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말 한마디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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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7 ㅣ No.871

[허영엽 신부의 ‘나눔’] 말 한마디의 무게

 

 

말 한디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말[言]은 물질이 아니라 저울로 잴 수 없지만 때로는 천근만근, 아니 계량할 수 없는 큰 값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고 정진석 추기경님은 대화 중 질문을 받으면 항상 한 박자를 쉬고 천천히 입을 떼셨습니다. 특히 기자회견 등 중요한 자리에서는 더 천천히 말씀하셨어요. 언젠가 내가 한번 사석에서 그 이유를 여쭌 적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할 때 항상 시작을 한 템포 쉬시고, 속도도 천천히 하시는 까닭이 있나요?”

 

“허 신부, 나는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더 말 한마디가 중요한 것을 느끼게 돼. 습관이 된 것 같은데, 가능하면 실수를 줄이기 위해 머릿속에서 완성된 문장을 구성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물론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감정을 자제 못하고 실수도 많이 하지만, 하하…”

 

그래서인지 기자들 중에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지고 기사를 쓰는데 버릴 말이 없다고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프랑스 언어학자 뤼시 미셸은 ‘말의 무게’라는 저서에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말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를 붙였습니다. 평소 말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정독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큰 문제인 ‘언어폭력, 인종차별, 외모비하, 성차별, 성희롱, 보이스피싱, 각종 사기, 가스라이팅’ 등이 점점 더 현대 사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무차별 인신공격의 악플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예전에는 연예인 등 이름이 잘 알려진 이들이 그 피해 대상이었다면 요즘에는 일반인들도 타겟이 되어 말로 전하기조차 힘든 악성댓글에 시달립니다.

 

이 모든 것들의 도구가 되는 공통점은 언어입니다. 정치가나 지도자들이 설화(舌禍) 한마디로 평생 쌓은 공든 탑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 데 반대로 생각하면 말 한마디에 만 냥 빚을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말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인생에 큰 영향 끼쳐

 

인생을 살면서 점점 더 깊이 느끼는 것은 말의 무게감입니다. 말 한마디에 좌절의 늪에서 용기가 불쑥 솟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에 땅속을 깊이 꺼지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중학교 때 국어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교과서에 있는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읽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영엽아! 너무 잘 읽었다”라고 제 이름을 불러주시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소심하고 발표도 잘못했던 나에게 큰 용기가 되었지요. 이때의 체험이 내 마음과 몸에 각인되어 훗날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사람의 말은 힘을 갖습니다. 격려나 위로 또는 칭찬하는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오죽하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을까요? 보이지 않지만 말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인간의 말이 이토록 큰 힘을 갖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힘을 가질까 비유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훌륭한 설교와 대단한 기적 등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에 대해서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여러 기적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무척 열광했습니다. 심지어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 곁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실망하면서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자신들의 세속적인 욕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가치는 사람들이 원했던 명예와 재산, 출세와는 전혀 다른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 중에도 실망하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도 혹시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썩어 없어질 빵, 세속적 가치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거나 신기한 능력이 있다는 이들 주위에는 예외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보고, 세속적인 이해를 따져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것이 인생의 참다운 지혜

 

라틴어 단어 중 ‘베네딕씨오(benedictio)’는 축복을 의미하는데 ‘좋게(bene) 말하다(dicree)’는 뜻입니다. 즉 축복이란 상대방에게 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는 버릇과 습관입니다. 그래서 인격을 갈고닦아 수양하듯 말도 갈고닦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매일 하는 말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그 힘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말을 자꾸 해보려고 노력해야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고 습관이 됩니다. 또한 어느 경우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고, 고통을 각오하더라도 꼭 해야 하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다운 지혜가 됩니다.

 

우리들은 부드럽고 고운 말만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특히 가장 자주 만나고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도 없지만 말을 할 때마다 신중하고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일 한 사람씩 칭찬하는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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