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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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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6-20 ㅣ No.147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① 전전(前戰) 시대 - 평화롭던 땅


퍼져나가던 복음 씨앗 분단으로 성장 멈춰

 

 

1937년 평안북도 신의주성당의 장례예식 모습. 성장하던 북녘교회는 해방 후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남북관계가 맑았다 흐려지고, 형제와 이웃이 상봉했다 헤어지며 ‘6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일어난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올해로 꼭 60년이 됐다. 해방 후 북녘교회와 한국전쟁, 탄압받던 교회, 현대 순교자 시복시성에 대해 4주에 걸쳐 살펴본다. 한국교회사에 있어 기념해야할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필이면 ‘전쟁’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45년, 해방은 아쉬운 분단으로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우리나라는 곧바로 자치국의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강대국들의 합의에 의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일정 기간 동안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우리나라는 일종의 과도 국가라는 성격을 띠었으며, 소련정과 미군정 역시 38도선을 사수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종교정책에 따라 천주교회 역시 혼란 속에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소련정의 북녘교회와 ‘종교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군정의 남녘교회는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됐다. 종교를 탄압받던 일제 암흑기를 지나 ‘자유’를 얻을 줄 알았지만, 분단으로 인한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북녘교회에 대한 핍박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한을 통치하게 된 소련은 교구와 수도원에 서서히 종교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7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연길·북한교회’의 참상이 남한교회에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한 여진천 신부(성지 베론 관리소장)는 “이 소식(북녘교회의 박해)을 들은 노기남 주교는 전국 각 교회로 공문을 보내 연길, 덕원교구를 위해 의연금을 보내주도록 요청했다”며 “박해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구제품이 경향잡지사에 답지했다”고 말했다.

 

 

해방 후 북녘교회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암흑기에서부터 한국전쟁 당시 북녘교회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함흥교구와 덕원자치구는 1920년 경성대목구에서 분리된 ‘원산대목구’에서 1940년 다시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로 분리된 경우다. 가톨릭대사전은 “당시를 기준으로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를 합해 성직자 35명, 본당 12개, 공소 89개, 신자수 1만1004명이었으나 1944년에는 함흥교구만 본당 9개, 공소 31개, 신자수 5475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의 교세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는 북녘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1949년 교구 관할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성직자와 수도자 전원이 체포되거나 해산됨으로 인해 ‘성장’을 멈춰야만 했다. 교구가 설정된 지 10여 년 만에 박해와 한국전쟁이라는 ‘슬픔’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1928년 설정, 1942년 폐지된 황해도 감목대리구는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할 만큼 일찍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꽃을 피운 곳이다. 따라서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양선교사 및 한국인 신부들이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산간벽지 공소에까지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본당 설립도 활발해져 1928년 곡산본당과 삼차동본당을 시작으로 신천본당, 안악본당, 연안본당, 장련본당, 옹진본당, 송화본당, 송림본당을 설립하는 등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다.

 

그러던 중 1942년 노기남 주교가 서울대목구장 겸 평양·춘천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고 ‘황해도 감목대리구 제도 폐지’가 결정됐다.

 

이후 노기남 주교가 황해도를 관리했으나 1945년 해방 후 소련정으로 인해 교구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자 사리원본당의 박우철 신부가 교구장 대리로 황해도 천주교회를 감독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이곳의 본당 대부분은 ‘침묵의 교회’가 됐다.

 

북녘교회 중 가장 활발한 성장을 보였던 평양교구는 1927년 서울대목구에서 지목구로 분리돼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됐다가 1939년 대목구로 설정된 경우다. 이 지역은 일찍이 북경을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로서 사제나 평신도의 피와 땀의 발자취가 이어진 곳이다.

 

가톨릭대사전은 “192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진출하던 당시 평안도 지역의 신자 수는 5000여 명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평양지목구는 이와 같이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더니 1938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한국 최초 방인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평양지목구는 본당 19개, 공소 134개, 신자수 1만8000여 명, 예비신자 3200명에 달할 정도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1948년 주교좌성당으로 쓰려던 ‘관후리성당 건물을 평양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는 조치를 거절하며 박해가 시작됐고, 성직자들이 체포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녘교회의 탄압은 한국전쟁과 함께 가열되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6일, 오혜민 기자]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② 전쟁의 상처, 피로 물든 땅


전쟁 중에도 신자들 곁 지킨 사목자

 

 

해방 후 소련정과 미군정이 각각 들어서며 ‘분단 아닌 분단’의 길을 걷게 됐던 우리나라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된다.

 

미사를 봉헌하는 그 주일에 울린 총성,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도를 높여갔다. 특히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중공군이 후퇴하며 북녘에 있던 우리 교회 유산들은 힘없이 모두 무너져갔다.

 

 

주일의 총성,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늘 신자들 곁에 있으려 노력했다. 사진은 미 해군 막사에서 예수성심시녀회 창설자 남 루이 데랑드 신부와 수녀들, 성모자애원 아이들의 기념촬영(1951년)

 

 

“포성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후퇴하며 싸우는 인민군을 만났다. 상관들은 난폭해졌고, 호송원들도 냉혹해졌다. 그들은 우리에게 ‘빨리! 빨리! 전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죽이겠소’라고 위협했다. 나는 우리 사랑하올 관구장님과 같이 있고 싶어 그분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이분은 76세나 되신 연로하신 분이에요. 50년이나 당신 나라에 있는 환자들을 간호하고 고아들을 기르고 보살피는데 헌신하신 분이오’라고 말했다.”

 

성심의 으제니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동토에서 하늘까지’라는 책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책은 당시 한국관구장으로 일하던 베아트릭스 수녀와 함께 공산군에게 피랍돼 ‘죽음의 행진’과 3년간 포로생활을 겪은 으제니 수녀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의 평온한 일상을 가르고 북한군이 서울로 쳐들어왔다. 삽시간에 백동(현 혜화동)은 위험한 상태였고, 한국에서 소임을 다하던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피란길에 올랐다. 하지만 한국에 머물겠다고 청한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공산군과 함께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수용소에 수감됐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됐다. 으제니 수녀와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도 ‘스스로 남은 이들’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나를 떼밀며 관구장님과 떼어 놓았다. 가슴이 찢기는 아픔의 순간이여! 나는 포로수용소의 책임자에게 언제 그분이 돌아오시느냐고 물어봤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관구장님을 다시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니 너무 어리석군요. 그분과 헤어진 후 총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듯 슬피 울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 관구장님을 맞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남아있어야 하는 수녀에게는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교회를 수호하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 대응하는 교회의 역할은 대부분 ‘교회 수호’로 이어졌다. 이 같은 결정이 성직자들의 희생을 늘리는데 기여했다는 지적도 이어지지만, 교회의 단호한 결의와 신자 보호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다.

 

실제로 서울대목구는 1950년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고, 전쟁에 대응하는 방침을 결정한 후 시내 각 본당 사제들에게 전달한다.

 

전쟁 전후 북한군에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 · 신학생.

 

 

당시 그들이 정한 방침은 ▲ 아직은 한강을 건너 피신할 길이 있으니 공산당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윤형중 신부와 김철규 신부는 무조건 남하하도록 한다 ▲ 보좌신부들과 특수사목에 종사하는 신부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피란을 떠나도록 권유한다 ▲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 한다 등이었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경우 8월 6일까지도 주일 미사가 봉헌됐으며 가정방문과 성사집전을 비롯한 사제의 활동도 계속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지역에서도 본당을 지키라는 교구장의 지시에 성실히 따른 많은 성직자들이 수난을 당했다. 서울대목구와 춘천지목구, 대전지목구 신부들의 경우 ‘본당을 지키라’는 교구의 방침 내지 본당 신부들의 의지 때문에 희생이 비교적 컸다.

 

북녘교회의 고통은 남한과 견주기 어려울 정도다. 1950년 6월 24일까지 북한에 남아 사목활동을 하던 신부는 모두 11명이었는데 전쟁 발발과 함께 모두 검속에 걸려 그 이후 아무도 사목 일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또 유엔군의 무차별 공중 폭격으로 1950년 말까지 남아있던 북녘의 교회건물이 무너졌고 중공군이 후퇴하며 ‘사실상 폐허’로 변했다.

 

평양교구 출신 원로사목자 김득권 신부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자 어쩔 수 없는 폭격이 일어났고 그때 북한교회들이 모두 파괴됐다”며 “전쟁 당시 인민군들은 젊은 사목자들과 피란 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도 죽였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13일, 오혜민 기자]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③ 고통 속에 피는 꽃, 신심의 땅


전쟁 중에 꽃 핀 성모 · 순교 신심

 

 

- 북한 포로기를 남긴 으제니 수녀(밑줄 가운데). 사진은 으제니 수녀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관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1954~1959).

 

 

포화 속에서 ‘꽃’은 피어났다. 조선 시대 순교자의 피가 한반도에 신앙의 꽃을 피우듯, 한국전쟁 가운데 교우들이 틔우는 ‘성모 신심’과 ‘순교 신심’의 꽃봉오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꽃은 어렵고 힘들수록 더 강렬하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신앙의 꽃’이다.

 

가톨릭대사전은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관련해 또 하나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심운동 측면”이라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순교 신심과 성모 신심을 더욱 강화했고, 거기에 매달렸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한국교회는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한다’ 등의 교회수호활동과 교우들의 ‘신심운동’으로 전쟁에 맞섰다.

 

 

성모 신심은 용기와 희망이 되고

 

당시의 신심운동은 크게 ‘성모 신심’과 ‘순교 신심’으로 나뉘었는데, 어머니인 성모를 통해 전구함으로써 공산주의와의 전투에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유지시키는 사회 심리적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뿌리 내린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성모 신심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용기와 희망으로 작용했다.

 

성심의 으제니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쓴 ‘북한 포로기’에 보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끌려가 ‘죽음의 행진’을 걷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도 성모신심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에 대해 느낄 수 있다.

 

“카다르 신부님은 코요스 신부님과 함께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곤 하였는데, ‘코요스 신부, 나하고 같이 로사리오 기도를 바칠까? 나는 아직 세 단의 묵주신공을 더 바쳐야 하는데, 신부는? 신부는 환희의 신비를 하고 있어? 나는 고통의 신비를 하고 있어.’ 이 불가사의하고 고독한 길에서 경건한 ‘성모송’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메아리는 무시무시하고 인적 없는 산을 수천 번이나 때리고 되돌아와 하늘로 올라갔다.”

 

‘파티마 성모’와 ‘루르드 성모’의 메시지도 한국 교우들에게는 전쟁에 맞설 힘으로 작용했다. 성모는 전쟁으로 인해 입은 심리적·육체적 상처를 치유하고 어루만져주는 ‘위로자’의 역할을 했다.

 

특히 공산주의의 패배와 멸망을 약속한 파티마 성모의 메시지는 교우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는데, 전석재(이냐시오) 신부는 “파티마의 경고를 상기하자”며 “세계적이고 전 민족적이며 전 교회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희생과 기도의 거탄을 전선에 보내자”고 당부한 바 있다.

 

 

순교 신심은 우리에게 남은 숙제

 

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미사(1950년. 원산). 6·25전쟁 중 원산성당은 인민군 사령부로 쓰였다. 사진은 원산이 수복된 후 1950년 11월 2일에 원산성당에서 신자들이 미군들과 함께 전쟁 중에 희생된 이들을 위하여 위령미사를 바치고 있는 모습.

 

 

가톨릭대사전은 순교 신심에 대해서도 “순교 신심은 전투 참여와 살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도와줌과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을 보상하는 사회 심리적 기능을 주로 발휘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는 전쟁 발발 이후 첫 번째 발행한 신문(1950년 11월 10일자)에서 2면 2/3판을 털어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 순직의 주교 신부와 전재 교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전쟁 초기 납치 혹은 희생된 성직자들을 소개한 바 있다.

 

기사에는 교황대사관, 대구교구, 서울교구, 대전교구, 전주교구, 광주교구, 춘천교구의 순으로 성직자들의 피해상황이 나타나 있고 “피 뿌려 가르치신 그 정신 받들자”라는 부르짖음으로 ‘순교 신심’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그 생명을 버리느니라’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이번 전란 발생 후 신자들이 미처 피란할 시간도 없이 적의 침입을 받아 적의 수중에 들자 자기 혼자 양떼를 버리고 떠나오시기가 차마 애처로워 끝까지 착한 목자의 임무를 다하시고자 교회의 직무를 사수하시다 마침내 그 생명을 희생으로 버리시게 되고 혹은 적의 흉악한 수중에 납치당해가시는 변을 당하사 그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신 주교 신부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0일, 오혜민 기자]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④ 현대순교자 시복시성, 순교자의 땅


죽음의 행진 속에도 당당히 증거한 신앙

 

 

6·25 전쟁 중 폐허가 된 덕원수도원 성당(왼쪽).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는 분단의 아픔과 교회의 박해, 성모신심과 순교신심으로 다시 일어나는 의지와 신념을 배웠다. 한국전쟁은 이 외에도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숙제를 남겼다. 포화 속에서 교회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현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다.

 

 

이름 모를 한국전쟁 순교자들

 

가톨릭대사전에서 밝힌 ‘전쟁 전후 북한군에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은 덕원·함흥 79, 평양 17, 서울 31, 춘천 8, 대전 10, 광주 5명으로 150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인은 52명으로 150명이라는 총계의 약 1/3가량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당시의 특수상황 때문에 집계에 대한 어려움이 있을 뿐이지 한국전쟁으로 인한 순교자는 그 수가 더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부분이다.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는 1994년 월간 ‘사목’에서 “마지막 시기에 이뤄진 박해사에 대하여는 귀순자들의 일부 증언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내용을 거의 알 길이 없으며, 제2의 순교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북한의 자료를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이라고 밝힌바 있다.

 

북한교회가 ‘침묵의 교회’로 변해가는 과정 가운데 소련정과 미군정이 각각 들어선 당시 즉, 1945년부터 전쟁 전까지의 상황은 남한으로 건너온 피란민들에 의해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이후와 휴전 이후의 피해자들은 ‘죽음의 행진’을 걸었던 성직자와 수도자 외에 많은 사례를 수집하기 힘들고, 수집을 했다 하더라도 ‘행방불명’ 상태가 많으며, 북한교회의 순교상황은 더군다나 알 수 없다.

 

실제로 1950년 10월 북한공산군들은 각 처에 수감돼 있던 한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는데, 김봉식·유재옥·이광재 신부들 외에 황해도의 서기창 신부, 양덕환 신부, 전덕표 신부 등이 피살됐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김 마리안나 수녀와 김 안젤라 수녀 등도 매화동에서 공산당에게 학살됐는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원장인 장정온 수녀와 서 요셉피나 수녀는 공산군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명’돼 이후의 소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차기진 박사는 “이미 연길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행방불명된 사람들, 잘 알려지지 않은 평신도 희생자들을 더한다면 제2의 박해기 때 희생된 천주교인 수는 훨씬 많아질 것”이라며 “어느 증언에서는 남한에서 끌려가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이들의 수가 100여 명이 됐다고도 한다”고 말했다.

 

 

현대순교자들의 의미와 교회의 노력

 

1949년 덕원수도원 폐쇄 후 독일인 선교사들은 옥사하거나 총살당했고, 나머지는 북한 자강도 전천군의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됐다. 오른쪽 사진은 1954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가브리엘 프룀머 신부(무릎꿇은 이)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도착해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

 

 

발굴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가 더욱 필요한 한국전쟁 순교자들은 우리나라의 순교 명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박해의 칼날 아래서도 굴하지 않던 신앙선조들을 따라 북한공산군 앞에서 ‘내가 천주교 신부요, 수녀요’라고 당당히 밝혔던 한국전쟁 순교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에도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러한 순교신심은 살아남은 성직자와 평신도뿐 아니라 순교자들에게도 도움이 됐다. 전쟁 당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관구장이었던 베아트릭스 수녀는 공산군에게 잡혀 ‘죽음의 행진’ 대열에 속해가고 있을 때, 쉽게 걷기 위해 모두들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려야 했는데도 주머니 묵주와 주머니 칼, ‘사랑하는 한국 순교자들의 유해’는 지니고 갔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가 점진적으로 진행돼가고 있다는 점도 희망적이다. 지난해 12월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에서 ‘신상원·김치호와 동료순교자 38위 시복시성을 위한 예비심사 법정’이 열려 한국전쟁 순교자 첫 시복재판이 진행됐으며, 현재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박정일 주교)도 2009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 결정사항에 따라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를 맡고 있다. 서울대교구에서도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를 발족,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발굴하고 시복시성 대상으로 올리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다. 기도는 신앙선조가 시복시성 되도록 하는 첫 걸음이자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2008년 박정일 주교는 순교자성월 특강에서 “일제 강점기, 공산치하, 특히 한국전쟁 시 납치 학살된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와 정리도 시급하다”며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1고린토 9, 25)’이라는 말씀처럼 신자들이 순교영성의 전파자가 돼 생명의 화관을 얻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7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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