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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기쁨과 유머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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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19 ㅣ No.1595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기쁨과 유머 감각

 

 

슬픈 세상의 현실

 

가끔 알량한 지식적 성찰이지만, 넓은 맥락에서 세상의 현실을 조용히 돌아보고 성찰하다 보면, 뭔가 기쁘다기보다는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은 생의 시간보다는 살아온 생의 시간이 훨씬 많기에 슬프고 우울한 정서가 주된 정조로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름 조금 냉정하게 삶의 현실을 살펴봐도, 세상의 그렇게 희망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습니다.

 

세상은 물질적으로 더 풍요해졌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예전보다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더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삶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상의 전체적 현실은 그리 낙관적인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과 환경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지만, 기후변화는 분명 지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알 것 같습니다. 미래가 영화 “승리호”의 내용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도 못하겠습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조금 불편한 삶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지만, 물질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쾌락에 흠뻑 젖어있는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도 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쾌락 욕망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 물질문화의 힘이 너무 거대해서 우리가 그 싸움을 이겨낼 것 같다는 확신이 잘 들지 않습니다. 빈부의 양극화와 세대 간의 격차가 너무 커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할 수 있다는 신화가 가능한 시절을 살아왔던 저로서는 지금의 청년 세대들에게 뭔가 많이 미안한 느낌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과 지방 청년들의 우울한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답답해집니다. 바라보는 저도 그런데, 정작 그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견뎌내야 하는 청년들의 심정은 어떨까 가끔 상상합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생각과 전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미래의 현실이 답답한 전망으로만 보이고, 미래 세대에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오늘의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신앙인은 허무주의와 비관적인 태도를 지니지 말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신앙과 친교의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불안과 우울과 부정적인 사유와 태도가 가득한 현대 세상에서 신앙이 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거룩함의 덕(성덕)은 기쁨과 유머의 덕목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소심하거나 침울하거나 언짢거나 우울하거나 암울한 얼굴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룩한 이들은 기쁨과 즐거운 유머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이고 희망에 가득 찬 영으로 다른 이들을 비춥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22항)

 

교황님께서는 참 유난히도 기쁨(Joy)을 강조하십니다. “복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 당신 문헌의 제목에도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즐겨 하십니다. 답답하고 우울한 현실의 세상에서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참 기쁨, 즉 신앙의 기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는 인상도 듭니다.

 

현실이 아무리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해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앙의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이끌어 주시고 우리 삶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길 때,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당부한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22항). 신앙의 기쁨은 물질을 소비하면서 얻는 기쁨과 쾌락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기쁨과 쾌락은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128항).

 

신앙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진실에서 옵니다. 답답하고 막막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께 질문을 던지고 그분께 답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길을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즐겁고 기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는 것이지만, 그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내적 기쁨이며 초자연적 기쁨입니다. “그러한 기쁨은 깊은 안정, 고요한 희망, 그리고 세상이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영적 충만을 가져옵니다”(125항).

 

신앙의 기쁨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만 갇혀 있다면, 하느님의 선물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26항). 신앙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서, 이웃들과의 친교에서 오는 선물이기도 합니다(128항). 신앙의 기쁨은 소비의 기쁨이 아니라 친교의 기쁨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삶을 살고 있다면, 이웃들과 참된 친교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친교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유머 감각 –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태도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보통 유머 감각을 동반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26항). 유머 감각이란 단순히 남을 웃길 줄 아는 감각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유머 감각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웃을 줄 아는 감각입니다. 신앙인의 유머 감각은 모든 것을 유연하게 수용할 줄 알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복잡하지 않게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127항).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웃는 모습은 볼 수 없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예수님의 유머 감각을 잘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테리 이글턴, ‘유머란 무엇인가’, 문학사상, 2019, 245-248쪽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지 않은 일상의 삶 속에서 또 십자가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기쁨과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셨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언제나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향한 연민과 애도와 연대였습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유머 감각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긍정과 감사와 유연함을 갖는 일입니다. 즉, 자신의 슬픔과 아픔에만 매몰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아픔과 슬픔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는 언제나 연민과 애도와 연대의 태도가 요청됩니다. 신앙인의 참된 유머 감각은, 좌절과 절망, 슬픔과 아픔, 그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유머 감각이 있는 신앙인은 늘 감사하며 담담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현실의 슬픔과 신앙의 기쁨이 어긋나는 자리에서 진정한 유머 감각은 발생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5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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