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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폴란드 레자이스크(15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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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7 ㅣ No.873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폴란드 레자이스크(1590년)

 

 

–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성상

 

 

1) 시대적 배경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되고 신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물자가 유입되자 유럽은 각 도시간 무역이 활발해졌다. 교류의 활성화로 도시가 확장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직업들이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직업들이 세분화하여 다양한 직업군이 나타났다. 1517년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신교가 새로운 직업과 이윤추구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교류가 활성화된 도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신교를 추종하게 되었다.

 

당시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에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이 있었고, 이곳에 1347년에 건립된 성모 승천 대성당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1572년부터 이 대성당이 완전히 루터교 교회가 된 것이다. 폴란드 수도의 중심부에 있던 가톨릭을 대표하던 대성당이 루터교 교회가 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루터교가 수도 크라쿠프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핵심부인 남부를 순식간에 장악하였고, 폴란드 국민과 지그문트 3세 국왕은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긴급한 시점에 서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성모님이 폴란드의 남동부에 위치한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셨다.

 

 

2) 성모님의 발현

 

1590년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나무꾼 토마시 미하웨크는 작은 마을 레자이스크의 북쪽 숲속(지금의 대성당이 있는 위치)에서 강렬한 빛과 함께 성자를 안고 나타나신 성모님을 목격했다. 성모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나의 아들을 위한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고, 여기서 나의 아들은 사랑받고 존경을 받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누구든 나에게 중보기도를 청하는 사람은 축복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지 전경. 왼쪽이 수태고지 대성당, 오른쪽은 베르나르딘 수도원

 

성모님은 토마시에게 이 메시지를 교회 당국에 알려 성당을 지을 것을 요청하셨으나 토마시는 그저 두려움에 떨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성모님은 다시 한번 그에게 발현하시어 침묵하지 말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셨다. 토마시는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을 선택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지만 결국 성모님의 요구를 받아들여 성모님의 발현과 메시지를 지역 교회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레자이스크는 너무 작은 마을이어서 새로운 교회를 지을만한 능력도 안 되고 이미 교회가 있어서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의심이 많았던 보좌 사제는 토마시가 거짓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생각하여 이단의 혐의로 토마시를 고발한 후 법정에 세우고 투옥하여 고문까지 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후 석방된 토마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성모님을 만났던 숲속에서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를 세우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이라고 부르며 성모님의 발현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 대성당 내 유리 경당에 모셔져 있는 토마시의 십자가

 

 

그 결과 루테니아 등 주변 여러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보좌 사제는 교회에 의해 조사되고 인정되지 않은 개인숭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성모님 발현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토마시의 십자가를 순례자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십자가에 불을 붙였지만 놀랍게도 나무 십자가는 어떠한 손상도 입지 않았으며 불만 저절로 꺼졌다. 많은 순례자들이 직접 목격한 이 현상은 바로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십자가는 위대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 성지의 대성당 내 유리 경당에 보존되어 있다. 이 십자가 기적이 있은 후 새로 부임한 얀 신부는 즉각 성모님의 요청대로 작은 목조 경당을 세웠으나 순례자들이 계속 증가하여 이들을 수용할 만한 더 큰 성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루터교는 폴란드 남부의 주요 도시인 브로츠와프, 카토비체, 크라쿠프를 장악한 후 계속 동쪽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제 폴란드의 남동쪽의 큰 도시로는 제슈프만 남아 있었다. 당시 폴란드의 주요 도시가 모두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인접한 남부에 위치해 이 지역이 루터교에 의해 장악된다는 것은 곧 폴란드 전체가 루터교에 장악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성모님이 제슈프 인근의 마을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시어 성당을 세우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성당이라는 건물 자체의 의미보다 이 성당을 중심으로 폴란드 내 루터교의 확장을 막고 가톨릭을 수호하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

 

 

– 성지의 남쪽 파사드. 앞에 넓은 광장과 야외 성전이 있다.(좌) 성지의 서쪽 파사드. 입구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성상이 있다.(우)

 

이를 계기로 지그문트 3세 국왕은 반종교개혁을 선언하고 브레스트 일치를 주도하는 등 여러 교회들을 가톨릭으로 통합하려 노력했으며, 동시에 1596년 더 이상 루터교로부터의 회복이 불가능한 크라쿠프를 과감히 포기하고 가톨릭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변방의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기로 했다. 500년 이상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와 남부 여러 도시의 반발에도 국왕이 이처럼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여러 배경 중에 성모님의 발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왕은 수도를 이전한 후 바르샤바에 수많은 가톨릭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레자이스크 발현 성지에 성모님의 대성당과 베르나르딘 수도원을 지을 수 있도록 대규모 지원을 하였다.

 

 

– 왼쪽부터, 원래의 성모화, 175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봉헌한 왕관과 면류복,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봉헌한 왕관과 면류복

 

16세기 무서운 속도로 유럽에 확산하고 있었던 루터교로부터 폴란드와 가톨릭을 지켜 내고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덕분에 가능했다. 1608년 베르나르딘 수도원이 레자이스크의 성모 발현 성지로 이전하였고, 1628년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성모님의 발현을 기념하는 대성당이 봉헌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하여 성지의 북쪽 숲속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상이 세워진 골고다 언덕과 십자가의 길, 성모님의 길, 병든 자를 위한 길 등이 조성되어 있다.

 

– 성모화가 모셔진 성모 경당

 

4) 성모화

 

성모님이 성자를 안고 있는 성모화는 1590년 이전에 그려진 레자이스크 출신 에라즈마 신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레자이스크에서 발현하신 성모님도 성자를 안고 계셨기에 이 성모화가 발현하신 성모님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모화는 발현 장소에 최초로 세워진 목조 경당에 모셔졌고, 현재의 대성당이 건립된 이후에는 성당 내에 별도의 경당을 만들어 모셨다. 1752년 9월8일 성모님 탄생 축일에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왕관을 레자이스크의 성모자화에 봉헌하였고, 시에라코프스키 주교는 교황이 수여한 왕관을 성모님과 성자의 머리 위에 씌우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1981년 10월 누군가가 대성당에 침입하여 성화를 훼손하였고 성자의 왕관을 훔쳐 갔다. 이 사건으로 신자들과 지역 교구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속죄 행렬에 참여하며 새로운 왕관을 마련하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이에 1983년 6월 폴란드의 체스트호바를 순방하여 사목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화에 새로운 왕관과 면류복을 봉헌하였다. 2002년에는 성모화 대관식 250주년 기념행사가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5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 도곡동성당 인자하신 모후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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