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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바실리카의 여러 부분들2: 중랑과 측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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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78

[전례 상식 / 교회 건축] 바실리카의 여러 부분들 (2)

 

 

중랑과 측랑(navate)

 

성당의 내부는 가운데에 길게 뻗은 주공간 또는 중랑(中廊 : nave)과 양쪽 측랑(側廊 : aisle)으로 나누어지는데, 각 공간은 서로 연결되고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 평면들을 가리키는 ‘나바테(Navate)’라는 이름은 배(nave)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통 배에 비유해서 말하는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Constitutiones Apostolorum, II, 57).

 

성당의 평면을 기능상으로 보면 전례를 집전하는 성직자들에게 유보된 공간과 백성의 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집전자와 그의 보조자들을 위한 공간을 제단(santuario, coro, presbiterio)이라고 한다. 위의 두 공간이 언제나 고정되고 일률적인 형태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제단과 주공간 사이에는 난간이나 사슬로 경계를 표시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아치형의 벽으로 제단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중랑과 측랑의 수는 언제나 같지는 않았다. 단 하나의 평면에 신자들의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고 둘이나 넷 또는 여섯, 여덟의 측랑으로 나누어 자리를 배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운데 하나의 중랑과 양 옆으로 각기 하나씩의 측량을 갖는 구조가 일반적으로 선호하던 구조였다. 그러나 카르타고 등지에서는 일곱이나 아홉 개로 구분되는 평면을 갖는 구조도 발견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선호했던 세 평면 구조는 가운데의 주공간을 크게 하고 양쪽의 측랑은 그것보다 약간 좁게 했다. 양쪽의 측랑은 제대 오른쪽, 왼쪽으로 구분해 놓고 서간편 측랑(a cornu epistolae)과 복음편 측랑 (a cornu evangeli) 으로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독서와 서간 그리고 복음을 모두 하나의 독경대에서 봉독하므로 이런 구별적인 이름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측랑과 측랑 사이는 일련의 둥근 기둥이나 반원형의 아치 모양(a tutto sesto)을 하고 있는 벽기둥이나 또는 계속 이어지는 문양돌(una trabeazione continua)과 벽돌담의 무지개 모양의 아치(piattabanda)로 연결되기도 했다. 5세기에는 동방과 이탈리아 북쪽의 라벤나 등지에 후에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지칭되는 건축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둥과 아치를 연결해 주는 ‘풀비노(pulvino)’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풀비노의 표면에는 많은 경우 십자표나 건축가의 모노그램이 각인되어 있다.

 

둥근 대리석 기둥(colonna) 대신에 벽돌이나 시멘트를 사용하여 벽기둥(pilastro)을 세우는 것은 건축가의 기호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대리석이 없거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지역적인 조건에 맞춘 것일 때가 많다. 그러나 거대한 건물을 안전하게 지탱해 주고 기둥의 수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신자석에서 보아 가시범위를 넓히기 위한 필요성에서 이러한 양식의 구조를 택하기도 한다. 그리스와 에게해 근처 섬들의 교회 안에서는 중앙 통로와 측랑 사이에 통행이 불가능하게 기둥과 기둥 사이를 차단하는 구조도 보게 된다. 이 구조에서는 몇 개의 문을 통해 통행을 한다. 이러한 구조는 회중의 통행을 차단하고 측랑의 고립현상을 가져와 전례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불가능하게 한다.

 

세로로 길게 난 중랑과 측랑은 건물의 길이와 직접 관계되지만, 넓이에 대해서 4세기 바실리카들이 유지하고 있었던 중랑과 측랑의 비례는 2대 1이었다. 즉 각 측랑은 중랑의 반에 해당하는 넓이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비례는 5세기를 지나면서 변화의 경향을 보인다. 비잔틴 양식의 성당들은 보통 중랑보다 더욱 좁은 (절반의 크기가 아닌) 두 개의 측랑구조를 지니게 되고, 4세기의 건물이 지니고 있던 중앙집중식에서 제단을 향한 긴 동선의 움직임을 주려는 경향이 5~6세기의 건축에서 나타난다. 측랑에 비해 주공간(중랑)의 두드러짐은 높이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그리스도교 바실리카의 지붕은 공통적으로 나무로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지중해 지방에 있는 성당들의 중심부분은 대들보를 삼각형으로 묶은 형태를 취했다. 이때 대들보는 내부에서 볼 수 있게 드러나 있다.

 

5세기 이후로는 둥근 지붕 형태(cupola)의 또 다른 지붕의 양식이 퍼져나간다. 이 양식은 이전에는 절대적으로 나무가 부족한 중부 시리아와 같은 지역에서나 드물게 보는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지붕은 밑에서 받는 하중과 건축의 어려움 그리고 지탱의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낳았다.

 

우리 나라의 성당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많은 신자들의 수용력만을 생각하여 빽빽하게 의자를 배치함으로써 동선의 의미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디가 중심이랄 것도 없다. 그저 벽을 쌓고 지붕을 얹어 비를 피하기 위한 공간일 뿐이라는 인상을 받는 경우도 많다.

 

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전체 건물의 높이를 낮게 해서 성당문을 열면 가장 먼저 답답함부터 느끼는 경우들도 있다. 천장이 낮으니 자연 2층의 바닥이 낮아져 아래층 입구 천장이 바로 머리 위에 있어 제대쪽을 환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천장 전체의 모습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천장도 제대라든지 아니면 다른 어느 중심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파괴된 성당터에서 발견되는 벽들을 장식했던 모자이크 조각들은 이콘을 연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성당의 여러 부분들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도 건축가에게 유용한 요소로 작용한다. 모자이크의 다양한 장면들과 주제들 그리고 그것의 위치는 제단 영역과 신자석의 구분 등 각 공간이 갖는 기능을 살려 거의 본래의 모습대로 전체구조를 복원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교 바실리카에서 내부를 밝히는 조명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희미한 조명 아래 모인 이교인들의 신전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성당은 환한 빛이 공간 전체를 비춘다. 그러나 앓은 대리석 판으로 만든 창은 태양의 강한 빛을 완화시키기도 하고 불투명한 색 대리석 창은 빛을 완전히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투명한 창을 사용한다. 창의 수는 건물의 규모에 따라 다양했다. 입구와 측랑의 상층(tribune)은 보통 ‘오쿨리(oculi)’라고 불린 원형으로 생긴 일련의 보조창을 두었다. 대부분의 건축물에서 제대 뒤편에 둥글게 두르고 있는 후벽(abside, apse) 쪽에는 보통 창(finestra, window)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제단부를 비추기 위해 두 세 개의 틈(aperture)을 만들어 광도를 더하고자 했다.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는 밤에도 화려하게 비추어졌다. 천장과 벽, 기둥에 등을 달아 내부를 밝히고, 다지(多枝) 촛대를 사용하여 제대를 장식했다. 큰 축일 때에는 조명을 더 밝게 하여 축일의 기쁨을 더 크게 표현하고자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오늘날의 성당들도 개인적으로 성당을 찾는 이와 회중 전체가 모여 전례를 거행할 때를 고려하여 조명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싶은 이를 위해서는 은은한 빛을 제공하고 전례 중에는 최대한의 밝기를 보장할 수 있는 단계적인 조절이 가능한 조명시설이 필요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4월호, 김종수(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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