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평협ㅣ사목회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다: 한홍순 회장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66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다 ‘한홍순 회장’


공부하는 평신도가 되어야

 

 

2018년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설립 5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 지난 50년을 회상하는 한편, 앞으로의 50년을 전망하는 시간을 갖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지난 11월 14일 서울 명동에 자리한 가톨릭회관 5층 평협 사무실에서 한홍순 토마스 회장을 만났다. 그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제16대, 제17대 평협 회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위원, 주 교황청대사를 지낸 교육자이자 외교관답게 차분하면서도 조리있게 자신의 삶을 물 흐르듯 피력하였다.

 


* 세례를 받으신 계기와 이후의 변화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55년에 세례를 받았어요.(그는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다른 동년배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연도가 그렇게 되지요. 그때 돈암동 성당에 다녔는데, 본당신부님이 아일랜드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이셨어요. 돈암동 성당이 혜화동 성당에서 분당해서 얼마 안 됐는데, 돌아보면 상당한 은총을 베풀어주신 곳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1학년 말에 본당에 수녀원이 생겼는데, 그때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수녀님 두 분이 파견돼 오셨어요. 한 분이 독일분이셨는데, 북한 공산 치하에서 수도생활을 하다 쫓겨나셨다고 해요. 수용소 생활도 하셨고요. 나중에 독일이 교섭해서 본국으로 송환됐는데, 다시 한국으로 진출하신 거예요. 그 수녀님이 교리교사셨어요. 그분이 가르쳐주신 교리 내용이 지금까지 큰 힘이 되고 있어요. 기도법도 가르쳐주셨지요.

 

서울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되었는데, 처음으로 우리 본당으로 왔어요. 본당신부님이 아일랜드 분이라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고1 때 소년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레지오 마리애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뵙는 활동이라 겁날 게 없었어요. 대학교에 입학해서 본당의 성인 쁘레시디움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연령 기준이 만 18세라고 해서 기다렸다 들어갔어요. 그런데 서울 상대에는 가톨릭학생회가 없어서 서울고등학교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하던 이세환이라는 친구하고 둘이 학생과에 가서 학생부를 열람했어요. 2학년에서 손병두, 3학년에서 유열을 찾았지요. 유열 회장 다음에 손병두 회장, 그 다음에 제가 회장을 했어요.

 

우리가 활동할 때는 성경이 신약만 있었고, 구약이 없었어요. 구약이 낱권으로 나올 때여서 나올 때마다 사서 통독했어요. 해설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혼자보다 같이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본당에서 성경공부 클럽을 만들었어요. 바오로서원에 자주 가서 복음서 질문지 영어판을 제가 번역하고 등사해서 <복음연구 가이드>라는 제목을 붙여서 읽었어요. 대학 가톨릭학생회에서는 영어 성경 읽기를 했고요. 그 시절이 참 좋았어요.

 

대학 2, 3학년 무렵이 되자 공부가 하고 싶었고, 교수가 되고 싶었어요. 저는 경제학을 하고 싶었는데, 신앙을 접목한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 마침 광화문의 원서 파는 가게에서 새무엘슨이라는 경제학 교수가 쓴 『경제원론』이라는 입문서를 들쳐보다가 당시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에 대한 설명을 봤어요. 『Rerum Novarum』이라고 ‘새로운 사태’라고 번역하는 건데,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 교회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거예요.(이 문서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가톨릭교회는 자연의 재화와 은총의 보화가 인류의 공동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빈곤 구제 단체들을 설립 운영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직접 도와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톨릭에서 말하는 사회교리라는 것이 사회과학과 신앙이 함께 만나는 이상적인 분야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공부를 하기 위해 1966년에 예수회가 운영하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로 유학을 간 거예요. 거기서 사회교리를 체계적으로 수강하고,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1971년에 귀국했지요.

 

 

* 교회에서 봉사하시게 된 계기와 평협 회장으로서의 지향점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1983년에 청담동 본당 총회장을 했어요. 그리고 1984년도에 임기 5년인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요. 그러던 1986년에 동경에서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를 했는데, 1987년에 평신도라는 주제로 로마에서 개최되는 ‘제7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아시아 차원에서 준비한다는 성격이었어요. 아시아는 동아시아 · 남아시아 · 동남아시아 세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평협에서 제게 동아시아 평신도 대표로 그 회의에 다녀오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평협 대외협력분과위원회 부위원장 직책을 받아서 회의에 참석해서 그때부터 평협과 인연을 맺었지요. 본격적인 평협 활동은 1988년부터였어요. 박정운 회장이 선임되면서 도움을 청했거든요. 그 이후 손병두 회장이 서강대 총장으로 가면서 제가 2005년 8월부터 회장 직무대행으로 남은 임기를 하게 됐지요. 2006년 1월에 정기총회에서 정식으로 회장으로 선임되었고요.

 

저는 평협 회장직을 맡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1986년의 ‘아시아 주교회의연합회’도 그랬지만, 1987년에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가진 다음해에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문헌이 나왔어요. 그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현대화한 평신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볼 수 있어요. 1999년 ‘아시아 주교 시노드’ 이후에는 『아시아 교회』가 나왔고요. 전 세계에서 평신도에 대한 논의가 폭넓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가 세운 교회예요. 그러나 어떤 평신도냐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 신앙의 결과물은 행동이에요. ‘신앙은 액세서리가 아니다.’

 

저는 공부하는 평신도가 되는 데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회장으로 있을 때, 기회가 되는대로 세미나나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데 힘썼어요. 그리고 공의회예요. ‘공의회에 비추어 본 한국 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그래서 공의회 학교를 시작한 겁니다.(실제로 2007년 3월 9일부터 12월 4일까지 총 30강으로 이루어진 평신도학교 공의회 과정 교육에 50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이어 2009년 3월 9일부터 12월 14일까지 개설된 평신도학교 공의회 과정 교육에는 200여 명이 참석하여 68명이 수료하였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보편교회의 일환이지만, 이 땅에서 씨 뿌리고 꽃 피우고 열매 맺기 위한 한국적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공의회 정신이지요. 그래서 ‘우리성가 가사’ 공모를 시작했어요. 성가 가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작곡 공모를 했어요.(실제로 2006년 12월 8일에 제1회 우리성가 노랫말 공모에 100여 작품이 응모하여 5작품을 시상하였고, 2009년 11월 9-10일에는 명동 성당에서 서울대교구 성가 합창제를 열었다.) 심사위원은 평신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서 평신도 작곡가를 모셨는데, 나중에는 공모에 당선된 성직자도 한 분 들어오셨지요. 이렇게 우리성가에 신경을 쓴 데는 계기가 있었어요. 1995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세계 청년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마침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25주년 기념총회도 거기서 같이 열렸어요. 개막미사 전에 필리핀식의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참 잘하더라고요.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감탄하셨어요. 우리는 왜 저런 것이 없는지 돌아보게 됐지요. 우리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 땅에 우리 신앙의 토착화를 하는 데도 평신도의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평신도』 잡지도 소식지 형태로 제가 시작했거든요.

 

 

*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앞으로 평협이 나아갈 길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활발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더욱이 성직자와 수도자가 협력하는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러한 만큼 평신도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사명이 있어요. 신앙은 나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거예요. 그 이웃은 교회의 안과 밖에 있어요. 다시 말해 나는 세상에 나가면 교회의 사람이고, 교회에 들어오면 세상의 사람이지요. 이 말은 평신도가 세상과 교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인으로서의 나와 사회생활을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내가 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교회가 세상에 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에 세례를 주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는 말이에요. 이 그릇된 고리를 우리가 끊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공부, 그리고 내 신앙생활을 투철하게 하는 공부를 해야 하는 평신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을 봐서 하는 공부가 아니고요. 인간 사회의 발전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공부하는 그러한 평신도가 돼야 해요.

 

우리 평협이 나아가야 할 길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있잖아요. 그 단체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그 단체 자신이 그러한 양성의 장이 되어야 하고, 단체 구성원 각자가 교회와 인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해요. 세상의 복음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화되지 않아서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실천해 나가야 해요. 내 신앙과 내 사회생활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평신도, 2017년 겨울호(VOL.58), 대담 · 정리 김문태 편집위원]



1,29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