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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30-35: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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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31 ㅣ No.826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0)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1)


‘브라운 신부’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 펴내

 

 

-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출처 catholicquotations.com

 

 

브라운 신부의 영성

 

여름철은 무더위와 장마로 사람을 힘겹게 하지만, 또한 휴가와 여행에 대한 기대로 흐뭇해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거나, 설레며 여행길을 오를 때 책은 빠질 수 없는 동반자인데요, 여름에는 특히 추리소설이 제격입니다. 더운 날씨에 무거운 주제의 책이 버거울 때, 긴장과 짜릿함이 있고, 지적 즐거움도 주는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긴 시간 여행길이나, 지겨운 열대야도 잊게 됩니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주로 북유럽이나 일본의 추리소설들이 각광을 받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추리소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분야로 자라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무엇보다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들이었습니다. 탐정의 대명사가 된 셜록 홈즈를 창조한 코난 도일이나, 미스 마플과 포와로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추리소설의 명작을 남긴 아가사 크리스티가 모두 영국 출신이지요. 이러한 영국의 추리소설의 계보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영국 작가이자 언론인,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중요한 가톨릭 사상가인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G.K.Chesterton, 1874~1936)입니다. 체스터튼은 영국 에섹스 주의 한 시골 본당 주임신부인 브라운 신부를 주인공으로 수십 편의 단편 추리소설을 썼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해결해가는 추리소설로서의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사할뿐더러 체스터튼 특유의 풍부한 문체와 이미지, 사변, 역설을 담고 있는 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입니다.

 

브라운 신부를 비롯한 체스터튼의 작품이 지닌 수준 높은 문학성은 동료 추리소설 작가나 애독자만이 아니라 많은 위대한 작가들에게도 경탄을 자아냈는데, 20세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위대한 작가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역시 체스터튼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보르헤스는 시각장애인이었는데, 그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로서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사건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도서관 사서를 맡은 시각장애인 수사의 이름을 호르헤라고 명명하기도 했었지요.

 

보르헤스는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단편들을 모은 선집을 편집하고 각 권마다 자신의 머리말을 달아서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유명한 기획을 내놓았는데 그중에 브라운 신부의 이야기 몇 편을 묶은 「아폴로의 눈」도 있습니다.(G.K. 체스터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편집 및 서문, 최재경 옮김, 바다출판사) 이 서문에서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체스터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브라운 신부의 결백」.

 

 

“체스터튼은 카프카나 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용기 있게 행복을 선택했다. 아니면 적어도 행복을 발견한 듯했다. 체스터튼에 따르면 가톨릭은 상식에 근거한 종교였다. 그는 기묘한 형태의 열쇠는 기묘한 형태의 자물쇠에 완벽하게 들어맞듯이 가톨릭 신앙의 기묘함은 우주의 기묘함과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는 내가 체스터튼의 가장 훌륭한 소설로 생각하는 작품이 담겨있다. 벼랑 위의 기다란 길, 흰색 군복의 기병과 백마, 체스게임 등으로 멋지게 장식한 작품이다. 바로 「묵시록의 세 기병」을 두고 하는 소리다… 내용을 너무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이르슈 박사의 결투」는 탄원서가 결투의 발단이 된다. 스티븐슨과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작품들에서 영향받은 이중성이라는 오래된 테마가 이 작품에서 아주 독창적으로 선보였다. 독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의심을 갖고 있던 독자는 그 이중성을 발견하면서 그 신선함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문학은 행복의 형태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 체스터튼만큼 내게 행복한 시간을 많이 안겨 준 작가는 없을 것이다. 난 그의 신앙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단테의 「신곡」에서 영향받은 그의 신학도 함께 나누지 못한다. 하지만 둘 다 체스터튼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를 내 가장 훌륭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고 이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의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일급의 문학성과 함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냉정한 통찰과 함께 인간의 약함에 대한 연민, 인간의 오만함과 자아도취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추리소설들과는 달리 사회적, 시대적 병리현상이나 잘못된 가치관들에 대한 문명비판적인 통찰들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대 영국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PD 제임스 역시 이러한 주제와 세계관의 확장을 그의 훌륭한 문학성 만큼이나 체스터튼이 추리문학이라는 장르에 기여한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불가지론자인 보르헤스가 존중을 담아 말하고 있듯 체스터튼의 세계관과 인간학적, 윤리학적 직관들은 신앙적 통찰과 신학적 성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브라운 신부를 통해 체스터튼은 자신의 신앙과 신학이 관념과 사변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매일매일의 삶과 행위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과 신학, 이것을 영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브라운 신부의 ‘영성’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브라운 신부는 누구인가?

 

체스터튼은 작가 생활 내내 틈틈이 신문이나 잡지에 브라운 신부 이야기들을 썼는데요, 이 작품들은 「브라운 신부의 결백」(1911), 「브라운 신부의 지혜」(1914), 「브라운 신부의 의심」(1926), 「브라운 신부의 비밀」(1927), 「브라운 신부의 스캔들」(1935)이라는 다섯 권의 작품집으로 묶여 출판됐습니다. (이 작품집 모두 2002년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우리말로 번역돼 출판되었습니다.) 초기 작품에서는 브라운 신부가 매우 과소평가되고 거의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인 「푸른 십자가」에 나오는 브라운 신부에 대한 외모를 묘사한 유명한 장면이 그 전형입니다.

 

이 작달만한 신부는 전형적인 동부 촌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둥글넙적하니 둔해 보였으며, 눈은 북해만큼이나 공허했다… 철저한 프랑스식 무신론자인 발렝탱 경감은 성직자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동정할 만큼의 인정은 있었다. 기차에 오른 그 신부의 모습은 발렝탱뿐 아니라 누가 봐도 연민을 자아낼 만큼 애처로웠다… 그에게서 절묘하게 어우러져 배어나오는 에식스 지역 특유의 바보스러움과 신앙심 깊은 단순성이 스트랫퍼드에 도착할 때까지 발렝탱에게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브라운 신부의 결백」 중에서 「푸른 십자가」)

 

이러한 묘사에서 브라운 신부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순진무구’와 ‘단순성’이 작가 자신의 의도와도 부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라운 신부 이야기의 이러한 첫인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과소평가하지만 마지막엔 그가 놀라운 지성과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브라운 신부가 사람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1)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2)

 

친구 오코너 신부에게서 탐정 브라운 신부 영감 받아

 

 

-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의 소설 「브라운 신부」를 원작으로 한 영국 BBC one의 드라마 ‘파더 브라운’.

 

 

오코너 신부와의 우정

 

체스터튼이 추리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단순히 독자와의 지적 게임을 즐기는 탐정물이나 범죄 자체를 흥미의 소재로 삼는 범죄소설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탐정 소설의 진정한 목적은 독자들과의 머리싸움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깨달음을 주는 방식에 있어서, 연속되는 일련의 진리들이 독자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품위 있는 추리소설들은 참된 신비주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된 신비주의는 단지 신비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명하고 밝히는 것이 목적이니까.”(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20.8.28.)

 

그가 원하는 이상적 추리소설을 위한 주인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체스터튼의 절친한 벗이었던 존 오코너 신부였습니다. 체스터튼이 아직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고 있던 시기인 1903년 오코너 신부가 독자로서 체스터튼에게 보낸 편지가 두 사람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체스터튼은 오코너 신부가 봉직하고 있는 요크셔의 케슬리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고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은 곧 우정으로 발전하였고, 두 사람의 우정은 생애를 통하여 지속됩니다. 오코너 신부는 깊고 진지한 성찰력과 날카로운 지성과 함께 해맑은 성정, 순수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오코너 신부의 정신적·영성적 자질이 체스터튼에게 ‘외적 단순함과 내적 섬세함’이 완벽하게 공존하는 브라운 신부의 인격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영감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코너 신부는 유머와 역설, 위트, 그리고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의 사귐과 만남에서도 거리낌 없는 쾌활함과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런 성품 역시 브라운 신부의 행동과 태도에 어느 정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체스터튼도 많이 공유하는 점이어서 두 사람이 가까운 친구가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브라운 신부의 탄생

 

체스터튼이 이 실제 가톨릭 사제인 친구의 인격과 지성, 성품으로부터 브라운 신부라는 잊혀지지 않을 문학적 인물을 창조하게 한 주된 영감을 받았지만, 오코너 신부가 일반적 의미에서의 브라운 신부 ‘모델’이 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코너 신부와 브라운 신부는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체스터튼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브라운 신부를 구상하면서 체스터튼은 브라운 신부가 주목을 끌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인물이고 능히 과소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코너 신부는 사람의 눈길을 즉시 끌만한 사람이었죠. 체스터튼은 자서전에서 작가의 권리는 영감을 준 실제 인물을 마음껏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이라 밝히면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오코너 신부로부터 브라운 신부라는 독자적인 문학적 인물을 그려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브라운 신부’라는 캐릭터의 핵심은 ‘특징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뛰어난 지성과 재능이 쉽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라는 원칙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브라운 신부의 수수하고 조금은 바보 같아 보이는 외모는 그가 이내 펼쳐 보일 예측할 수 없는 긴장과 지성과 확실한 대조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브라운 신부가 ‘초라하고 볼품없는 옷차림에다, 둥근 얼굴은 무표정하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노련하지 못하고 서툰 인물’이라는 것은 이 이야기들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었지요. 그런데 실제 오코너 신부의 모습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합니다. 그는 ‘초라하지 않고 깔끔한 편’이었으며, ‘서툴지 않고 매우 섬세하고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고, ‘잘 웃으면서 남을 잘 웃기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체스터튼은 자신의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게다가 오코너 신부는 ‘섬세하고 재치 있는 아일랜드인’이었으나 브라운 신부는 영국 동부에 있는 이스트 앵글리아 출신의 ‘서퍽 촌뜨기’였다.”

 

한편, 체스터튼은 오코너 신부가 브라운 신부의 탄생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을 밝히는 유명한 일화 하나를 전하고 있습니다. 체스터튼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한 글을 잡지나 신문에 쓰곤 했는데, 한번은 오코너 신부와 대화하면서 자신이 사회의 범죄와 타락한 풍속들에 대한 글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범죄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오코너 신부는 체스터튼에게 그가 오해하고 있거나 잘 모르는 일들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그가 아는 여러 무시무시한 범죄와 도시의 숨겨진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알려주었습니다. 체스터튼은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바로 조용하고 명쾌하며 밝은 성정을 가지고 있으며, 독신서약을 지키며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한 성직자가 언론인이자 작가인 자신보다도 인간의 죄의 세계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있다는게 조금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은, 얘기를 마치고 함께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두 명의 케임브리지 대학 학부생을 만났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오코너 신부의 교양있고 학식 높은 대화에는 감탄하면서도, 수도원에서 지내는 사람이 실재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느냐고 말한 것이지요. 오코너 신부가 세상의 ‘악’에 대해 얼마나 깊은 현실적 지식과 통찰을 지녔고 투쟁해 왔는지를 방금 들었던 체스터튼에게 이 학부생의 말은 더 없는 아이러니였고, 이 두 명의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은 신부에 비하면 악과 어둠에 대해 유모차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 수준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지요. 그 순간 체스터튼에게는 이렇게 우습고도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작품에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브라운 신부가 탄생한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7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32)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3)

 

화려하고 명성 높은 이들의 이면을 꿰뚫어보다

 

 

-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이 창조한 추리소설 속 탐정역 캐릭터 파더 브라운. 국내에도 일찌감치 작품이 소개됐으며, 북하우스에서 브라운 신부 전집(총 5권)을 출간했다. 출처 나무위키.

 

 

브라운 신부의 신학 : 이성, 신앙, 신비

 

우리는 브라운 신부 이야기들을 읽으며, 추리소설로서의 반전과 촌철살인 같은 심리 파악, 심층적인 논리, 좋은 취향의 유머와 풍자를 즐길 수 있을뿐더러 브라운 신부를 통해 전해지는 영성적 지혜들에 감탄하며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성과 삶의 지혜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깊은 신학적인 뿌리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체스터튼은 난해하고 사변적인 표현과 방식을 피하면서도 어떻게 신학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한 인물의 생각과 판단과 감정을 올바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라운 신부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 신학’의 한 탁월한 예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브라운 신부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핵심적인 개념 세 가지로 ‘이성’ ‘신앙’ ‘신비’를 들고 싶습니다. 이성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고 신비에 대한 건강한 경외심을 갖는 것이 브라운 신부가 언뜻 보기에 복잡해 보이는 사태의 핵심을 관찰하고 직관할 수 있는 비밀이며, 화려한 언변과 지위, 명성을 지닌 사람들의 왜곡되고 병든 심리와 위선을 꿰뚫어 보고 연민과 용서와 인정이 필요한 이들에게 적절하게 용기와 위로가 되는 말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브라운 신부의 신학을 생각해보면, 체스터튼이 훗날 가톨릭 교회의 품에 안기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요. 브라운 신부의 신학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예는 브라운 신부가 나오는 첫 번째 에피소드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종교철학이나 기초신학 강의나 저서에서 즐겨 언급될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브라운 신부의 외모와 첫인상에 대한 묘사를 보게 되는데, 흥미 있는 것은 그 관찰자가 프랑스의 유명한 경찰 발렝탱 탐정입니다. 이 발렝탱 탐정은 반 종교적인 계몽주의와 이성만능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발렝탱 탐정과 브라운 신부는 치열한 대결을 하게 되는데요, 「푸른 십자가」에서는 아직 그런 파국은 보이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발렝탱 탐정은 이야기의 끝에서 브라운 신부가 딱하고 우둔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 기지를 고루 갖춘 탁월한 인물임을 뒤늦게 알고 브라운 신부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데, 그를 통해 독자는 브라운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는 브라운 신부 이야기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플랑보가 등장합니다. 플랑보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도적이었는데, ‘범죄가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탐정은 비평가에 지나지 않다’는 도전적인 말과 함께 브라운 신부와 대결을 하지만, 번번이 덜미를 잡힙니다. 브라운 신부는 그의 내면의 선성을 직감적으로 알기에 그를 범죄의 유혹에서 나오게 하려고 그에게 훈계와 경고도 하고 설득도 합니다. ‘날아다니는 별들’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조언이 아주 인상적인데요, 이것은 플랑보에게 하는 연민의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브라운 신부가 얼마나 사람의 심성을 잘 통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자네가 그 다이아몬드들을 되돌려주기를 바라네, 플랑보. 그리고 이런 생활을 그만뒀으면 하네. 자네에게는 아직 젊음과 명예와 재치가 있지 않나. 그것들을 이런 일에 소진할 생각일랑은 말게. 인간은 선한 일에 있어서는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네만, 나쁜 일에는 그 수준을 유지할 수가 없다네. 점점 더 내리막길을 향해 내달릴 뿐이지. 친절한 사람도 술을 마시면 잔인해지고, 솔직한 사람도 살인을 하면 그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된다네. 내가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자네처럼 의리 있는 무법자가 되고 부자들만을 터는 유쾌한 도적이 되겠다고 이런 일을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신세가 되었네.”

 

다행히 플랑보는 훗날 개과천선하여 범죄자 대신에 탐정이 되고 브라운 신부의 가까운 친구이자 충실한 협조자로 함께합니다. 루팡이 왓슨이 된 셈이지요.

 

「푸른 십자가」에서는 물론 플랑보는 범죄자로서 브라운 신부에게 접근합니다.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에 브라운 신부가 교구의 보물 중의 보물인 ‘푸른 십자가’를 가지고 참석했다가 무사히 가져오는 임무를 맡은 데서 시작됩니다. 플랑보는 아주 근사하게 수도자로 변장하여 브라운 신부에게 접근, 두 사람은 동행이 되어 길을 갑니다. 발렝탱 경감은 플랑보가 푸른 십자가를 노린다는 정보를 듣고 브라운 신부를 몰래 관찰하는데, 브라운 신부 옆의 수도사다운 품위를 갖춘 사람이 플랑보라는 것을 서서히 감지하게 됩니다. 다만, 이 두 명의 인물이 지나간 자취마다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수수께끼였지요. 그것은 사실 브라운 신부의 일종의 신호라는 것이 나중에 드러납니다.(그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브라운 신부의 신학을 논하는 흥미로운 언급들은 브라운 신부가 이 수도사로 분장한 플랑보와 나누는 대화에 나옵니다. 브라운 신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플랑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맞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요즘 사람들은 이성을 따른다고 말을 하니까요. 하지만 이 수많은 세상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성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가 존재하리라 생각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브라운 신부는 반박합니다. “아닐세, 이성은 심지어 최후의 지옥의 변방에서나, 만물의 소실점에서도 항상 ‘이성적’이라네. 사람들은 교회가 이성을 타락시킨다고 하지만, 실은 반대야. 세상에서 진정으로 최고의 이성을 이루어내는 곳은 교회뿐이고, 하느님께서 이성에 의해 구속되심을 인정하는 곳도 교회뿐이라네.” 그리고 마침내 플랑보의 정체를 밝혀낸 후에,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네, 이성을 공격하지 않나. 신학을 하는 사람에게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니지.”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1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3)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4)

 

‘신앙과 이성’을 통한 진리 추구,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영향 받아

 

 

신앙과 이성의 두 날개 : 브라운 신부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푸른 십자가」에서 브라운 신부는 하느님이 만드신 세계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창조주께 찬미를 올리는 것이 이성을 통한 진리의 추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경건의 이름으로 이성의 빛을 거부하는 태도는 진리를 왜곡하고 오류에 빠지게 하기에, 결코 ‘좋은 신학’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브라운 신부의 주장을 들으며 떠오르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체스터튼은 이 ‘천상적 박사’에 대한 통찰력 있는 책을 썼고, 이는 지금도 수없이 많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책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사랑받는 매우 독특한 매력을 지닌 저서로 남아 있습니다(G.K.체스터튼, 「성 토마스 아퀴나스」, 박갑성 옮김, 홍성사, 1984).

 

 13세기 서양 중세 그리스도교 정신사의 정점을 이룬 「신학대전」으로 대표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철학은 사실 근대 이후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과도한 ‘스콜라주의’라 할 수 있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사변적이며 폐쇄적인 경향으로 치달은 신학 경향과 부당하게 동일시되었고, 그의 정신적 유산이 지닌 풍성함과 창조성, 개방성은 잊혀져 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성인의 신학과 철학은 전 교회의 진리추구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자리 잡게 하였고 일반 철학계에도 ‘토미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어넣은 사람이 「노동헌장」으로 유명한 근대 후기의 위대한 교황 레오 13세였습니다. 레오 13세가 1879년에 내놓은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보다 깊이 있는 탐구를 추구하게 하여, 각 대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연구를 부흥하게 하였고 이른바 ‘신 토마스 주의’라는 현대 철학 안에서도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는 철학의 흐름도 낳게 했습니다. 레오 13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과 인격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들(고대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마치 흩어진 지체들을 한 몸으로 모으듯 수집해서 놀랄 만한 방식으로 배열했고 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보충 완성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가톨릭 교회의 영광이며 비상한 보루라고 평가받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성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 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다루지 않은 철학의 분야란 하나도 없습니다(레오 13세, 「영원하신 아버지」, 22항).”

 

체스터튼이 자신의 바로 앞세대 인물이라 할 레오 13세 교황의 탁월한 식견과 용기에 깊이 감명받고 동감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데요, 아닌게 아니라 브라운 신부에서는 자신의 모범으로 레오 13세 교황을 존경 어린 어조로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올바르게 신비를 향하는 것이 신학과 영성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브라운 신부에게서 배우고, 또한 브라운 신부에게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귀한 가르침의 반향을 듣게 될 때, 관심을 가질 만한 교회문헌이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에 발표한 회칙 「신앙과 이성」입니다. 한때 폴란드 루블린 대학의 철학 교수이기도 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자, 현대 교회학문의 의미 있는 지침 역할을 한다고 할 이 회칙은 레오 13세의 「영원하신 아버지」가 담고 있는 정신을 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화된 학문적 풍토 안에서 새롭게 되살린 문헌이라 하겠습니다. 회칙 「신앙과 이성」은 다음과 같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구절로 시작합니다.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이 회칙은 ‘신앙과 이성’에 대한 교회의 일관된 입장을 현대인에게 다시금 환기시켜 주는데요, 그것은 신앙의 내용인 ‘계시’는 결국 믿음을 필요로 ‘신비를 간직한 채로’ 남아있지만, 이성은 그러한 계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인간 이성이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는 표지들을 계시 자체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표지들은 진리 탐구를 새로운 깊이로 안내하고, 마음이 그 자발적인 탐구에서 이성 자신의 방법을 열정적으로 사용하여 신비 속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 표지들은 또한 이성이 그것들의 표지로서의 지위를 뛰어넘어 그것들이 담지하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도록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은 감추어진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앙에 고유한 지식은 신비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신비를 더욱 드러내 줄 뿐입니다. (13항)”

 

그러기에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성을 추구하고 그것에 신뢰를 둘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밝혀준 공로를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화들을 재발견하고 있던 시대에, 성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에 영예로운 자리를 배정한 위대한 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43항)”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2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4)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5)

 

현란함에 눈멀지 말고 진실을 직시해야

 

 

-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출처 위키피디아.

 

 

■ 브라운 신부의 영성과 삶의 지혜

 

브라운 신부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영성과 삶의 지혜는 올바르고 확고한 신앙, 이성에 대한 합당한 신뢰와 건전한 상식,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신비화와 현혹됨하고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신비에 대한 참된 경외심 등이라 하겠습니다. 브라운 신부가 여러 복잡해 보이는 사건들과 만났을 때, 사태의 진실에 육박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 건전한 이성과 상식, 깊고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한 판단력은 영성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브라운 신부 이야기에서는 여러 번 밀교 전도사나 마술사, 술수를 부리는 이들과의 대결이 나오는데,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독자들은 현혹하려는 힘에 대항하는 판단력과 ‘건전한 상식’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됩니다.

 

‘보라색 가발의 비밀’이라는 이야기에서 브라운 신부는 진실을 보지 않고 외면하게 만들며, 현혹시키고, 그렇게 현혹된 채로 남아있도록 이끄는 이야말로 악마적이라 지적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진실을 직시하는 빛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비밀은 사악한 것입니다. 사탄이 당신에게 무언가가 너무 무서운 것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든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너무 끔찍하니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진실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견뎌내야 합니다. 간청하니 바로 이 자리에서 그 악몽과도 같은 저주의 비밀을 털어놓아 주십시오.”

 

브라운 신부는 물론 우리가 건전한 상식과 이성의 빛에 의한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자주 ‘맹점’이 있기에 핵심적 사실을 눈앞에 두고서도 보지를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를 우리는 에드가 알란 포의 단편 추리소설들을 연상시키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네들이 이걸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만 모든 일은 추상적인 곳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지. 더군다나 이 사건은. 사람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 사람들은 질문한 사람이 의미하는 것 혹은 그들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한다네. 어떤 부인이 시골 저택의 부인에게 ‘댁에 함께 지내는 분이 계시나요?’라고 물어본다고 가정해보세. 이 질문을 받은 부인이 ‘네, 하인 한 명, 마부 세 명, 그리고 하녀 한 명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걸세. 비록 하녀가 방 안에 있고 하인이 그녀의 바로 뒤에 있다 해도 말이야. 그 부인은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함께 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도 없다’가 바로 이 사건에서의 ‘아무도 없다’일세. 그러나, 한 의사가 전염병에 대하여 조사를 하면서 ‘댁에 함께 지내는 분이 계시나요?’라고 묻는다고 가정해보세. 이 부인은 하인과 하녀, 그밖에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낼 걸세. 이것이 언어가 쓰이는 방식일세. 진실한 대답을 들었다 해도, 문자 그대로 보면 질문에 맞는 대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거지.”

 

브라운 신부에게서 우리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인식에 있어서의 맹점을 알아채고 경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찰이 필요하리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브라운 신부가 말하는 성찰과 이성적 숙고, 건전한 판단력은 물론 굳건한 신앙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신비를 알아보는 영적인 감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비를 일시적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눈속임으로 격하시키는 ‘신비화’로 유혹하는 내적 경향이나 외적 영향을 극복하게 하는 정신의 덕이라 할 수 있겠고, 그런 의미에서 참된 신비를 향한 올바르고 합당한 경외심의 긴요한 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깨어있는 이성적 판단력은 우리가 깊은 신비를 감지하는 지각력을 지니기 위한 도야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또한 브라운 신부를 통해 신비란 눈속임이나 억지로 신비롭고 대단하게 보이게 하려는 일체의 시도에서 자유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마법적인 것과 주술적인 것을 신비인 것처럼 포장하는 세상의 수많은 시도들을 대할 때, 그 외면의 놀라움이나 신기함, 그리고 현란함에 눈멀지 말고, 그 외피를 치워버리고 그 본질을 직관한다면,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빈약하고 초라하며 유치한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우리가 영성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깊이 새겨볼 만한 관점이라 하겠는데요. 특히 ‘하늘에서 날아온 화살’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브라운 신부가 악의 없이 재빨리 말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많이 있지요. 파리의 카페나 술집에서 이시스 강의 베일을 벗겨냈다거나 스톤헨지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건에도 그들은 몇 가지 신비주의적인 설명을 들이대지요.”

 

변호사인 버나드 블레이크는 부드럽고 검은 머리를 정중하게 말하는 사람 쪽으로 기울였지만 소리 없는 그의 웃음은 좀 냉담했다.

 

“신부님이 그런 신비주의적인 설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적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브라운 신부가 온화하게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오히려, 그 부분이 제가 그들에 대격하는 이유지요. 가짜 변호사가 나에게 겁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겁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야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옷을 입은 바보를 히아와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크레이크씨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사기꾼이 저에겐 비행기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꾸며댈 수 있지만, 웨인씨에겐 그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진짜 신비한 것은 정체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모두 드러내는 법이지요. 모든 걸 백일하에 드러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밀교 전도사는 무언가를 어둠 속에 비밀로 숨깁니다. 하지만 그 비밀만 알아내면 아주 평범한 것이 되죠.”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28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5)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 (6 · 끝)

 

골짜기서는 거대함을 보지만 정상에서는 작은 것 볼 뿐

 

 

- 영국 BBC 드라마 ‘파더 브라운’ DVD 표지의 일부.

 

 

■ 브라운 신부의 인간탐구와 자기성찰의 삶

 

체스터튼이 창조한 매력적인 인물이자,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올바른 영적 태도를 곰곰이 새겨보게 하는 브라운 신부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알아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 회가 되었습니다. 지난 회에는 특히 브라운 신부가 보여주는 판단력과 지혜가 신앙과 이성의 조화, 건전한 상식에 대한 적절한 신뢰, 신비에 대한 참된 경외심과 허황된 환영을 거슬러, 실재의 질서를 보려하는 지적인 성실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를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존재’와 ‘인식’의 차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거슬러 갈 수 있는 ‘존재론’과 ‘인식론’적 명료함이 브라운 신부에게는 몸에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것이 살아있는 철학, 진정한 지혜의 추구로서의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윤리적 삶과 영성적 깨달음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는 것이 가톨릭 철학과 신학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물론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것이 굳이 어려운 철학적 용어나 사변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지혜를, 실제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살아가는 실천의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이니까요. 실천의 영역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과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과, 더 나아가서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신비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가지고자 부단히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실재와의 만남’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영원을 향하는 길을 찾는 순례자이자 구도자로서 매 순간, 삶의 계기마다 투명하고 가림 없이 보기를, 그리고 허상이 아니라 참된 실재와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신앙인은 존재를 인식하는 눈을 가다듬어가면서 비로소, 참된 윤리적 행위와 영성적 삶이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이들이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삶의 철학자’가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브라운 신부는 겉으로 보기에 우아하고 존경받고 확신을 지니며 흔들림 없어 보이는 자신감에 차 있는 이들이 얼마나 내적으로 깊은 오류에 빠져있고, 존재론적인 도착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지를 볼 줄 아는 이입니다. 그의 인간 탐구는 잘못된 존재론과 인식론이 어떻게 그릇된 윤리적 죄와 잘못된 영성으로 귀결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주 그러한 오류는 언뜻 보기에 선과 덕처럼 보이는 윤리적, 영성적 오만함에서 오기도 합니다. 브라운 신부 이야기 중에서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단편인 ‘신의 철퇴’에 나오는 한 종교인은 방탕아이자 무뢰한인 자신의 형을 스스로 단죄합니다. 브라운 신부는 그가 어떻게 ‘정의’라는 선에 대한 열정이 이러한 비극으로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고 있던 한 사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단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높고 고독한 장소를 더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루나 뾰족탑에 있는 구석이나 틈새 같은 곳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 현기증 나는 장소에 오르게 되면 온 세상이 수레바퀴처럼 자기 발 밑에서 돌아가고 있으니, 머리도 같이 돌아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양 환상에 빠지곤 했죠. 그래서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음에도, 아주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브라운 신부는 자기 자신을 진솔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아래로 내려보는 오만이 이른바 지도층의 고질적인 ‘인식의 병’임을 ‘통로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이야기에서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명인사들이 묘사한 범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사실은 통로 끝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요점인데요, 여기서 브라운 신부는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우스꽝스러운 뿔이 달린 땅딸보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범인의 인상착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우리가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명망 높으신 저 두 분들께서는 그러지 못하셨는데, 귀하는 어떻게 그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브라운 신부는 전보다 더 힘들게 눈을 깜박거리며 더듬더듬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거울을 자주 보지 않아서겠지요.”

 

브라운 신부는 존재론과 인식론적 오류, 윤리적 타락, 영성적 빈곤을 야기하는 매우 위험한 악덕으로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는 태도, 곧 현대인에게 두드러진 ‘자아도취’를 지적합니다. ‘배우와 알리바이’라는 단편에서 사람들이 성녀처럼 떠받드는 맨더빌 부인의 숨겨진 품성을 통찰하는 장면은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창문을 내다보기 전에 거울을 먼저 들여다보는 유형의 사람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 인생에 최악의 재앙입니다. 그 벽 거울은 그녀에게 불운한 것이었습니다.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브라운 신부 이야기 중에서도 후기작인 ‘브라운 신부의 부활’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레이스라는 인물은 어떤 허상이나, 자기 자신을 떠받드는 언론에도 들뜨지 않는 브라운 신부의 진정한 품성에 다음과 같이 감탄합니다.

 

“저는 그렇게 깨어난 사람 중에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이 천 명 중에 한 명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잠꼬대를 할 때도, 온건한 정신과 소박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갖춘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이에 브라운 신부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겸손함은 거인의 어머니입니다.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대한 것을 봅니다. 하지만,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작은 것들을 볼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역설의 대가’ 체스터튼은 이처럼 친근하면서도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 인간형을 브라운 신부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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