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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서론, 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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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26 ㅣ No.765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


가정 시노드 후속 권고… 전 세계 교회 가정 사목의 나침반

 

 

가정이 위기에 처해 있다. 그래서 지난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전 세계의 주교 대표들이 로마에서 가정을 주제로 회의(주교 시노드)를 개최했다. 주교들은 많은 의견들을 나눴고 의견들을 수렴해 정리하고 투표로 확정한 후 교황에게 건의했다. 그 후속으로 교황이 ‘사도적 권위’로 발표한 문헌이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이다. 문헌에 ‘가정에서의 사랑에 관해 주교들과 사제들과 부제들과 봉헌 생활자들과 그리스도인 부부들과 모든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노드 후속 권고’라는 긴 이름이 붙어 있는 이유다.

 

 

서론(1~7항)

 

“가정들이 체험하는 사랑의 기쁨은 또한 교회의 기쁨입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은 문헌의 성격을 한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가정이 가족 구성원들의 상호 사랑으로 표현되는 기쁨의 장이 돼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명제라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가정도 출발하면서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한 가정을 꿈꾸지 않는 가정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가정에서 체험하는 사랑의 기쁨은 또한 “교회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교황은 이렇게 밝힌다. “혼인 제도의 많은 위기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려는 갈망이 특별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동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에 주는 영감입니다. 이 갈망에 대한 응답인 ‘가정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선포는 과연 기쁜 소식입니다’”(1항). 가정 자체가 바로 기쁨이라는 것이다. 

 

교황은 이어 문헌의 배경과 성격, 구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와 함께 문헌을 읽을 때 고려해야 할 점도 언급한다(2~7항). 교황은 우선 혼인 및 가정에 대한 교회 가르침과 관련해 시노드 이후에 나온 반응이 다양했음을 주목한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교회 가르침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나 기본 교육이 터무니없이 총체적 변화를 바라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규칙을 모든 문제에 적용해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다. 셋째로는 특정한 신학적 고찰에서 부당한 결론들을 이끌어내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다(2항).   

 

교황은 이어 가정과 관련한 교리적 윤리적 또는 사목적인 모든 문제를 교회 교도권이 개입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통일된 가르침과 실천은 교회 안에서 확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 가르침의 일부 측면을 해석하는 또는 그 가르침에서 결론을 도출해 내는 다양한 방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3항). 원칙적인 교리적 가르침은 분명하지만 그 가르침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안의 복잡성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황을 이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에, 또 복음의 토착화와 결부시킨다. 

 

교황은 가정에 관한 두 차례의 시노드에서 제시된 다양한 의견들을 “다면체의 보석”이라고 부르면서 이 시노드 후속 권고에는 시노드에서 나온 의견들뿐 아니라 성찰과 대화와 사목적 실천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 매일 투신과 도전 속에 살아가는 가정들에게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는 부분들도 고려했음을 밝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이 문헌이 특별히 자비의 희년에 적절하다고 본다(5항).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그리스도인 가정들에게 혼인과 가정이라는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너그러움과 헌신과 충실과 인내의 덕들로써 사랑을 강화해 잘 가꾸도록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가정생활이 불완전하거나 또는 평화와 기쁨이 없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자비와 친밀함의 표징이 되라고 격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친절하게 문헌을 읽는 방법도 제안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본문을 서둘러 읽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가정들과 또 가정 사도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각 부분을 읽을 때에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부부들은 4장에 더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고, 반면에 사목자들은 6장에 더 관심을 두고 읽을 수도 있다. 8장은 누구에게나 도전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황은 “가정은 문제가 아니라 기회”라는 말로 서론을 마무리 한다(7항). 2015년 9월 쿠바를 사목 방문 때에 가정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내용이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24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2) 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①

 

하느님 창조의 신비, 가정에서 볼 수 있다

 

 

「사랑의 기쁨」 제1장(8~30항)은 ‘말씀의 빛 안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기에서 제목 그대로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혼인과 가정의 본질과 특징을 고찰한다. 혼인과 가정에 관한 성경 말씀은 그냥 거룩한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는 가정에 관한 이야기들, 탄생과 사랑 이야기들, 가정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 이야기들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마치 우리네 가정들처럼. 

 

그런데 모든 가정의 이야기들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슬기로운 사람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마태 7,24-27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비유가 “가족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빚어낸 가정들의 상황”(8항)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번쯤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우리 집, 우리 가정은 반석 위에 지은 ‘든든한 집’인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지은 ‘부실한 집’인가 하는 것이다. 든든한 집이라면 비바람이 몰아치고 강물이 밀려들어도, 곧 온갖 어려움이 닥쳐도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실한 집이라면 조금만 비바람이 불고 강물이 밀려오면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그 반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물음들과 관련,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편 182장 1-6절에 나오는 한 가정의 풍경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8항). 독자들은 꼭 이 시편 구절을 한번 정독해 보시길 바란다. 

 

집은 기초를 놓고 짓듯이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출발한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된다”(창세 2,24). 둘이 결합해 한 몸을 이루는 이 한 쌍의 남녀는 어떤 존재인가? 교황은 창세기 첫 장의 말씀으로 이를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프란치스코 교황은 창세기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남자와 여자’라는 쌍을 가리키고 있음을 주목한다(10항).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됐다고 해서 하느님이 남성과 여성을 다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느님은 남성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친절한 설명과 함께 교황은 핵심을 건드린다. “하느님의 초월은 보존되지만,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신 만큼, 한 쌍의 인간이 이루는 결실(자녀)은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의 효과적인 ‘모습’, 즉 볼 수 있는 표징”이라는 것이다(10항). 

 

그래서 교황은 이렇게 밝힌다. “부부의 결실을 맺는 관계는 하느님 자신의 신비를 이해하고 묘사하기 위한 ‘모습’이 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사랑의 영으로 관조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사랑의 친교이고, 가정은 그 생생한 반영입니다”(11항). 가정은 그래서 하느님의 존재 자체와 무관하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기서 선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 초기인 1979년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 참석하러 멕시코 푸에블라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행한 미사 강론 말씀을 인용한다. “당신의 가장 깊은 신비에 있어서 우리의 하느님은 고독이 아니라 하나의 가정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안에 아버지 됨과 아들 됨 그리고 가정의 본질인 사랑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신적 가정에서, 그 사랑은 성령입니다”(11항).

 

여기에서 우리 가정의 현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성찰할 수 있다. 우리 가정은 반석 위의 가정인가 아니면 모래 위의 가정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부부는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부부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듯이 서로 그렇게 대하는가? 우리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사랑의 친교를 반영하고 있는가? [평화신문, 2016년 5월 1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3) 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② (12-18항)

 

자녀 신앙 농사 망치면 집안 교회 대 끊긴다

 

 

혼인과 가정은 남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시작한다. 부부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창세기 첫 장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남자는 동물들과 주변 세상 가운데서 느끼는 고독을 덜어줄,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20)를 애타게 찾고 있다”(12항). 그 짝은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표현을 인용하면 남자에게 “뜻이 맞는 협조자요 의지할 기둥이 되는”(집회 36,29) 여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가의 한 대목도 인용한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2,16; 6,3).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 의지할 기둥, 자기의 고독을 덜어줄 짝을 찾던 남자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여인을 만난다. 이 만남은 두 남녀를 결합하게 하고 한몸이 되게 한다. 이로써 혼인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가정이 시작된다. 

 

둘이 한몸이 되게 하는 이 결합은 어떤 결합일까? 교황은 혼인의 결합은 “성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서로를 내어주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결합으로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마음과 삶의 결합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자녀에게서 한몸이 된다”고 설명한다. “자녀는 유전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부모의 ‘몸’을 나누어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13항). 

 

부부의 결합(혼인)이 지니는 의미를 이같이 제시한 교황은 이제 부부를 토대로 그 자녀가 함께 이루는 가정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성경을 인용하면서 고찰한다(14~18항). 부모는 어떤 의미에서 가정의 토대, 기초다. 그렇다면 자녀는 무엇에 비길까. 교황은 자녀들을 “가정의 ‘살아 있는 돌’”(14항)과 같다고 본다. ‘살아 있는 돌’이란 신약 성경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 나오는 표현이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5). 가정에서 살아 있는 돌인 자녀들의 존재는 대대로 이어지는 가정의 연속성에 대한 표시다. 

 

교황은 이어 “집에 모이는 교회”(1코린 16,19 등)라는 성경의 표현에 주목하면서 가족의 생활 공간인 가정은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실 때 집안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밝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가정이 집안 교회로서 대를 이어 가면서 연속성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녀를 신앙 안에서 키우는 장소”인 가정에서 “부모는 신앙에 있어서 자녀들의 첫 교사가 된다”면서(16항), “부모는 이 교육에 진지한 책임을 진다”(17항)고 강조한다. 

 

반면에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는 계명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공경한다’는 표현은 말로만 때우는 것이 아니라(마르 7,11-13 참조),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이행한다는 것과 관련된다고 교황은 설명한다(17항). 

 

그런데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들이 꾸려가야 할 고유한 삶이 있다”(18항)고 교황은 적시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가정에서 신앙으로 양육되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자기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부모와 가족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을 이 삶의 모델로 제시한다. 어린 예수는 지상의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을 뿐 아니라(루카 2,51 참조), 열두 살 때는 더 큰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지상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주었다(루카 2,48-50 참조).

 

나아가 예수님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루카 8,21)이라며 가정 안에서도 믿음과 그에 따른 실천이라는 더 깊은 유대의 필요성을 제시하신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들에게서 오히려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두 가지만 성찰하자. ① 우리 가정은 집안 교회인가. 그래서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첫 교사 역할을 하고 있는가.  ② 부모로서 자녀를 소유물, 혹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 줄 존재로 여기는가, 아니면 자녀의 인격과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는가.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4) 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③ (19~30항)

 

교황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범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2-3).

 

모든 가정이 이 시편 구절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예비부부나 신혼부부의 축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혼에 관한 논쟁의 맥락에 들어 있음을 주목한다(마태 19,3-9 참조).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수많은 곳에서 가족 관계에서의 고통과 피 흘림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인의 아벨 살해는 그 시작일 뿐이다. 예수님 또한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해야 하는 운명을 겪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정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다. 술이 떨어진 혼인 잔칫집의 당혹스러움을 해결해 주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내용을 일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은 일련의 추상적 관념들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난을 체험하는 모든 가정을 위한 위로와 동료애의 원천”(22항)이라고 제시한다. 

 

우리네 가정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가족 간의 관계에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 곧 노동과 관련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동은 단순히 원죄의 대가가 아니다. 노동은 그 처음부터 인간 존엄성의 본질에 속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는 말씀처럼,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자연을 가꾸고 돌본다. 이를 통해 가족을 부양할 뿐 아니라 사회 발전을 도모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일거리가 없어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마태 20,1-16 참조). 오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실업으로 인한 빈곤은 가정들을 더욱 어렵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결과로 인한 인간 이기심과 욕망은 자연을 파괴하고 사회 경제적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예언자들이 고발하고, 예수님께서 규탄한 불의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들을 안고 있는 가정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줄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사랑의 계명을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그들의 삶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 원칙”이라고 이해한다. 실상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야말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사랑은 또한 자비와 용서에서 결실을 맺는다”(27항). 

 

자신을 내어주는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혼인과 가정생활에 대한 체험에 중심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와 함께 중요한 한 가지 덕목을 더 제시하는데 다정함(살가움, 부드러움)이다. 실상 바쁘게 움직이고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돌아가는 현대의 삶에서 다정함은 곧잘 간과되기 십상이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와 같은 살가움은 시편 저자가 하느님과 하느님께 성실한 이들과의 관계를 나타내고자 사용한 이미지다(시편 131,2 참조). 

 

성경에 나오는 혼인과 가정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본 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렇게 규정한다.

 

1.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합일을 이루는 모습대로 그 구성원들이 인격적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2. 가정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반영한다. 이 가정은 ① 매일 기도를 바치고 ② 하느님 말씀을 읽으며 ③ 미사에 참여하고 ④ 그리하여 사랑에서 성장하고 갈수록 더 온전히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29항).

 

교황은 나아가 모든 가정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면서 특별히 마리아의 모범을 닮기를 권고한다. “마리아처럼, 우리 가정들은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용기 있고 평온하게 가정의 도전들을 대면하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가슴에 간직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30항).

 

다시 한 번 성찰하자. 우리 가정은 삼위일체의 친교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가정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바라보며 특별히 마리아의 모범을 닮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평화신문, 2016년 5월 1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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