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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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7 ㅣ No.870

[레지오 영성] “너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 안에 어떤 질서를 담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질서를 창조질서라고도 부르며, 이 질서 안에서 만물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각자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모습들을 아름답게 완성시켜 나아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이 교훈적으로 잘 보여주듯이 이 조화롭고 질서 있는 삶은 결코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특은 중에 창조되어 자유의지와 더불어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은 인간은 사탄의 유혹 앞에 이 자유와 특권을 남용하여 하느님도 거역하고(창세기 3장) 자신의 형제도 죽이기까지 함으로써(창세기 4장) 창조질서와 그 관계들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질서한 상태를 죄라고 말하며, 특히 우리 인류 원조의 죄, 즉 아담과 하와로부터 전해지고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된 원초적인 죄로서 이로 인해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에서 단절되어버린 존재론적인 상태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이 파괴된 질서와 무너진 관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드님이시며 “마지막 아담”(1코린토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새롭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8-19)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우리의 죄와 죽음의 보편성과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의 보편성을 대비시키면서 놀라우신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자신의 식별과 책임 따라

 

이 구원의 계획은 놀랍게도 이미 창세기 3장, 첫 인간의 죄와 벌의 이야기 속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기 3,15) 이 말씀은 특별히 성모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영적 투쟁의 선봉에 서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의미가 깊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성모님께서 맡으신 역할이 예언적으로 암시되어 있으며, 이후 구원의 역사 속에서 펼쳐질 악과의 싸움에서 “레지오는 그 ‘여자의 후손’, 즉 성모 마리아의 자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레지오 교본 40쪽)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이 악과의 투쟁에 있어서 악의 위선적인 속성과 그 교활한 전술을 잘 알고, 또 위대하면서도 비참한 우리 인간의 양면, 특히 인간의 약한 본성에 대한 이해도 깊어져서 악의 유혹과 공격에 잘 대처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창세기 3장을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첫 인간의 죄에서 우리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2,25) 아담과 하와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떠나는 안타깝고도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여기서 에덴동산은 낙원, 즉 아무런 아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서 발가벗고 살아도 마냥 풍족하고 행복한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는 죽지 않으려거든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차라리 선악과나무는 심지를 마실 것이지, 어떻게 보면 좀 짓궂으신 하느님의 처사 같지만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는 두말할 필요 없이 크나큰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이에는 자신의 식별과 선택과 책임이 따르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자유로움 속에는 이렇게 생명의 역동성이 담겨 있습니다.

 

뱀으로 묘사된 사탄은 조용히 우리의 생각 속에 스며들고, 마음속에 속삭이며, 우리의 자유의지를 이용하고 왜곡시켜 서서히 우리를 참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영역인 죄의 종살이로 몰아갑니다. 뱀은 먼저 여자에게 접근하여 묘하게도 뒤틀린 질문으로 우선 여자의 관심을 선악과로 돌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리신 죽음의 경고를 의식하는 여자를 “결코 죽지 않는다”는 단호한 거짓말로 안심시키며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대반전의 비밀, 달콤하고도 그럴듯한 새로운 정보로 여자의 시선을 선악과로 집중시킵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3,6) 견물생심(見物生心), 모든 유혹은 우리에게 이렇게 달콤하고 그럴듯하게 다가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근본적인 창조질서 무너지면 내 삶의 다른 관계들도 무너져

 

마침내 여자는 하느님의 엄중한 경고를 뒤로한 채 선악과를 따먹고, 또 그것을 남편에게도 줘서 먹게 합니다. 남편도 여자를 따라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죄는 서로 쉽게 엮어지고 연대하여 죄가 죄를 낳게 되고 또 다른 죄도 불러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연 뱀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열려 그들의 알몸을 보게 되었고, 주섬주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자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기쁨과 평화 속에 함께 거닐었던 그분과의 친교, 그 친밀했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정말 따끔한 그리고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3,9) 이 질문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분 앞에서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는지 나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묻는 심오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나의 삶에서 그분은 과연 어떠한 분이신지, 그분은 내 삶의 중심에 모신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느님이신지 성찰하게 합니다. 종종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또는 하느님을 내 뜻대로 조종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곤 하는 나에게 던져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나의 창조주이시며 나는 그분 사랑의 작품입니다. 내 인생에 그리고 내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하느님과 나와의 이 절대적인 관계가 내 삶의 튼튼한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 근본적인 창조질서가 무너지면 내 삶의 다른 모든 관계들도 서서히 왜곡되고 무너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3,12) 하느님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쪼들린 아담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계속해서 무너지는 인간관계의 참혹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이러한 무질서함에 일침을 가하십니다. 그러나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그분의 벌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질책이며 구원으로 향하는 새로운 첫발입니다.

 

그리고 하와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듯이(3,20) 성모님은 새로운 하와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주역으로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서 우리를 이 계획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여 주십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이주노동자 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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