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비움의 길, 채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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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08 ㅣ No.458

[레지오 영성] 비움의 길, 채움의 길

 

 

며칠 전 밤에 성지의 쉼터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앉아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자연 속에서 바치는 기도도 좋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날의 밤은 정말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밝게 빛나는 별들과 환한 둥근 달이 너무나 예뻤고, 밤의 정막을 조용히 깨뜨리는 조그마한 벌레 소리 역시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이런 밤에 제가 키우는 강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서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글쎄 테이블 위에 잠시 놓아 둔 저의 안경을 강아지가 몰래 물고 가서 다시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렌지에는 심한 흠집을 남겨놓아서 도저히 재사용이 불가능했습니다. 안경테 역시 심하게 휘어져 있었고 이곳저곳에 이빨 자국이 가득합니다.

 

다음 날 안경점에 갔습니다. 전에는 코의 눌림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값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가벼운 안경테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굳이 가벼운 안경테가 필요할까 싶어서 저렴한 안경테를 찾았습니다. 만 원짜리부터 찾다가 2만 원짜리 안경테를 선택했습니다. 이제 안경렌즈를 선택할 차례입니다. 전에 갔던 안경점에서는 이런 렌즈가 좋다고 하면서 주로 수입 렌즈를 추천하곤 했었지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예 비싼 수입 렌즈를 꺼내보이지도 않고 그냥 국산렌즈가 만 원, 이만 원, 삼만 원으로 있는데 이 중에서 하나 선택하라고 합니다.

 

고가의 안경테를 선택하면 무조건 고가의 안경 렌즈를 추천받았는데, 저가의 안경테를 선택하니 고가의 안경 렌즈는 아예 말씀도 하시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전에 괜히 비싼 안경을 썼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렴한 안경으로도 충분했는데 안경점 직원의 호객행위(?)에 넘어가서 이제까지 제 분에 넘치는 안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한 것을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선호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만족의 삶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풍족한 삶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차고 넘치는 것들을 모두 누리며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왜 더 많은 것과 더 좋은 것들만을 원하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들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은 욕망을 줄이는 ‘비움의 길’

 

세상의 것들은 계속해서 채워야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것들은 그 반대로 계속해서 비워야 만족과 기쁨을 얻습니다. 미국의 폴 사이먼스라는 경제학자는 행복의 공식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행복 = 소유 / 욕망”

 

즉, 소유를 늘리거나 아니면 욕망을 줄이면 행복할 수 있다는 공식입니다. 소유를 늘리는 삶이 바로 세상의 길로 ‘채움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은 욕망을 줄이는 삶으로 ‘비움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이 훨씬 더 편하고 쉬운 삶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훨씬 더 쉽고 편한 길로 갈 수 있도록 당신 안에 머물 것을, 당신의 뜻을 따를 것을 그토록 힘주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태국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과일의 여왕이라고 하는 ‘두리안’을 꼭 먹어봐야 한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맛있기에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행 가이드에게 두리안을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두리안을 받아든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일에서 나오는 고약한 냄새는 ‘과일의 여왕’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먹어보고 싶지 않은 냄새였지만, 하도 사람들이 이 맛은 반드시 봐야 한다는 말에 기대감 반, 거부감 반의 마음으로 두리안을 썰어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입 안에 들어가니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맛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두리안의 맛을 기억하고 있는 저는 이제 열대 지역에 가게 되면 ‘두리안’을 반드시 찾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한 번만 맛들이면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쁘게 내어놓는 순교자들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말씀을 맛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어 보인다고, 또한 바보같이 미련한 모습이라면서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만 익숙해지려고만 노력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주님을 가슴 떨리는 분으로 맞아들여야

 

소유를 늘리는 채움의 길과 욕망을 줄이는 비움의 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끊임없이 채우려고 하는 채움의 길은 아무리 채워도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인 비움의 길은 욕망을 줄여 나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들이 적더라도 늘 행복하게 됩니다. 어떤 길이 더 쉽고 편한 길일까요?

 

자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남편과 같이 산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남편을 보면 가슴이 떨려요.”

 

그러자 같이 있었던 다른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남편을 보면 가슴이 떨린다고요? 나는 남편을 보면 치가 떨려요.”

 

혹시 같이 있으면 가슴 떨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반대로 치가 떨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차이는 그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떨까요? 주님도 가슴 떨리는 분이 또 반대로 치 떨리는 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가슴 떨리는 분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길인 비움의 길을 향해 걸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6월호,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갑곶성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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