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경자료

[구약] 구약 여행48: 그런 다음에(요엘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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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06 ㅣ No.3232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8) “그런 다음에”(요엘 3,1)


벌준 뒤 다독여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요엘 예언자를 통해 심판 후에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성령 강림을 통해 이뤄진다. 그림은 엘 그레코 작, ‘성령 강림’.


요엘 예언서에는 중요한 주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무서운 심판의 날인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는 경고와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한 예언자가 이 두 가지를 선포할 수 있을까요? 의심스러울 만큼 철저히 서로 대조되는 두 주제입니다. 여기서,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지점을 표시해 주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요엘 3,1)입니다.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 후에 구원의 때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요엘 예언자가 언제 활동했는지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태풍이 불던 해’라고 하면 그것이 1950년대인지 2000년대인지 알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요엘은 메뚜기 재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엘서의 연대에 대해선 기원전 9세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부터 기원전 3세기라고 보는 사람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요즘은 주로 기원전 5-4세기라고 보지만, 메뚜기 재앙은 성경 여기저기서 언급될 만큼 이스라엘에는 종종 일어나던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메뚜기 떼가 몰려와 농작물을 모두 갉아먹었을 때, 요엘은 이 재앙이 앞으로 다가올 더 무서운 심판의 전조라고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아모스부터 시작하여 이미 과거의 예언자들이 장차 닥쳐올 ‘주님의 날’을 선고했습니다. 그날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아니라 어둠일 것이며, 죄에 대한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요엘은 이제 메뚜기 떼와 가뭄, 외적의 침입과 같은 상황 앞에서 이 예언자들의 말을 상기시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그 심판의 날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2,1 참조).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것을 견디어내랴?”(2,11).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회개입니다(2,12-17).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2,13)라는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며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회개가 전부는 아닙니다. 회개가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아무리 울며불며 땅을 쳐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 탈출기 34장 6-7절에서 선포되었던 하느님의 두 번째 이름,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라는 것입니다(2,13). 요엘서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서나 시편들에서도 특히 유배 이후의 본문들 여러 곳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미 멸망을 겪은 시점에서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이 이스라엘이 살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엘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되돌려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초점은 주님의 날과 그 심판이 아니라, 그 후의 일들입니다. 요엘을 유배 후의 예언자로 본다면, 과거에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예레미야가 예고했던 바와 같이 멸망했고 왕정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구원을 기다릴 때입니다. 요엘보다 앞서 에제키엘, 하까이, 즈카르야 등의 예언자들이 이미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었습니다. 이때에 요엘은 이제 곧 약속들이 성취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2,18)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열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보통 ‘질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을 일컬어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라고 할 때에 사용되는 그 단어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땅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의 것이고 당신께 속해 있어야 하는 땅이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당신의 땅을 누가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되찾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땅을 되찾으심으로써 “주 너희 하느님이 바로 나요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음을”(2,27) 알게 하십니다.

이어서 나오는 “그런 다음에”(3,1)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심판이 모두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 심판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을 묘사하는 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는 것입니다. 보통 주님의 영은 판관, 임금, 예언자 등 특정한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누구에게나 당신의 영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그리고 남종과 여종은 결국 특정한 성별과 나이와 신분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언을 하고 꿈을 꾸고 환시를 본다는 것(3,1 참조)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전할 말씀을 전달받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하자면 모든 이들이 예언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 예언은 사도행전 2장 16-21절에서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오신 때는 예언자들의 기다림이 성취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전에 다른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시온산에는 남는 이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내릴 것입니다. 요엘은 그 믿음을 품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세상이 무사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안에서 심판이 선고될 이유를 보고,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6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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