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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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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2 ㅣ No.85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 <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

 

 

국문 초록

 

지금까지 정약용과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논쟁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접근 방법과 달리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언급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자찬묘지명>의 내용에 대한 이해 역시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임을 말해준다는 긍정론과 이와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론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현재 부정론이 우세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자찬묘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남긴 두 개의 묘지명인 ‘광중본’과 ‘집중본’에서 천주교를 서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더 이상 천주교가 서학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종교로서 조선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천주교 박해의 정치적 원인을 밝혀주는 한편, 순교사 중심의 한국 천주교회사 이해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정약용이 이를 통해서 조선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관용책 내지 포용책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신처럼 반대파의 무고로 인하여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약용이 배교하면서 1796년에 작성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에서 천주교를 사교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던 양상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해 다시 달라진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체적으로 정약용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인 1820년대 무렵, 늦어도 1822년의 일로 파악된다.

 

 

1. 머리말

 

필자가 정약용을 제대로 만난 것은 대학 시절 실학연구입문 수업을 들을 때였다. 이광린 선생이 실학자들의 저술에 대한 강독을 통해서 정약용이 매우 논리적인 글쓰기를 한 훌륭한 학자였음을 강조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가 유배에서 돌아온 만년에 다시 천주교 신앙으로 돌아왔는가 하는 주제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사 측과 한문학 및 철학 등 다른 분야 연구자들과의 논쟁도 배우게 되었다. 이때 그가 관심을 가졌던 천주교 신앙의 내용이 어떠하였을까 하는 점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그를 직접 다루어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필자에게 정약용을 간접적으로 다루어볼 기회가 우연하게 다가왔다. 내포 지역의 사도로까지 불리는 이존창을 연구하면서 정약용이 그를 체포하는 데 실제로 관여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정약용의 참여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어 여전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지만,1) 필자는 그가 이존창의 체포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2) 이러한 점은 정약용의 사상과 활동에 대하여 연구자들이 무언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 이런 가운데 2012년 11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주최한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인 ‘다산 정약용과 서학 및 천주교와의 관계’에 참석하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3) 다 알다시피 다양한 분야를 매우 깊이 있게 섭렵한 정약용의 생애나 학문은 어느 한 연구자의 힘만으로는 쉽게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종합적인 정리를 하는 자리를 통해서 새로운 연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해 주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때 필자에게 정약용이 저술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의 한 구절이 인상 깊게 읽혀졌다. 다름 아니라 그가 천주교를 서교(西敎)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정약용이 만년에 이르러서 천주교를 단순히 서학(西學)이나, 사학(邪學)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것들과 구분되는 서교(西敎)라는 용어를 새롭게 사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전에는 그것이 단순하게 학(學)이었는데, 이제는 그에게 종교, 즉 교(敎)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필자가 무지한 탓이지만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와 관련해서 서교라는 용어는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4) 그러나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용어의 사용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필자에게 현재 논쟁 중인 정약용 만년의 천주교 신앙 여부에 대해 조그만 실마리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서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서교라고 언급할 정도로 정약용의 내면과 사상에 여전히 천주교는 우호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약용과 관련된 천주교 사료를 구체적으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를 다룬 기존의 연구에서 이들 사료가 미시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사료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시기별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5) 이 주제에 대해서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는 비로소 체계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돌아온 직후부터 심포지엄에 실린 논문들과 관련 참고 문헌들, 특히 사료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으며, 이번에 그 일부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드러낸 천주교 관련 내용들과 그 의미를 간단하게 정리해볼 것이다.

 

 

2. <자찬묘지명>에 대한 논쟁

 

정약용과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논쟁이 있다.6) 그러나 그 문제 모두를 다룰 능력은 필자에게 없다. 때문에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 언급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 언급된 천주교 관련 내용에 대한 논쟁은 그것이 여전히 천주교 신자임을 말해준다는 이른바 긍정론과 이와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론으로 나누어진다. 긍정론자인 최석우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다블뤼의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정약용을 언급한 내용을 <자찬묘지명>과 연결하여 이해하였다.7)

 

A 정약용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그는 늘 외딴방에 틀어박혀 소수의 친구밖에는 만나지 않았고, 속죄를 위해 자주 단식과 그 밖의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쇠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한국천주교회사》 및 《조선순교자비망기》).

 

B-① 나는 건륭 임오년에 태어나 지금 도광의 임오년을 만났으니 갑자가 한 바퀴를 돈 60년의 돌이다. 무엇으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횟수이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려 금년부터 정실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 명명(明命)을 살려서 나머지 인생을 끝마칠 것이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집중본(集中本).

 

B-② 나의 사람 됨됨이는 착한 일을 즐겨했고, 옛것을 좋아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런 지경에 이르는 화란을 당했으니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무릇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아주 많아 가슴속에 후회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이하여 한가롭게 세월 보내는 일을 그만두고, 아침저녁으로 성찰하는 일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간다 해도 큰 잘못은 없으리라.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광중본(壙中本).

 

최석우는 A와 B의 기록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A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약용이 철저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시기가 B에서 그가 회갑을 맞이한 1822년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과 이상하리만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주교 신앙만은 존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자찬묘지명>에서 언급된 정약용의 배교 사실과 다른 행동들까지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8) 정약용이 보여준 한때의 배교는 외적인 것이었고, 내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강요된 배교였으며, 강요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만년에 정약용은 다시 신을 선택하였는데, 이번에는 결코 강요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석우는 교회 측 자료에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가 유배에서 풀린 뒤 천주교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계속한 사실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연구자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은 교회 측 자료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사실이 정약용의 저술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 측 자료를 불신하기에 앞서 비판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9) 그리고 정약용의 저술에 대해서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단순한 논리이며, 그보다는 저술에 대한 내적 비판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10) 어떤 저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고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저자가 말한 것만이 아니라, 말하고자 한 것,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것 등까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적 비판의 기본자세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석우는 침묵의 논증이란 역사의 해석이론을 적용할 것을 바란다. 문헌상의 침묵으로부터 어떤 암시나 숨은 사실을 해석해내는 이러한 방법은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위험스런 해석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약용의 경우처럼 천주교에 대해 반대이든 찬성이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침묵이 암시하는 보다 깊은 뜻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석우는 정약용의 배교 기록을, 그가 나이가 들어 스스로 묘지명을 작성하면서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오해를 아직도 받고 있음을 한탄한 것 등에 볼 수 있듯이, 어쩔 수 없이 나온 불가피한 거짓 증언으로 파악하였다.

 

최석우의 문제 제기는 이후 정약용의 학문을 이해하고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주목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석우의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자찬묘지명>에 실린 내용 가운데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일부의 내용만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찬묘지명> 가운데에서 어떤 부분을 부인하고, 어떤 부분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이 한때 배교한 사실을 굳이 부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에서도 의문이 든다. 정약용의 배교는 여러 사실로서도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또한 한 사람의 신앙에서 시기별로 여러 변화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석우의 주장은 연구자들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었다. 이후 최석우의 견해에 대해 여러 비판이 나왔으며, 지금까지도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석우의 견해에 대한 집중적인 비판은 김상홍에 의해서 최근까지도 진행되고 있다.11) <자찬묘지명>에서 말하는 내용은 정약용과 천주교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부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그는 정약용이 천주교와 절의(絶義)한 후 다시는 신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료별 사안별 쟁점별로 나누어 밝혀왔다. <자찬묘지명>에 대한 최석우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해년(1791) 이래로 국가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지하자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광중본).

 

김상홍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자찬묘지명>을 비롯해서 정약용이 지은 여러 묘지명 자료들이 비본(秘本)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만일 이것이 공개되면 후손들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묘지명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결코 천주교도가 아니었는데도 억울하게 화를 당하였다고 누누이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그는 <자찬묘지명>은 거짓 증언이 아니라, 진실의 기록이자 양심선언서라고 말한다.

 

김상홍은 최석우가 제시한 B 사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자찬묘지명>을 정확히 해석해보면 정약용이 천주교를 다시 믿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자찬묘지명>에 결코 천주교를 다시 신봉하려는 다짐이나 신앙생활의 새 출발을 의미하는 내용이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석우가 인용한 B의 내용 모두는 천주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정약용이 회갑을 맞이하여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 여생을 유교주의적 삶으로 일관하고자 한 다짐일 뿐이라고 이해하였다. 즉 정약용이 유교적 삶을 실천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 및 회한을 통해서 앞으로 철저한 유교주의적 삶으로 일관하려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정약용이 유학자로서 죽고 기억되길 바란 인물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의 심증에 근거해서 <자찬묘지명>에 보이는 천주교 관련 내용 등을 거짓말로 규정하고, B를 바탕으로 정약용이 천주교를 다시 믿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라고 비판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정약용의 양심선언서인 <자찬묘지명>의 내용 중 천주교와 절의했다는 앞부분의 기록은 불신하고, 뒷부분은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상홍의 해석은 현재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자신은 “이 연구는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 다산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자평한다.12) 백민정 역시 최석우의 주장이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다면서 김상홍의 견해를 지지한다.13) 물론 연구자가 연구하는 사상가의 진정한 의도를 찾으려고 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일이나, 사상가 자신의 저서와 표현된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헌상의 침묵으로부터 어떤 암시나 숨은 사실을 해석해내려고 하는 방법 역시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위험스러운 해석 방법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약간은 복합적인 느낌을 주고 있지만, 원재연 또한 “이 같은 김상홍의 체계적 반론은 교회사를 전공하지 않는 비 천주교인으로서 현재까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또 반론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보여준 교회사에 대한 세밀한 관심에 대해서 경탄을 표한다. 김상홍 교수의 이러한 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교회사를 교회 안의 신자만의 특별한 역사로 취급해온 그간의 일반 역사학계의 관행과 인식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선구적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14)

 

그러나 김상홍의 이해 역시 그대로 따르기만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다. 교회 측 자료에서 말하는 내용을 그와 같이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기록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이란 워낙 생생하고 구체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것은 김상홍이 정약용이 남겼다고 하는 《조선복음전래사》를 그가 작성한 묘지명들과 연결시켜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15)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다블뤼의 사료 수집이란 그만의 노력이 아니라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신자들의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16)

 

정약용의 사상에 대한 기존의 많은 연구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김상홍의 견해처럼 정약용을 철저한 유교주의자로 일관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사실 최석우 역시 정약용의 이러한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17) 원재연도 지적하고 있듯이 정약용에게 천주교와 유교는 그의 회통적 사고 내에서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18) 물론 백민정은 김상홍의 천주교 입장에 대한 반론 작업이 서학의 영향만으로 정약용의 철학을 이해하던 기존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 점은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19)

 

그렇다고 해서 정약용의 사상에서 유학 이외의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백민정은 정약용 사상의 전체 규모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편력을 서학 혹은 유학 등의 어느 한 곳에 배속하려고 한 기존의 연구 경향을 지양하고, 더 나아가 동서 융합의 산물로 단순 기술해온 입장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보다 더 확대시키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새로운 안목의 체계 속에서 고대 유학, 주자학, 서학, 고증학, 훈고학, 양명학 등의 다양한 학문적 조류가 서로 충돌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지평을 그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정약용 철학의 면모를 제대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약용의 사상을 살필 때 천주교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유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역시 어느 한 부분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최근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을 단독으로 다룬 김형호의 연구가 천주교와 관련된 또 다른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20) 그 역시 정약용이 천주교가 아닌 정통 유학에 뿌리를 둔 경학자임을 강조한다. 그를 유학의 굴레 안에서 새로운 모색을 통해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 학문으로 나간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자찬묘지명>에 천주교와의 관련된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유교와 함께 천주교 역시 <자찬묘지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화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김형호는 <자찬묘지명>의 광중본과 집중본의 찬술 의도가 다르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천주교와 관련된 서술에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광중본에서는 천주교에 대해 연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는 달리, 집중본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집중본에서는 광중본에 보이는 정미년(1787) 이후 진산사건(1791) 사이에 대한 천주교 기록이 빠지고 대신 천주교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었다는 내용으로 기술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정약용이 천주교를 종교로써 빠져들고 신봉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특히 집중본에서는 광중본보다 천주교와 관련된 옥사에 대한 서술이 눈에 띄게 보강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달되는 의미상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사건의 전개 과정과 내역들이 내용상 더욱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집중본의 기술이 세밀해지고 사건에 일화가 추가되면서 전반적으로 광중본보다는 사건에 대한 정약용의 주관적 입장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중본은 신유박해의 시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광중본에 비해 서술에 있어서 전후 정황과 전개 과정에 대한 세부 묘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김형호는 이 시기에 있어서도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부정적이라는 점에서는 김상홍의 기본적인 관점과 공통적이다. 정약용이 천주교 문제에 대해 당당히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유로 연이어 발생한 옥사의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21)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과 동류를 모해하기 위해 증거 없이 벌어진 부정한 모함이었음을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옥사의 원인은 천주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약용이 포함된 ‘선류’(善類)를 제거하기 위해서 ‘악당’(惡黨) 혹은 악인이라고 표현되는 집단의 정치적 음모에 의하여 발생된 것으로 보았다. 즉 정약용이 천주교 문제를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형상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이러한 사건들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라기보다는 거짓 역모설, 즉 사화(士禍)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김형호에 의하여 시도된 <자찬묘지명> 집중본과 광중본에 대한 비교 검토는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넘어서 새로운 시도로 높이 평가된다. 비교 분석을 통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사료 비판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의 연구에서 <자찬묘지명>은 다루어진 빈도에 비해 간략한 인용에 그쳤으며, 필수적인 것이 아닌 부수적인 자료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 연구된 성과가 사실상 전무하다고까지 비판한다.22)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 언급된 천주교 관련 내용들은 보다 자세히 새롭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3. <자찬묘지명>의 천주교 관련 내용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두 개이다. 무덤에 함께 묻힐 묘지명인 광중본과 문집에 실을 묘지명인 집중본이 그것이다. 광중본은 1,015자이며, 집중본은 12,313자이다. 집중본은 광중본의 10배 이상의 분량일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은 《사암연보》에서 정약용이 회갑이 되던 해인 1822년에 <자찬묘지명>을 지었다고 전한다. 1818년 8월 오랜 유배 생활에서 벗어난 지 4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이것은 정약용이 집중본과 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회갑을 맞이하여 한평생을 돌아본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정약용이 왜 두 개의 묘지명을 만들었으며, 두 개의 묘지명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먼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이 문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에서는 광중본이 1차로 저술되고, 집중본이 2차로 계속해서 저술된 것으로 분석한다.23) 비슷한 시기 혹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같은 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집중본이 조선 후기 묘지명의 양식으로서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은 정약용이 집중본에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보았다. 즉 광중본에서 미처 달성하지 못한 찬술 목적이 집중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광중본과 같은 묘지명 양식을 채택하고 집중본을 새롭게 찬술한 것을 보면 1차적으로 광중본을 찬술하고 난 뒤에 그가 느낀 아쉬운 점이나, 거기에 수록하지 못한 내용들이 있어 집중본으로 보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천주교와 관련된 서술이 눈에 띄게 보강되었다고 말한다. 즉 집중본은 광중본에서 정약용이 자신의 생애를 전달하는데 천주교와 같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에 대해 상당 부분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집중본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서 광중본이 간략하게 다시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약용이 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고는 집 뒤 자(子)의 방향 쪽에다 널이 들어갈 광(壙)의 형태를 그어놓고, 나의 평생의 언행을 대략 기록하여 그 광 속에 넣을 묘지(??之誌)로 삼겠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라고 하여, 집중본이 오히려 광중본과 같은 기능을 하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집중본을 자신의 무덤 속에 함께 넣을 묘지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광중본에서는 그러한 설명 없이 “묘는 집 뒤 자(子)의 방향 언덕에 정해 두었으니 오래전부터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곳이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정약용이 처음에 집중본을 저술할 때 이를 무덤에 넣을 묘지명으로 생각하고 저술한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약용이 집중본을 완성하고 나서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무덤 속에 넣을 묘지명으로 삼기 위해서 저술하기 시작한 집중본의 분량이 너무 커졌던 것이다. 그만큼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 자신의 일생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집중본에 <보유>(補遺)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중본에 빠진 내용을 추가로 보충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정약용은 이를 문집에 넣을 집중본으로 설정하고, 새로이 광중본을 저술하였을 것이다. 광중본은 집중본을 통해서 자신의 일생을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당시의 일반 관례에 맞추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광중본에는 그가 꼭 무덤까지 함께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들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집중본과 광중본의 두 가지 종류가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듯이24)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를 이른바 비본(秘本)으로 삼으려고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인 집중본과 광중본은 어떠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이 두 개의 묘지명에서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집중본의 천주교 관련 내용

 

집중본은 연대기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집중본은 정약용의 자서전, 즉 개인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정약용은 집중본의 첫 부분에서 그가 이가환과 이승훈과 함께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공부한 사실을 먼저 말한다. 그의 학통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천주교 서적을 읽게 된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갑진년(1784)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관련되는 책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공부에 전념하고 있어, 거기에 참으로 마음을 기울일 겨를을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다음 정약용은 이기경과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집중본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정약용이 신해년부터 이기경의 활동을 크게 지목한 것은 아마도 천주교 박해가 그에게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기경 역시 천주교 서적을 읽는 것을 즐겨 하였는데, 그가 무신년(1788)부터 천주교에 대한 다른 마음을 먹게 되면서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해박해(1791)를 매우 간단하게 언급한 다음 그와 이기경의 대립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호남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옥사가 있자, 악인(惡人) 홍낙안 등이 공모하여 이를 기회로 자신을 포함한 착한 무리들, 즉 선류(善類)를 다 제거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신해박해 자체보다 여기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그는 천주교 박해가 정치세력 상호 간의 대립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가 목만중과 홍낙안, 이기경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는 가운데 이승훈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정약용과 이기경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천주교 서적을 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천주교에서 멀어진 이기경은 자신을 예외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약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에다가 이승훈은 이기경이 자신을 무고했다고 주장하면서 감옥에서 풀려나고, 이승훈의 처벌을 주장한 이기경이 오히려 유배를 가게 되자 이기경과 정약용의 관계가 틀어져 원한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이기경은 그가 주모한 신유박해 때까지 기어코 정약용을 죽여 없애려고 했던 것으로 정리된다.

 

집중본에서 천주교의 문제는 을묘년(1795) 4월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부터 다시 서술된다. 을묘박해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것으로 그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목만중 등이 이 사건을 트집 삼아 자신을 비롯한 선류들을 다시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정약전까지 언급된다. 정조는 조야(朝野)에서 이런 소문을 얻은 것은 결국 정약용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금정찰방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이 이미 천주교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증명해줄 것을 바라는 정조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금정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는 역졸을 비롯한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을 권고하면서 회유하였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천주교의 확산을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정약용은 내포의 사도로 불린 이존창의 체포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과 무관함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정조가 정약용이 이존창의 체포에 공로가 있는 것으로 정리하여 다시 그를 서울로 불러올리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아무리 다시 벼슬길에 오르고 싶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일찍이 계책을 내거나 세운 적이 없는데, 지금 이존창을 잡은 일을 과장하여 임금의 은혜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중본은 내포 지역에서 정약용의 활동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병진년(1796)에 이르면 정약용은 집중본에서 매우 놀랄만한 발언을 전해주고 있다. 이해 6월에 그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동부승지로서 그는 집중본의 처음과 달리 자신과 천주교의 관계를 새롭게 말하고 있다. 자신이 단순히 천주교 서적을 보는 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대개 일찍이 마음으로 흔연히 좋아하고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거론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 심술에도 일찍이 기름이 배어들고 물이 스며들며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우거지듯 하였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이 담긴 소(疏)를 올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가 당시까지도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비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정조가 자신이 올린 소를 통해서 자신이 천주교로부터 이미 멀어진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는 무오년(1798)에 들어오면 정약용은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과 그의 형인 정약종을 논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헌부의 대신인 민명혁이 정약용이 혐의를 무릅쓰고 벼슬살이를 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정약용이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더니 한 달이 넘어서야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들어오면 서얼 조화진이 이가환과 정약용 등이 여전히 음으로 천주교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영익이 그의 심복이라는 것이다. 정조는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를 고발한 인물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하며 정약용에 대한 무고로 이해하였다. 이에 경신년(1800)이 되자 정약용은 자신을 참소하고 시기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그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정약용은 이러한 비난을 피할 방도를 계속해서 모색하게 된다. 그만큼 천주교와의 관계가 끝까지 그를 따라다닌 것이다.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자 정약용은 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을 미워하던 악당이 더욱 날뛰며 날마다 유언비어와 위태로운 말을 지어내어 듣는 사람들을 의혹케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가환 등이 장차 난을 일으켜 4흉, 8적을 제거하려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가환과 반대되는 정치세력만이 아니라, 당시의 재상들과 명사들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이에 정약용은 화색(禍色)이 일어날 징조가 날로 급해짐을 헤아리면서 다시 낙향을 선택하고 말았다고 한다.

 

정약용은 1801년 1월에 일어난 책 궤짝, 이른바 책롱(冊籠)사건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천주교 서적 및 성물이 담겨 있던 책 궤짝 안에 5~6인의 문서가 혼잡해서 들어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약용 집안의 편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윤행임 등이 그 상황을 알고서 정약용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먼저 체포되어 심문받으면서 화봉(禍鋒)을 누그러뜨린 다음,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중본은 2월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자세히 언급한다. 2월 8일에 양사(兩司)가 계를 올려 이가환 · 정약용 · 이승훈을 국문하기를 청하여 모두 하옥되었다. 그리고 그의 형인 정약전 · 정약종 및 이기양 · 권철신 · 오석충 · 홍낙민 · 김건순 · 김백순 등도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정약용의 경우 누명을 명백하게 벗겨줄 만한 증거가 많았기 때문에 곧바로 형틀에서 풀려나 사헌부 안에서 편하게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신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석방할 것을 의논했음도 알려준다. 그러나 정약용의 암행어사 시절 악연을 맺었던 서용보만이 고집을 부려서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때 정약용을 미워한 악당들은 정약용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 흐트러진 문서 더미 가운데에서 삼구(三仇)의 설을 찾아내어 억지로 정씨(丁氏)의 집문서로 정하고, 또 모함하여 드디어 정약종에게 사형이라는 극률(極律)을 가하고 정약용으로 하여금 재기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정약용은 삼구(三仇)의 설은 이미 안정복의 저서에도 있기 때문에 역시 무고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홍낙안과 이기경 등이 온갖 계책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정약용 등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면서 그를 반드시 죽이고야 그만두려 하였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홍낙안이 “천 사람을 죽이더라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죽이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말한 사실까지 전하고 있다. 그를 함께 모함했던 박장설이 “그가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죽이겠소”고 한 말까지 알려준다. 이 역시 정약용이 황사영과 무관하다고 주장한 여러 사람의 도움 속에 이루어진 일임을 자세히 말한다.

 

이때 정약용이 황사영을 역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다른 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듯이 황사영이 추구한 서양 선박 요청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25) 이는 황사영이 <백서>를 통해서 정약용을 배교자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약용은 강진현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약용은 강진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아걸고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술년(1802) 여름에 현감 이안묵이 다시 하찮은 일로 무고하였지만, 사실이 아니어서 곧 중지된 사실도 말하고 있다.

 

한편 집중본의 보유에서는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의 일을 소개한다. 무인년(1818) 가을에 그가 살아 돌아오자 목만중의 손자인 목태석이 그에 관해서 그와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혹독하게 상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할아버지인 목만중은 정약용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스스로 천주교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그 손자인 목태석은 “나가서는 여전히 (천주교를 : 필자 주) 추종하며 따라다니며 스스로 잘못을 고칠 생각을 않고 있다”고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독설을 퍼붓는단 말인가 하며 반문하고 있다.

 

2) 광중본의 천주교 관련 내용

 

광중본은 집중본과 달리 연대기적인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천주교 관련 부분도 역시 그러한데, 비교적 간단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역시 정약용은 이가환 및 이승훈과 함께 이익의 학문을 공부하였음을 먼저 말하고 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에 대해서 광중본은 집중본과 달리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다. 천주교 서적을 본 시기를 정약용이 결혼한 1776년 이후부터 1787년 이전 사이의 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광중본에서는 정미년(1787)을 그의 천주교 신앙에서 또 다른 분기점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1787년과 가까운 시기로만 추측하게 하고 있다.

 

광중본은 집중본과 달리 그가 독실한 신자가 된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정미년부터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도 4~5년 동안이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집중본에서 처음과 달리 동부승지로서 소를 올린 시기에 그러한 사정을 언급하고 있는 점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집중본에서는 이기경이 그다음 해인 무신년에 천주교와 갈라섰다고 말한 것과도 비교가 된다고 하겠다. 이를 집중본의 내용과 연결하여 보면 정약용이 1784년 천주교 서적을 읽게 되었지만, 그가 열심한 신자가 된 시기는 1787년으로 이해된다. 무덤에 함께 묻힐 묘지명인 광중본에서 정약용이 한때 독실한 신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이 의미가 있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그가 천주교에서 멀어진 시기는 광중본과 집중본 모두 신해년(1791)으로 공통적이다. 집중본과 달리 광중본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신해년 이후로 국가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지하자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가 배교한 사실 역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가 배교한 시기인 을묘년(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 사람인 주문모 신부가 오자 국내가 흉흉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그가 금정도 찰방으로 쫓겨났다고 말하고 있을 뿐, 그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회유한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다. 이점 역시 집중본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광중본 역시 집중본과 마찬가지로 신유박해를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집중본에서는 1799년에 처음 언급된 민명혁이 이때 등장한다. 집중본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상소를 올렸다고 기록한 것과 달리, 광중본에서는 이때 사헌부의 민명혁이 상소하여 발생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광중본은 이때 정약용이 투옥된 사실과 그의 형제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과정을 집중본과 달리 매우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역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언급된다. 황사영을 역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두 기록 모두 동일하다. 나머지 내용은 집중본을 축약한 것과 같다. 홍낙안, 이기경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으며, 결국 강진현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B에 언급되었듯이 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에 대해 “그의 사람 됨됨이는 착한 일을 즐겨 했고, 행동을 실천하는 데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런 지경에 이르는 화란을 당했으니 운명이었다고나 할까”라고 하며, 자신이 천주교와의 관련 때문에 겪은 여러 어려움을 운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시 그에 대한 박해를 집중본과 마찬가지로 화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공통적인 사실이다.

 

 

4. <자찬묘지명>의 새로운 이해

 

그러면 정약용이 두 개의 묘지명을 통해서 서술한 천주교 관련 내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일부의 내용에 주목하여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그칠 사항은 아닌 것이다. <자찬묘지명>이 정약용이 회갑이 되던 해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정약용 만년의 천주교 이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집중본과 광중본의 차이

 

우선 두 개의 묘지명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가 변화되었는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계속해서 이 문제를 다루어보자. 먼저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집중본에서는 그와 천주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26) 1784년 그와 이벽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천주교를 듣고 관련 서적을 읽었다는 사실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공부에 바빠서 더 이상 관심을 쏟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1796년에 자신이 동부승지로서 소를 올린 내용을 소개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가 단순히 천주교 서적을 본 것만이 아니라, 이를 즐겁게 사모하였으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소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정약용에게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은 광중본에서 1787년 이후 4~5년 동안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과 일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중본에서는 집중본과 달리 이러한 사실을 내용의 첫 부분에서 바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무덤에 함께 묻힐 광중본을 통해서 정약용은 그가 한때 천주교 신자였으며, 매우 열심히 믿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정약용이 지은 <정약전 묘지명>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C-① 일찍이 이벽을 따라 놀며 역수(曆數)의 학문에 대하여 듣고 《기하원본》을 연구하여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파헤쳐 신교(新敎)의 설을 듣고서 기뻐하였으나 몸으로는 믿지 않았다.

 

C-② 갑진년(1784) 4월 보름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는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 속에서 천지조화의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 등을 듣고 황홀함과 놀람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해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라는 것과 비슷했다. 서울에 온 후 이벽을 따라다니다 《천주실의》와 《칠극》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흔쾌하게 그쪽으로 기울어 버리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이벽을 처음 만났을 때 천주교를 듣고 기뻐하였으나 몸으로 믿지는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기록에서는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면서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집중본과 광중본의 두 내용을 뒤섞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때 광중본에서는 경심(傾心 - 마음을 기울였다)으로, C-②에서는 경향(傾響 - 울림에 기울었다)이라고 하여 표현상의 차이도 보여주고 있다. 즉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정도일 뿐이지, 광중본처럼 자못 마음을 기울여서 몰두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광중본은 자신이 천주교 신앙을 가졌고, 포기한 시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정약용이 광중본을 통해서 그의 신앙고백까지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묘지명 사이에서도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집중본과 광중본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정약용이 당시 천주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집중본에서는 정약용이 천주교에 한때 기울어진 사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것과 달리, 신해박해 이후 정약용이 천주교와 멀어진 사정을 계속해서 끝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본에 실린 보유의 내용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정약용은 목태석의 말을 빌어서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에도 여전히 천주교를 추종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따라다닌다고 지목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정약용 스스로 그 무렵까지도 천주교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 이러한 측면을 더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달리 광중본에서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그가 천주교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교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독실한 신자였다는 것과 배교하였다는 사실을 함께 소개하는 극과 극의 표현 방식임을 보여준다. 이때에도 <정약전 묘지명>과 비교할 때 내용상에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는 제사지내는 일을 폐해버린다는 설이 없었는데, 신해년(1791) 겨울 이후로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더욱 엄중해지자 한계가 드디어 구별되어 버렸다.

 

정약용은 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자신이 그렇게 된 사정을 <자찬묘지명>을 통해서는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집중본을 보면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임명되어 천주교 신자들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한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그가 왜 배교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보다 주목되어도 좋을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천주교에 대한 정약용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배교 이후 정약용과 천주교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배교를 강조한 광중본에서 배교한 사실과 관련되는 내용을 거의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또 다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때 정약용은 그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문제로 금정찰방으로 쫓겨났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무고를 받아 장기현을 거쳐, 강진현으로 유배를 갔다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자찬묘지명>을 쓸 당시 정약용의 내면세계가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2) 서교라는 용어의 사용

 

집중본의 보유에서 목태석의 상소가 언급된 것은 1818년의 일이었다. 이때까지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집중본에서는 1819년과 1820년의 일을 더 말하고 있다. 1820년에 들어와서는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는 기록까지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묘지명을 쓴 1822년의 시기와 관련된 부분이다. A에 인용된 교회 측 자료에서는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즉 1820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천주교 진리가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18년 이후, 특히 1820년부터 1822년까지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련된 그의 입장에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는 <자찬묘지명>에 보이는 천주교 관련 용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천주교를 일관되게 서교(西敎)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종교라는 것이다. C-① 기록인 <정약전 묘지명>을 통해서 정약용은 천주교를 ‘신교’(新敎)라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기존의 종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라는 것이다. 이때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유학을 종교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학’(學)으로만 기록하고 있는 것과 커다란 차이가 나는 용어의 사용이다.27)

 

기존의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서학 안에 천주교를 포함해 이해하여 왔다.28) 서학이란 ‘이’(理)적 측면의 서학, 즉 천주교와 ‘기’(器)적 측면의 서학, 다시 말하면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서로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서학 속에 그렇게 모두를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서학과 서교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정약용은 천주교 서적은 서서(西書)라고 말한다. 이 역시 일반적으로 ‘한역서학서’라고 표현되고 이해되는 것과도 차이가 나는 사실이다.

 

천주교를 서학이 아니라 서교로 서술한 것은 정약용의 한국 천주교회사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C-①에서 천주교를 신교로 파악할 때 언급된 이벽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정약용은 이벽이 서교, 즉 천주교를 선교한 최초의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권철신 묘지명>을 통해 정약용은 1784년 이벽이 맨 먼저 서교를 선전하기 시작하자 따르던 사람이 많았다고 말한다. 또한 <이가환 묘지명>을 통해서 1784년 겨울에 자신의 죽은 친구인 이벽이 수표교에 살면서 처음으로 서교를 선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1784년에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학문이 아니라 종교로서 처음 믿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이벽이 천주교를 선교함으로써 서학과 서교가 서로 구분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29)

 

사실 정약용은 거의 대부분의 묘지명에서 이러한 서술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마테오 리치의 구분과도 바로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서광계는 문도(問道)로 인하여 서학(西學)하게 되었는데, 이지조는 서학을 사모하다가 서교(西敎)를 따르게 되었다.30)

 

마테오 리치 역시 서학과 서교를 구분하고 있다. 서학을 사모한 결과로 서교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서학의 시대와 서교의 시대는 서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천주교를 서교로 기록한 것은 그 이전 시기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가 1796년에 작성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辯訪辭同副承旨疏)와 <자찬묘지명>과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는 <자찬묘지명>을 작성할 때 정약용의 천주교 이해가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집중본에서 수천 자라고 소개될 정도로 이 글은 긴 분량인데,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는 자신이 한때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일부 내용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내용은 그것과 방향이 크게 다르다. 여기에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적극 비판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D 신이 이 책을 본 것은 대개 약관(弱冠) 초기였는데, 이때에 원래 일종의 풍조가 있어, 능히 천문(天文)의 역상가(曆象家)와 농정(農政)의 수리기(水利器)와 측량(測量)의 추험법(推驗法)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세속에서 서로 전하면서 이를 가리켜 해박하다 하였는데, 신은 그때 어렸으므로 그윽이 혼자서 이것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력(性力)이 조솔(躁率)하여 무릇 어렵고 깊고 교묘하고 세밀한 것에 속하는 글은, 본래 세심하게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조박(糟粕)과 영향(影響)을 끝내 얻은 것이 없고, 도리어 사생설(死生說)에 얽히고, 극벌의 경계[克伐之誡]에 귀를 기울이고, 이기(離奇 : 비뚤어진 것을 가리킴)하고 변박(辯博)한 글에 현혹되어,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로 인식하고, 문원(文垣)의 기이한 감상(鑑賞)으로 보아, 남들과 담론할 때는 기휘한 바가 없었고, 남들이 배격하는 것을 보면 과루(寡陋)해서인가 의심하였으니, 그 본의를 따져보면 대체로 이문(異聞)을 넓히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동안 뜻하고 종사한 것이 영달에만 있어서, 태학(太學)에 들어온 후로 오로지 뜻을 전일하게 한 것은 곧 공령학(功令學 : 科文)으로, 월과(月課)와 순시(旬試)에 응시하기를 새매가 먹이를 잡으려 듯이 정신을 쏟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이러한 기미(氣味)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벼슬길에 나아간 후로 어찌 방외(方外)에 마음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해가 오래고 깊어갈수록 마침내 다시는 마음속에 왕래하지 않아서 막연히 지나간 먼지와 그림자처럼 느꼈는데, 어찌 그 명목(名目)을 한 번 세워 청탁(淸濁)을 분별하지 못하고서 고지식하게 지금껏 벗어나지 못하였겠습니까. 허명만 사모하다가 실화(實禍)를 받는다는 것은 신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 책 속에 윤상(倫常)을 상하고 천리(天理)에 거슬리는 말은 진실로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또한 감히 전하의 귀를 더럽힐 수 없으나, 제사(祭祀)를 폐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옛날 그 책에서 또한 본 적이 없습니다. 갈백(葛伯)이 다시 태어났으니, 시달(豺獺)도 놀랄 것입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리가 미처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뼈가 떨려서 난맹(亂萌)을 배척하여 끊어버리지 않고, 홍수가 언덕을 넘고 열화(烈火)가 벌판을 태우듯 성하게 하겠습니까.

 

신해(辛亥)의 변(變)이 불행히 근래에 나왔으니, 신은 이 일이 있은 이래로, 분개하고 상통(傷痛)하여 마음속에 맹세해서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성토하기를 흉역(兇逆)같이 하였는데,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가 자명해졌으므로, 전일에 일찍이 흠모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하나도 허황하고 괴이하고 망령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사생의 말은 불씨(佛氏)가 만든 공포령(恐怖令)이고, 이른바 극벌의 경계[克伐之誡]는 도가(道家)의 욕화(慾火)를 없애라는 것이고, 그 이기하고 변박하다는 글은 패가(稗家) 소품(小品)의 지류(支流)에 불과한 것이니, 이 밖에 하늘을 거역하고 귀신을 경멸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문인(文人)에 전겸익(錢謙益) · 담원춘(譚元春) · 고염무(顧炎武) · 장정옥(張廷玉) 같은 무리는 일찍이 그 허위를 밝히고 그 두뇌(頭腦)를 벽파(劈破)하였는데도 어리석게 알지 못하여 잘못 미혹됨을 받았으니, 이는 모두 어린 나이로 고루 과문한 소치였습니다.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워하고 분하게 여기며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마음은 명백하여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속이고 숨기겠습니까. 신이 마땅히 위벌(威罰)을 당해야 할 일은 실지로 8~9년 전에 있었는데, 다행히 전하의 비호하심을 입어서 유사(有司)의 형장(刑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죄가 있었지만 처벌받지 않아 무거운 짐을 등에 진 것 같았던 바, 이어 재작년 7월에 특별히 성지(聖旨)를 받고 호우(湖郵)의 금정찰방(金井察訪)로 보직되었지만, 오히려 늦은 것입니다.

 

<자찬묘지명>의 어느 곳에서도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내용 모두를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거의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한때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용서를 계속해서 받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정약용의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에서는 <자찬묘지명>에서 천주교를 일관되게 서교로 표현되는 것과 다르게 기록되고 있다. 이는 당시 정약용의 천주교 이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31)

 

E-① 신은 이른바 서양사설(西洋邪說)에 대하여 일찍이 그 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책을 본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으려고 ‘책을 보았다’[看書]고 한 것이지, 참으로 책만 보고 멈춰버렸다면 어찌 죄라고 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마음속에 기뻐서 즐거워(마음으로 흔연히 좋아하고) 사모하듯 하였고, 처음부터 치켜세우며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본바탕에 처음부터 기름이 엉키고 물들고 뿌리박고 가지가 얽혀 있듯이 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E-② 더구나 신이 부임한 지방은 곧 사설(邪說)이 그르친 지방으로서, 어리석은 백성이 현혹(眩惑)되어 진실로 돌이킬 줄 모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관찰사(觀察使)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수색해서 체포할 방법을 강구하여 그 숨은 자를 적발하고 화복(禍福)의 의리를 일깨워주어, 그들이 의심하고 겁내는 것을 효유(曉諭)하고, 척사(斥邪)하는 계(?)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제사를 권하고, 사교(邪敎)를 믿는 여자를 잡아다가 그들에게 혼인을 하도록 하고, 다시 일향(一鄕)의 착한 선비를 구해서 서로 더불어 질의하고 논란하여 성현의 글을 강론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생각하건대, 신이 한 일이 자못 진보가 있었으니, 스스로 다행스럽고 기쁘게 여깁니다. 이것이 누구의 은혜이겠습니까.

 

E-①은 집중본에서 인용된 부분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집중본에서 생략된 그 앞부분에서 천주교를 서양사설(西洋邪說)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E-②를 보면 바로 직전 역임한 금정에서의 활동을 기록할 때에도 정약용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그것은 반대파들이 자신을 모함할 때에도 그들의 표현대로 천주교를 사교로 인용하였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찬묘지명>의 서술 방식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금정은 홍주에 있는 곳으로 대부분 서교를 믿고 있었다. 임금께서 나로 하여금 잘 회유시켜 금지시키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내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호족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을 거듭거듭 설명해주고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하였더니 사림들이 듣고는 사태를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들 했었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 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는데 홍낙안 등이 이 사건을 핑계 삼아 착한 무리들을 모두 제거해버릴 것을 꾀하려고 하여 번옹(채제공 : 필자 주)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총명한 재주와 지혜로 드러내는 관료와 선비들의 열 명 중 7, 8명은 모두가 서교에 빠져 앞으로 황건 · 백련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자찬묘지명>에서는 모두 서교로 고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본과 광중본은 공통적이다. 이기경이나 홍낙안 등 정약용을 천주교와 연결시켜 죽이려고 한 사람의 활동에서 언급되는 내용까지도 모두 서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796년에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를 작성할 때와 <자찬묘지명>을 기록할 때 정약용의 천주교관이 변화된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기에 충분한 것으로 생각된다.32) 즉 정약용의 사상에서 확인되는 새로운 변화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33)

 

정약용이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해 달라진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1820년대 무렵에는, 늦어도 1822년에 들어와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34)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그러한 변화를 자신의 자서전적 역사서인 묘지명을 통해서 밝혀두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정약용의 천주교 이해와 관련해서 <자찬묘지명>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정약용이 처음 천주교를 믿었던 당시의 천주교 이해와 그대로 일치시켜 볼 수 있는지는 곧바로 파악할 수는 없다.

 

3) 천주교 박해의 원인에 대한 이해

 

정약용이 천주교를 사교 혹은 사설로 이해하지 않고 서교로 이해한 것은 천주교 박해를 이해하는 정약용의 관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처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난 것은 바로 제사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정약전 묘지명>과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천주교 박해의 원인으로 이 문제를 더 이상 천착하지 않고 있다. 집중본에서는 정약용의 금정에서의 활동과 관련해서 제사 지내기를 권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었으며, 광중본에서는 그냥 금령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찬묘지명> 집중본에서는 그보다는 천주교 서적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의 문제와 연결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이기경이 성균관에서 천주교 서적을 보았다는 사실을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때 천주교를 듣기를 즐겨 하면서 그 서적을 베껴놓기까지 한 인물이 그렇게 한 것이다. C-②에 보이듯 천주교 서적에서 담고 있는 내용의 옳고 그름이 논의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은 집중본에 인용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의 내용에서처럼 단순히 그것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느냐, 아니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신유박해 때 위관(委官)이 정약용에게 “무릇 서서(西書)의 글자 하나라도 읽은 사람은 죽음이 있을 뿐 살아날 수는 없다”라고 한 말에서 그러한 논의의 심각성과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접근이라는 것이 정약용의 입장이었다. 집중본에서 이기경의 입을 빌어서 천주교 서적에 좋은 내용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상적 자유 혹은 학문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D에 언급되고 있듯이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일종의 풍조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이문(異聞)을 넓힐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를 제한시킨다면 견문을 넓힐 기회가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정약용은 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공부가 가능했던 것은 정조가 “궁중 내부에 있는 모든 비장된 서적은 담당관의 허가가 있어야 볼 수 있는데, 보겠다고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비장된 서적 안에는 서양 서적도 물론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책들과의 만남까지 가능한 시대적 조건이 그의 학문을 발전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약용이 지은 <이가환 묘지명>에도 자세히 나온다. 천주교 서적에 대한 비판이 최헌중처럼 서학에 대한 비판까지 이어지자, 사람들에게 서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공(이기환)을 시켜 책을 만들어 수리(數理)와 역상(曆象)의 원리를 밝히고자 하여, 장차 연경에서 책을 사오게 하려고 친필로 자문을 구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시속의 무리들이 식견이 워낙 어두워 수리가 어떤 학문인지, 교법(敎法)이 어떤 법술인지를 알지 못하고 혼동하여 꾸짖고 호통을 치는데, 이 책을 편찬한다면 저에게 더욱 비방의 소리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장차 위로 성덕(聖德)에 누를 끼칠 것입니다”하며 이 일을 중단했다. 임금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조의 입장은 다른 것이었다. 정조는 서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일행의 학문도 사학(邪學)으로 몰아붙이고 일행의 역법까지도 또한 서법(西法)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는 말인가. 유식한 선비들이니 어디 더 변명해 보아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서양의 책이 우리나라에 나타나기는 수백 년이 된다. 사고(史庫)나 옥당의 옛 장서에 소장된 것도 몇십 권만이 아니며, 연전에도 특별히 명령하여 구입하도록 했었다. 이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은 이로 보면 알 수 있다. 옛날 정승인 충문공 이이명의 문집에도 서양인 소림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법서(法書)를 구해보았던 것이다.

 

라고 하여, 조선에서 서양 서적을 읽은 것이 오래되었으며, 이이명과 소림대, 즉 포르투갈 신부인 수아레즈와의35) 교류까지 이루어진 것을 설명하였다.

 

때문에 정약용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1791년 신헌조가 올린 상소 가운데에서 “겉으로는 정통사상을 보호한다 하고는 속으로는 남을 모함할 계략을 꾸민 것”이라는 내용을 인용하여 비판하였다. 즉 유교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천주교와 관련된 것도 아니며 남을 모함할 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거기에는 서학과 서교를 엄밀히 구분하기도 어려운 실정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풍속을 교정하는 데 형벌만 사용하는 것은 가장 저급한 수단인데 더구나 천주교를 막는 데 있어서”라고까지 말하고 있다.36)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에게 형벌을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천주교 서적이나 교리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적인 인간관계 혹은 당파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을 계속해서 설명하였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천주교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낸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를 끝까지 죽이려고 한 이기경과의 관계가 그러하였다. 그것은 서용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이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직권 남용을 적발하였는데, 그러한 악연이 신유박해 때나 그 이후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조화진의 경우에도 자신이 한영익과 혼인을 맺지 못하고, 한영익이 정약용의 서제와 혼인을 하자 그에 대한 원망으로 정약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박해가 일어난 것은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이들의 모함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정약용과 이들 인물과의 관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집중본에서 이기경이 정약용에게 원한을 품게 되자 정약용은 “우리 당(吾黨)의 화란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라”고 예견하였듯이 당파의 문제였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의 실상이 당파의 문제라는 사실은 정약용이 저술한 <이가환 묘지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미년 여름(1779) 내가 정헌(貞軒 - 이가환)에 들렀을 때 공이 쓸쓸하고 맥이 없는 듯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말하기를 “당파싸움 하는 무리들이 천 냥의 돈으로 나를 사겠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라고 하였다. 내가 “대감께서 천 냥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5백 냥도 못되겠습니다그려”라고 했다.

 

한두 명의 음흉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주둥아리를 놀려 10년이 넘도록 유언비어로 선동하고 현혹시켜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귀에 익도록 해놓았으니 정권 사람들이 무얼 알았겠는가. 평소에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만 익히 알고 있다가 이때(신유박해 : 필자 주)에 이르러 죽였을 뿐이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란 종교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개인 관계에서라기보다는 이와 같이 당파의 문제와 연결되어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정약용은 자신이 포함된 세력을 선류(善類)로,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을 악당 혹은 악인들로 대비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연구에서도 이미 잘 지적되고 있는데,37) 악인 혹은 악당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착한 무리를 모두 제거해 버릴 것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반대세력의 인물들이 정약용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한 부분도 지적하고 있다. 목만중을 비롯한 악당들이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이가환과 이승훈을 선동하고 뜬소문을 퍼뜨리고, 이 사건을 트집을 잡아서 착한 무리들을 완전히 구렁텅이에 넣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신유박해 때에 이르기까지 황사영 백서 사건을 포함해서 그가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세력들은 그를 끝까지 죽이려고 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목만중의 손자가 지독한 상소를 하였다는 것을 소개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박해의 본질이 천주교와 무관한, 무고한 억울한 사람들의 희생이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때 정약용이 다른 묘지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듯이 포함된 이들 ‘선류’ 안에는 천주교 신자였던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약용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였느냐 아니었느냐는 사실을 넘어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정약용은 이벽을 벗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때문에 정약용은 이들과 맺은 학문적 및 우정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다른 묘지명의 저술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관련해서 역사상에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을 올바르게 복원시켜주려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서로 다르더라도 공존하면서 함께 살아갈 것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이기경과의 갈등 이후 정약용이 그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기경이 유배를 가게 되자, 때때로 이기경의 집에 찾아가서 어린 자식들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이기경의 어머니 제사 때에는 금전적으로 도와주기도 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를 설득하여 그를 다시 석방하도록 하였다. 이후 다시 이기경이 벼슬하게 되었지만 아는 친구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자, 정약용만이 홀로 그에게 안부와 날씨를 물으며 평상시처럼 지내고자 하였다. 이른바 “친구란 친구로 삼았던 것을 없앨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기경과의 관계 개선은 정약용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약용이 만년에 작성한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관용책 내지 포용책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약전 묘지명>의 표현을 따른다면 신해박해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한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이 운명처럼 그를 끝까지 얽혀 매었던 것이다. 칡이나 등나무 얽혀 있듯이 그렇게 천주교에 얽혀 매어진 것이 풀기가 어려워 명확하게 화란이 다가옴을 알면서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일생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찬묘지명>의 중요한 사상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신처럼 무고로 인하여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리

 

정약용은 자신의 고난과 관련해서 천주교의 문제를 기술하였는데, 그러한 천주교 관련 내용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선은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배교의 역사를 보여준 사실을 지적해두고 싶다. 현재 배교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38) 사실 정약용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자신의 배교의 역사를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서술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그를 이전에는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이 아까워 배교한 배교자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중본에 의하면 신유박해 때 심문을 받으면서 이러한 사실이 기록된 <백서>를 읽었던 것이다. 때문에 정약용은 <정약전 묘지명>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태도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을 말한 다음,

 

오호, 골육이 서로 싸워 자기의 몸과 이름을 보존한 것과 순순하게 받아들여 엎어지고 뒤집혀 천륜에 부끄럼 없음이 어떻게 같을 것인가. 뒷세상에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든 황사영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배교 문제를 설명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를 역적으로 언급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천주교 신자라도 국가의 존립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곧바로 반천주교적인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약용의 이러한 모습은 집중본에서 신유박해 때 그가 감옥에 있었을 때의 상황을 통해서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처음 신유년 봄에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근심하고 걱정하다 잠이 든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는 19년도 참고 견디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했었다. 옥에서 나오던 때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던 날이 꼭 19일이었다. 유배지에서 고향에 돌아옴에 당하여 헤아려보니 경신년(1800)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정약용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19일 동안 감옥에 있을 때 근심하고 걱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의 인생살이가 운명, 즉 하늘의 뜻에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약용은 순교하지 않고 현실에 타협해서 살아남은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광중본의 서두와 집중본의 중간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언급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배교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광중본에서는 천주교에 마음을 끊었다고 하면서 배교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무덤에 함께 가지고 갈 광중본을 통해서 그가 천주교 신앙인이었으며, 동시에 배교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함께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 내용은 거의 소개하고 있지 않다. 이와 달리 집중본에서 그가 배교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천주교 관련 내용의 대부분은 배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정약용이 집중본의 처음에서 광중본과는 달리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은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배교를 하였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된 신자가 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일관되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서술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하여 자신이 시기별로 어떻게 배교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을 읽은 사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때에 종기를 따내 버림이 옳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던 것이다.39) 천주교 서적을 읽었거나 읽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정찰방으로서 그가 한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천주교를 믿고 있던 역속(驛屬)들을 회유하였으며, 그곳의 세력가들에게 천주교 금령을 설명하면서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천주교의 확산을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존창의 체포 문제와 같이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분명히 정리하고 있다. 그가 아무런 모의나 계획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정약용을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하려는 이들을 겸연쩍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때문에 정조의 뜻까지도 어겼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를 인용한 부분에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단순히 읽은 것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온통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한 잘못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다시 정조의 신임을 얻어 벼슬살이를 계속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후에도 그를 천주교와 연결시키려는 모함이 계속되자 화를 면하고자 처자를 거느리고 낙향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책롱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가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천주교에서 강조한 삼구설(三仇說) 역시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정복을 빌어 무고라고 말한다. 신유박해 때에도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황사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말하면서 그를 역적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배에서 돌아온 해에 목태석이 상소를 올려 그가 여전히 천주교를 추종하며 따라다니면서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지 않다고 완곡하게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한때 천주교 신자였지만, 신자로서 천주교에 제대로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40)

 

다음으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위한 여러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약용 나름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약용은 한국 사회에 천주교가 종교로써 처음 인식된 것은 1784년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벽을 강조하고 있다. 이승훈의 세례에 의미를 주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와 달리 이벽이 처음 천주교를 종교로써 선전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본질을 정치사적 시각에서 본 것 역시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를 <이기양 묘지명>을 통해서 이를 한둘의 음사(陰邪)한 사람과 악당과 악인들이 죄가 없는 착한 사람들을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억울하게 옥사시키고 유배지에서 죽게 한 사화(士禍)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가환 묘지명>을 통해서 대계(臺啓)로서 발단을 일으키고 신문으로 죄안을 성립시켜 증거도 없고 장물도 없는데 곧바로 장살(杖殺)하고 끝내 기시(棄尸)해 버린 것은 기축 · 경신년의 옥사에서도 없던 일이라고까지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정약용의 이러한 이해는 이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나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서 천주교 박해를 보는 관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41)

 

무엇보다 정약용이 당시까지의 천주교회사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여 서술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1784년부터 1801년에 일어난 황사영 백서 사건까지의 내용들이다. 1784년에 이벽을 통해서 서교에 대해서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이기경을 통해서 1788년에 들어오면 함께 천주교를 공부하고 믿은 사람들이 서로 길을 달리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중앙 관료나 선비들 가운데 열에 7, 8명이 천주교에 빠졌다는 사실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신해박해가 일어난 1791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때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 등이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과 대립하게 되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계기는 역시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함께 나타났던 것으로 보았다. 이때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의 국적과 출신 지역, 조선에서의 거주 지역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내포 지역의 천주교 상황도 전한다. 역졸이나, 이존창처럼 어떤 신분의 사람들까지 천주교를 믿고 있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796년 그가 동부승지로 있을 때 천주교 서적 문제가 다시 제기된 일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대 세력에 의하여 정약전에 이어 정약종에까지 박해가 미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정조의 사후 이들이 어떻게 세력 규합을 하여 정약용이 관련된 집단을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책롱사건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신유박해로 자신이 체포되어 풀려나는 과정을 황사영 백서 사건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구설도 언급된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기록할 때 역시 순교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신해박해와 관련해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옥사(獄事)가 있었다고만 언급한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의 체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인길, 윤유일 등 3인이 장살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순교자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굳이 이 부분에서 이러한 내용을 서술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훈이 유배를 가게 된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과 이가환은 지방으로 자리를 옮긴 사실도 함께 이야기한다. 이것은 천주교 박해의 결과가 사람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미쳤는가를 알려주고자 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신유박해 부분을 통해서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2월 8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이 모두 투옥되었고, 정약용의 형인 약전 및 약종과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홍낙민, 김건순, 김백순 등이 차례로 투옥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때 누가 순교하였으며, 누가 살아남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여름에 일어난 또 다른 순교 사건도 알려준다. 이해 여름에 옥사가 더욱 확대되어 왕손(王孫) 인, 척신 홍낙임, 각신 윤행임 등이 모두 사사(賜死)당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언급된다. 이때 정약전, 정약용, 이치훈, 이관기, 이학규, 신여권 등이 또 체포되어 투옥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들에 대해서는 유배로 그쳤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을 통해 신유박해의 시말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정약용의 기록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김상홍에 의해서 다시 지적되고 있듯이 이러한 기록들은 다블뤼의 한국 천주교회사 자료 수집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42) 정약용 만년의 천주교 신자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김상홍 역시 <자찬묘지명>을 비롯하여 정약용이 저술한 여러 묘지명의 천주교 내용을 다블뤼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남긴 자료를 읽어본 다블뤼는 “그의 책은 그의 집에 숨겨져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도 극소수를 제하고는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에 김상홍은 다블뤼가 정약용의 여러 묘지명을 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정약용이 저술하였다고 하는 《조선복음전래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7개의 묘지명을 비롯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등을 묶어서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한다. 이것은 이른바 ‘총칭설’(總稱說)을 주장하는 김상홍과 ‘실재설’을 주장하는 최석우가 유일하게 일치하고 있는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 필자는 그 실체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정약용이 <자찬묘지명> 등 여러 자료를 통해서 언급한 한국 천주교회사의 내용들은 역시 후대의 교회사 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사실 신유박해 때까지 있었던 정약용의 개인사는 그대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큰 흐름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에 대한 그의 개인 신앙사이기도 하지만, 곧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43)

 

 

5. 맺음말

 

지금까지 정약용이 저술한 <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 정약용과 천주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한 부분을 다루어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기존의 연구에서 정약용이 시기적인 변화 없이 천주교 신자였다든지, 그와 달리 천주교와 완전히 단절된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명이 조금은 지나친 해석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약용이 다시 천주교로 돌아왔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의 단계로서는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그의 입장이 반 천주교적이라는 해석은 그대로 따르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오히려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속에 천주교의 영향이 여전히 깊게, 오래 남았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한 정약용의 입장은 비록 현재 천주교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주교가 용납되어야 한다는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44)

 

이러한 관점에서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을 굳이 정의를 해본다면 그가 처음에 천주교 신앙을 가졌을 당시의 그것처럼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교 신앙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름 아니라 집중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만년까지 그의 학문적 관심에서 차지한 최대의 주제는 바로 상 · 제례 부분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유교의 상 · 제례 가운데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새롭게 변화시킬 부분을 찾아서 나름대로 그것을 쇄신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45) 정약용이 이와 같이 상 · 제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한때 천주교를 믿었다가 배교를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천주교의 제사 금지령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약용이 유교의 상 · 제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천주교와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만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면 조선 후기의 한국 사회에서도 천주교의 수용이,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한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상 · 제례에 대한 연구는 천주교의 제사 금지령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당시의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하며 지역적으로나 신분적으로나 자신이 천주교를 믿었던 초기의 양상과 달리 민중 신앙 운동으로까지 새롭게 변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어서 정약용의 노력은 그러한 흐름과는 서로 함께할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46) 그렇게 정약용은 평생 천주교와 엇갈리는 만남을 운명처럼 계속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위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와 관련된 문제이지만 조금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게 서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우선 가지게 된다.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사료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번에는 <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정약용이 저술한 또 다른 묘지명들에도 천주교 관련 사료들이 풍부하게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에 대한 그 밖의 여러 자료에서도 찾아보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최근에 나온 《여유당전서》에 대한 정본은 이러한 작업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이들 사료에 대한 비교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자찬묘지명>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내용으로까지 오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그러한 사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정약용이 일관되게 주장하고자 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47) 이와 함께 이들 사료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가능하다면 풍부한 내용을 담은 역주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현재 몇 가지 번역이 나와 있지만, 그러한 정도로서는 사료의 의미를 정확하게 천착하는 데 많은 한계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만 있다면 이를 통해서 정약용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읽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때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역시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사 연구,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시대와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제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수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문제들을 다루어 볼 것을 이 자리를 빌어서 약속드린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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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최경환 가문의 삶과 천주교 신앙>, 청양 다락골 성지 발표회, 2011.

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 2 -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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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호, <다산 ‘자찬묘지명’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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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정, <보론 - 정약용에 대한 기존연구 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2007.

원재연,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교회사연구》 39, 2012.

조성을, <정약용과 교안>, 《한국실학연구》 2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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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 다블뤼의 비망기를 중심으로>, 《다산학보》 5, 1983.

- - -, <정다산의 서학사상>, 《정 다산과 그 시대》,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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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성을, <정약용과 교안>, 《한국실학연구》 25, 2013.

2) 김수태, <이존창의 신앙과 배교문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2011.

3)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교회사연구》 39, 2012에 모두 실려 있다.

 

4) 강재언은 《조선의 서학사》, 1990, 11쪽에서 서양의 종교와 윤리의 측면을 서교, 그 학술적 측면을 서학으로 갈라서 쓰기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서학 안에 서교를 포함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5) 조성을, 앞의 논문을 참고하라.

 

6) 김상홍은 쟁점을 모두 7개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 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 《다산문학의 재조명》, 2003.

 

7) 최석우, <정다산의 서학사상>, 《정 다산과 그 시대》, 1986, 119~122쪽. 

8) 최석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 다블뤼의 비망기를 중심으로>, 《다산학보》 5, 1983, 27쪽.

9) 최석우, 위의 논문, 43~44쪽.

10) 최석우, 1997 ; 백민정, <보론 - 정약용에 대한 기존연구 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2007, 435~436쪽에서 재인용.

11) 김상홍,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과 천주교>, 《한국실학연구》 24, 2012.

12) 김상홍, <다산의 문학연구>, 《다산학》 21, 2012.

13) 백민정, 앞의 책, 426~427 및 435~436쪽.

14) 원재연,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교회사연구》 39, 117쪽.

15) 김상홍,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과 천주교>를 참고할 것.

16) 김수태, <최경환 가문의 삶과 천주교 신앙>, 청양 다락골 성지 발표회, 2011.

17) 원재연, 앞의 논문, 77 및 111~112쪽.

18) 원재연, 위의 논문, 123쪽.

19) 백민정, 앞의 논문, 427 및 471쪽.

20) 김형호, <다산 ‘자찬묘지명’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2010.

21)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22) 김형호, 앞의 논문, 3~4쪽.

23) 김형호, 앞의 논문, 21~23쪽.

24)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25) 그것은 정약용이 저술한 다른 묘지명에 언급되고 있듯이 서양 선박 요청 사건과 관련된 문제이다. 정약용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6) 김형호, 앞의 논문, 25~28쪽.

27) 다른 묘지명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지켜지고 있는 듯하지만, <이가환 묘지명>에서 사설 혹은 사학이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28) 강재언 등에 의해서 이러한 내용이 처음 규정되었지만, 최근 이에 대한 정의로는 원재연, <18세기 후반 정약용의 서학연구와 사회개혁사상>, 《교회사학》 9, 2012, 182쪽이 참고가 된다. 여기에서는 서학 또한 서학서라고 부르고 있다. 원재연의 교시에 의하면 《천학초함》에서 이편과 기편으로 나누고 있다고 한다.

 

29) 이때 정약용이 생각한 ‘교’의 개념은 보다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30) 이원순, 《조선서학사연구》, 1986, 11쪽에서 재인용. 원재연의 교시에 의하면 서광계가 이지조로, 이지조가 서광계로 교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논리의 전개에는 무리가 전혀 없다.

 

31) 김치완, <‘辯謗辭同副承旨疏’의 논리구조로 본 서학 논의의 주요쟁점과 그 의의>, 《동서철학연구》 54, 2009는 이 문제를 다룬 연구이다.

 

32) 한편 정규완이 저술한 《사암선생연보》에도 천주교 관련 비난 문구 등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정약용이 천주교를 변호하는 듯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 2 -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1991). 그러나 후에 첨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원재연, <다산 정약용의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113쪽).

 

33) 집중본에서 언급되고 있는 안정복의 경우에도 《천학문답》 등을 통해서 ‘서학’, ‘양학’, ‘서사지학’, ‘서양서’ 등으로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학’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과는 차이가 나는 견해이다.

 

34) <정약전 묘지명>이 1816년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더 빠른 시기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천주교를 사학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가환 묘지명>이 1822년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박석무 역주, 《다산산문선》, 1985, 76 및 192쪽) 역시 이 무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5) 강재언, 앞의 책, 90쪽.

36) <이가환 묘지명>.

37) 김형호, 앞의 논문 및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38) 김수태,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39) 이 기록은 보다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현재 최석우 등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은 배교의 시기를 1795년으로 보고 있어 논쟁이 되고 있는데(원재연, 앞의 논문, 124쪽), 집중본을 따른다면 1791년이 옳을 듯하다. 이것은 광중본과도 일치한다.

 

40) 이러한 점에서 다블뤼가 “그(정약용 : 역자 주)의 저서에서 그 자신의 배교와 그의 형제 친척 친지들의 배교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이런 사실이 그의 이야기에 진실성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라고 남긴 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을 통해서 자신의 배교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41) 김수태, <이능화와 그의 사학>, 《동아연구》 4, 1984 및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교회와 역사》 300, 2000을 참고할 것.

42)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43) 이러한 까닭에 다블뤼는 정약용에 대해서 “학식 있고 청렴하기로 알려진 그는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할 때 일어난 모든 사실에 참여하였고, 그가 아주 잘 아는 사실에 관해 적어놓았습니다. …끝으로 나는 그의 저서에서 다른 구전과 모순되는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간략하고 정확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

 

44) 최근 허흥식에 의해서 1830년대 오규일이 ‘요한’이란 정약용의 세례명을 새긴 인장을 증거로 정약용이 죽을 무렵 천주교 신앙을 간직했던 것으로 본 주장이 나왔다(<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토론문).

 

45) 최기복, <천주교회의 유교제례 금령과 다산의 상제례관>, 《교회사연구》 39를 참고할 것.

 

46) 한편 김선희는 정약용이 중국의 입교자들과는 신앙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교적 유신론보다는 유신론적 유교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기독교적 신을 자기 전통 안에서 유교적 신으로 세워놓았다는 것이다(《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 2012, 470 및 491쪽).

 

47) 여기에 대해서는 원재연, 앞의 글, 55쪽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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