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54: 우리 영혼의 선성과 일그러진 모습 동시에 관상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8-23 ㅣ No.1652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4) 우리 영혼의 선성(善性)과 일그러진 모습 동시에 관상

 

 

클라라 성녀가 강조하는 ‘거울’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현실을 자기 인식과 자아를 통해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아름답고 온전하게 존재하게 해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콘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를 동시에 바라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에서 나온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인류(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을 상징함과 동시에 우리의 일그러진 영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상징해준다.

 

클라라는 「아녜스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거울의 맨 끝을 보시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을 관상하십시오. 그분은 이 사랑 때문에 십자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이 거울 친히 십자 나무에 달리셔서 행인들에게 여기에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여, 살펴보고 또 보십시오. 내가 겪는 이 내 아픔 같은 것이 또 있는지.’(애가 1,12) 그러므로 ‘이것을 내 마음에 깊이 새기고, 내 영혼은 내 안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리이다’(애가 3,20) 하시며 외치시고 울고 계신 그분께 한목소리, 한마음으로 응답합시다.”(23-26)

 

클라라는 우리 죄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하느님에 의해 각인된 우리 영혼의 선성(善性)과 우리 영혼의 일그러진 모습을 동시에 관상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프란치스코가 어느 나환우와의 만남에서 연약함과 죄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을 취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과 흡사하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에 그려져 있는 식탁 앞쪽에 네모난 상자 모양의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해 예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곳에 거울이 붙어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한다고 한다. 거기에 정말 거울이 붙어 있었을지도 모르고, 또 붙어 있었다면 이것을 본래 작가 본인이 붙인 것인지 후에 어느 누가 붙인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거울이 붙어 있었다면 그 거울이 지닌 의미는 너무도 놀라울 뿐 아니라 엄청난 은총의 초대가 된다. 왜냐하면, 그 거울을 통해 그 식탁에 네 번째 사람(그림을 보는 이)이 이 삼위일체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영원의 신비에 초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를 큰 그림 안에서 보게 되면 하느님은 인간 의식 주변을 영원히 도시며 우리 인간이 당신과의 일치를 위해 준비되기를 바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히브리 예언자들과 가톨릭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수피 신비주의자들은 결혼이나 신방, 혹은 신랑과 신부와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61,10; 62,5)와 시편,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페 5,25-32) 그리고 요한 묵시록(19,7-8; 21,2) 등에서 나타난다.

 

이런 곳에서 한결같이 얘기하는 바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신부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는 인간의 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과 일치하고자 하시는 의지를 표현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고 계시고,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까지 묘사하고 계신다.

 

이것을 동방교회 쪽에서는 과감하게 신화(神化-divinization 혹은 theosis)라는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결합 혹은 일치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가능케 해 주신다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서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이런 일치 혹은 결합이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믿고 받아들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 결합은 나중에 (그것도 우리가 선하게 산 이후에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하신다. 이 결합은 우리가 출발했던 기원이고, 또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야 할 현실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인류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곱게 단장한 신부”(묵시 21,2)가 되는 하느님의 때인 것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혼인 잔치를 위한 제단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시는 영원한 신적 신랑이 되신다.(마태 9,15; 요한 3,29 참조)

 

성경 계시의 분명한 목표이자 방향은 충만하고 완전하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격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육화의 영원한 신비는 결국 여기서 그 중요성이 드러나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시작될 것이다.”(묵시 19,7-9) 이렇게 될 때 역사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공허함이 아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을 잡게 된다.

 

이 관점은 건강하고 행복하며 희망 가득하고 생명력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의 이 시대는 참으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때다.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태초의 당신과의 일치로 되돌리시면서 참으로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창출해 내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 ‘거울’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현실, 즉 본래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된 모습을 제대로 보고 하느님과 우리의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고쳐가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과 분리되어 하느님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인간 자신의 이미지도 망가트려 버린 우리 인간이 자기 인식과 자아의식을 통해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아름답고 온전하게 존재케 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조금씩 고쳐나가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8월 22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77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