든 인간적인 일 안에 하느님을 보고 느끼는 '영적 감각', '영적 시각', '영적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령이 그 '영적 감각', '영적 시각', '영적 마음'이 되어 주신다. 그래서 성령 안에, 성령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적인 일 안에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을 ① 자기 자신 안에, ② 타인 안에, ③ 사물 안에서, ④ 사건 안에서, ⑤ 자기 행위 안에서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1) 하느님을 자기 자신 안에서 보고 의식하고 체험한다.

 

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창세 1,26) 피조물, 그분의 총애를 받은 자녀, 예수님의 형제와 지체, 성령이 거주하시는 성전이며, 내 안에 항상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 나의 모습은 하느님의 모습,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 성령의 감실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의식할 때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나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하느님 안에 생각하고, 내 안에 하느님을 생각한다. 여러 행동을 하면서도 수시로, 자주, 끊임없이 내 안의 감실에 순간 머물러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 뵙고 그분과 대화하고 친교를 나눈다.

 

그렇게 할수록 내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것과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 하나가 되고, 자기 체험과 하느님 체험이 통합된다. 나는 더욱 하느님의 모습이 되고 예수님의 형제와 지체가 되고 성령의 성전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원천과 목적이시다. 나의 존재와 생명과 지혜와 사랑은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과 지혜와 사랑의 어떤 부분을 이어받아 그에 참여하는 덕분에 있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으로 인하여, 하느님 덕분에, 하느님을 향해서 매순간 존재하고 살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 이렇게 하느님을 나의 존재와 생명과 지혜와 사랑의 원천과 목적으로 의식하며 사는 것이 자기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2) 하느님을 타인 안에서 보고 의식하고 체험한다.

 

다른 모든 사람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 그분의 총애를 받은 자녀, 예수님의 형제와 지체, 성령이 거주하시는 성전이며, 그들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도록 하고, 사람과 대화하고 친교를 나눌 때마다 그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대화하고 친교를 나누도록 한다. 그 사람을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모신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그와 대화할 때마다 사람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동시에 하고 이 두 가지 체험을 하나로 한다.

 

내가 대하는 사람 하나하나도 하느님을 원천과 목적으로 하여 존재하고 산다. 그는 매순간 하느님께서 지탱하시는 덕분에 존재하고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을 최종 목적으로 하여 산다. 사람을 이와 같이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사람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기 위해 영적 시각과 영적 감각, 영적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을 감각적, 현세적, 정신적으로만 보지 않고 신앙적, 영성적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의 참 모습, 참 현실은 감각으로 보이거나 정신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의 피조물, 자녀, 예수님의 형제, 지체, 성령의 성전이며, 하느님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을 위한 존재, 하느님과 같은 모습, 예수님의 형제, 성령의 성전이라는 사실에 있다. 사람을 그렇게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 안에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영적 감각과 영적 마음만으로 가능하다.

 

(3) 하느님을 사물 안에서 보고 의식하고 체험한다.

 

“공중의 새들과 들꽃들을 보아라.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아버지께서 잘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신다."(마태 6,26-30 참조) 하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눈에는 만물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돌보아 주신 결과, 아버지 사랑의 표시로 보였다. 그분께서는 만물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보고 느끼셨다.

 

사물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존재와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의 존재와 생명의 어떤 부분을 제각기 이어받아 존재하고 산다. 사물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생명체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물 안에 그의 창조주와 지탱자로 현존하시어 그가 존재하고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탱하고 이끄신다. 그래서 사물 안에 하느님을 그 창조주와 지탱자로 의식하고, 사물을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의 어떤 표시로 보고,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사물 하나하나는 하느님께서 떠받치고 지탱하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존재하지 못하고 살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떠받치고 지탱하시는 일을 그만두시면 사물은 그 순간에 무(無)로 돌아간다. 그만큼 사물은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전적으로 매달려 있다. 그와 같은 의식으로 사물을 보고 받아들이고 사용하면 나는 사물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의 체험으로 통합하게 된다.

 

사물은 존재하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의 어떤 부분을 드러내고, 그분의 사랑과 은총과 힘의 어떤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사물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것이고, 사물은 존재하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부르고 그분을 찬양하고 있다. 사람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하고 살아감으로써 백퍼센트 전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오직 사람만이 악의로 죄를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을 백퍼센트 전적으로 찬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사물과 하나 되고 사물의 일부분이 되어, 원래의 사람으로서의 원점에 돌아가, 할 수 있는 대로 백퍼센트 전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자기 안에서 사물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사물을 주신 단 하나의 이유와 목적은 사람이 사물을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께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사용할 때마다 그 사물이 주어진 근본 이유와 목적에 따라 그것을 옳고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께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도 역시 사물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한편 사물과 사람을 옳고 적절하게 사용하거나 대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거나 남용할 때 우리는 죄를 저지르게 된다. 죄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악용하는 내 마음에 있다.

 

이렇게 사물 안에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역시 영적 시각, 영적 감각, 영적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물은 감각적, 과학적 요소로 구성된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으로 인하여, 그분을 위해서, 그분을 찬양하며 존재하고 산다. 사물의 참 모습은 그 감각적 외관과 과학적 요소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규정되어야 한다.

 

사물의 감각적 외관과 과학적 요소만을 보는 사람은 사물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물 안에 하느님의 존재와 생명을 보고, 사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고, 사물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야말로 사물의 참 모습을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것은 결국 영적 시각과 영적 마음으로만 가능하다.

 

(4) 하느님을 사건 안에서 보고 의식하고 체험한다.

 

하느님께서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람의 생활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모든 일은 하느님의 섭리로 일어난다. 어떤 일이라도 하느님의 계획과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 의지로 일어나는 죄악과 천재지변과 불상사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묵인하시는 이유는 거기에서 더 좋은 것, 곧 그리스도의 속죄와 용서와 성령의 은총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사건 하나하나 안에 하느님을 그 주관자로 보고, 거기서 어떤 좋은 것을 끌어들이시는 하느님께 협조한다면 나도 모든 사건에서 어떤 좋은 것을 끌어들일 수 있다. 좋고 은혜로운 일뿐 아니라 좋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과 불상사도 하느님께 대한 순종, 사랑, 감사, 찬양, 인내와 희생으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자신과 남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이익이 될 수 있다. 별것 아닌 일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도 하느님께 대한 순종, 사랑, 감사, 찬양, 인내와 희생으로 받아들인다면 역시 자신과 남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이익이 될 수 있다.

 

자기가 저지른 죄까지도 뉘우치고 용서를 받았으면 어떤 쓸모와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뉘우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용서와 은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뉘우치고 용서를 받았던 죄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죄를 위해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요약하면 모든 일은 하느님과 연결시켜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으로, 하느님 안에 받아들인다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생기며,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일 안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일어나는 일과 하느님 체험을 통합할 수 있다.

 

게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사람에게 전한다. 좋고 은혜로운 일뿐 아니라 좋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과 실패와 죄까지도 반드시 어떤 메시지를 내포하고 전하고 있다. 그 메시지를 냉정하고 침착한 이성과 신앙으로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좋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과 실패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그것들을 교훈으로 삼아 활용할 수 있다.

 

(5) 하느님을 자기 행위 안에서 보고 의식하고 체험한다.

 

자기 행위 하나하나의 원천과 목적도 하느님이시다. 모든 행위는 하느님 때문에 가능하고, 그분 덕분에 할 수 있으며, 하느님을 지향하고 그분을 위해, 그분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31). 이와 같은 의식으로 행위 하나하나를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자기 행위와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

 

육화 신비의 영성가 테이야르 드 샤르뎅은 “하느님은 행동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생생하게 육화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행동 안에서 매순간 우리를 기다리신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은 나의 펜, 나의 곡괭이, 나의 붓, 나의 바늘, 나의 마음, 나의 사랑의 첨단에 현존하신다."(The Divine Milieu, Sheed &Ward, New York, 1960년, 136면)라고 말했다.

 

 

4.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으로 둘러싸인 세상

 

하느님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아주 작은 알 하나를 우주 전체라고 비유해 본다. 하느님 앞에 그 알은 현미경으로 보아도 보일까 말까 할 만큼 아주 작고 무(無)와 같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 알을 받쳐 둔 손을 약간만 움직이신다면 그 알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무로 돌아간다. 그만큼 우주 전체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고, 절대적으로 하느님 덕분에 존재한다. 그 우주 안에 은하계가 있고, 은하계 안에 지구가 있고, 지구 안에 한국이 있으며, 한국 안에 내가 있다. 나는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무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게다가 온갖 죄를 저지른 불결한 존재다.

 

그와 같은 나를 하느님께서 받아 주시고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목숨만큼, 아니 당신의 목숨보다 아껴 주시니, 나는 하느님께 오로지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가장 근본적 형편이다. 이 형편을 그대로 보고 의식하고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기도의 삶이요 관상의 삶이며, 내 안에 자신의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하는 삶이다.

 

그 형편을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존재하고 사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의 존재와 생명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매순간 존재하고 사는 것이다. 이 원래의 '무의식적 상태'를 '의식적 상태'로 올려 놓아 나의 존재와 생명이 의식적으로 하느님 체험과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영성의 삶이다. 세상 만물은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으로 충만하다. 숨쉬는 공기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공기는 하느님 자신과 그분의 은총, 사랑, 힘으로 충만하다. 숨쉴 때마다 하느님 자신과 그분의 은총, 사랑, 힘을 들이마시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움직이며 살고 있다고 의식한다면 숨쉬는 것은 기도가 되고, 숨쉬는 것과 하느님 체험이 하나의 체험이 된다. 마치 바닷물 속에 물을 마시고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이, 나는 하느님이라는 커다란 바닷물 속에 하느님을 끊임없이 들이마시는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움직이며 산다.

 

하느님께서는 내 앞과 뒤, 위와 밑, 좌우에 계시고 나를 완전히 둘러싸실 뿐 아니라, 내 안에 깊이 스며들어 침투하시고 내 안에 가장 심오한 곳에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나 자신보다 나에게 가까우신 분, 나 자신의 가장 심오한 곳의 한가운데에 현존하시어 거기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이끄시고 나에게 은총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무한히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 안에 무한히 깊이 내재(內在)하신다. 그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수천 배, 수억 배로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만큼 나에게 가까우신 분은 없고, 그분만큼 내 안에 깊이 현존하신 분은 없으며, 또 그분만큼 나를 사랑하신 분은 없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분만큼 친교를 나누고 체험하기 쉬운 분은 없다. 나에게 그런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감각과 영적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5. 끊임없는 기도로써

 

세상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는 것은 이미 기도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느님과의 내적 교류, 친교, 대화이며, 세상 만물 안에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과의 내적 교류, 친교, 대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만물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끊임없이 기도를 할 수 있고, 또한 끊임없이 기도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세상 만물 안에 하느님을 보고 의식하고 체험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노력은 사실상 똑같은 것이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항상 세상 체험을 하고 있는 나는 기도로써 하느님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가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의 체험으로 묶어 주는 '끈'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어떤 곳에서 어떤 시간에만 바치는 기도, 보통 우리가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생활 속에 활동하면서 끊임없이 계속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생활 속에 활동하면서 하는 기도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어떤 기도문이나 화살 기도를 반복하여 외운다.

 

② 어떤 성서 구절 (시편 구절, 복음서의 주님의 말씀 등)을 계속해서 외운다.

 

③ 계속적으로 주님께 자유 기도를 바치거나 주님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자유로운 형태로 드리고, 느끼는 여러 감정(찬양, 감사, 봉헌, 신뢰, 통회, 순종, 애원 등)을 자유로운 모양으로 표현한다. 마치 주님을 친한 친구, 애인, 형, 오빠와 같이 느끼고, 그분과 어떤 일이라도 서로 부담 없이 말하고 자연스럽게 애정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주님께서 나를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끊임없이 바라보고 계시다고 의식하고 그분의 눈길을 느끼며 사는 습관을 기른다.

 

④ 말 없이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식한다. 다시 말해서, 말없이 의식, 느낌, 생각만으로 주님께 대한 여러 감정을 표현한다. 이것을 '하느님 현존의 의식' 또는 '하느님 현존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이 수련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의식하기 때문에 기도문이나 말을 하는 일에 습관이 된 우리에게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습관에 익숙해지면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의식만 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 영성은 자기 생활과 활동의 모든 분야에 훨씬 쉽게 침투하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야말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하느님 체험 의식을 가지게 한다.

 

이 네 가지 방법 중에서 각자에 맞는 한 가지 방법 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활 속에 활동하면서 기도를 계속함으로써 세상 체험과 하느님 체험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

 

 

6, '세상 의식'과 '하느님 의식'의 동시 양립 가능성

 

세상일을 의식하는 것과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은 동시에 양립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하느님과의 일치의 다음 세 단계를 살펴본다.

 

① '습관적 일치'(the habitual union):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은총의 상태(대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느님과 일치한 상태이며, 하느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일치.

 

② '잠재적 일치'(the subconcious union):하느님과 일치하겠다고 한 번 의식한 후(주일 미사 때, 아침 기도나 다른 기도를 할 때,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등) 그 지향을 취소하지 않는 한,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유지되는 일치.

 

③ '현행적 일치'(the actual union) 또는 '의식적 일치'(the conscious union):여러 가지 세상일들을 생각하고 의식하고 행하면서도 하느님을 끊임없이 생생하고 선명하게 의식하는 일치.

 

이 '현행적 일치' 또는 '의식적 일치'는 세상의 일을 의식하는 것과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 상태이며, 두 가지 의식이 한 의식이 된 상태다. 이것은 논리적,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나, 영적, 체험적으로 가능하며, 수많은 성인 성녀와 신비가들,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실현된 현실이다. 이것을 인간적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우나, 어느 정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하느님께서는 나 자신과 나의 의식을 창조하시고 매순간 나 자신과 나의 의식을 지탱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매순간 세상 만물을 지탱하시는 분이시다. 그와 같은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 만물을 의식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며, 하느님께서 나 자신과 세상 만물의 밑바닥에 계시고 나와 만물을 지탱하시듯이, 그분께서는 내 의식의 밑바닥에 계시고 내 의식을 지탱하신다. 결국 하느님으로 인하여,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과 세상 만물을 의식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의식은 내 의식의 원천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대한 의식은 세상 만물에 대한 의식을 방해하기는커녕 세상 만물에 대한 의식을 일으키고 받쳐 주고 완성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2) 하느님께 대한 의식과 세상에 대한 의식을 같은 차원, 같은 종류의 의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의식은 지성적 의식보다 사랑을 토대로 하는 사랑의 의식이다. 마치 어떤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의식 안에서 하듯이,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의식 안에서 하는 것이다. 사랑의 의식은 다른 모든 의식과 활동과 생활 전체를 둘러싸고 그에 스며들고 그것을 내부에서 움직이고 활성화하고 완성한다.

 

이 점은 기도를 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하다. 기도는 어떤 기도문을 외우거나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행위'이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기도가 잘 되고, 사랑하지 않을수록 기도가 잘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생활 속에 활동하면서 하느님을 잘 의식하게 되고, 사랑하지 않을수록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사목, 2001년 8월호, 김보록(돈보스꼬 정보문화센터 원장, 살레시오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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