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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둔 부모에게 - 당신은 어떤 행복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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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113

청소년을 둔 부모에게 - 당신은 어떤 행복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 양면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공통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동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부모의 행복에 대한 기준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는 데 있다.

 

요즘 부모들은 한결같이 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공부를 잘하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성인이 된 뒤의 인적 네트워크를 위해 잘사는 집 아이와 놀게 하고 경제적으로 열악하거나 집안이 좋지 않으면 어울리지 말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아파트나 자동차 등을 기준삼아 또래 집단을 형성한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도 있다.

 

 

비교나 경쟁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물질적인 가치관은 다만 순간적인 쾌락을 줄 뿐이고, 명예만을 추구하는 가치관 역시 삶에 감동을 선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돈과 명예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모 탓에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반 친구를 업신여기고, 1등을 하려고 커닝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행복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을 얻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렇듯 남과의 비교나 경쟁을 전제로 한 조건들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 삶 자체를 불행하다고 인식하게 되고, 결국 심하게 좌절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포기하게 된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자살을 시도하거나 집안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탈선하는 아이들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어릴 적 나는 성당에 참 열심히 다녔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곧바로 성당으로 뛰어가곤 했는데, 주일미사가 없을 때에도 온종일 성당에서 공부도 하고 놀면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땅히 놀거리가 없는 심심한 시골 읍내에서 성당만큼 재미난 곳은 없었다.

 

말하자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일종의 마을회관이었다고나 할까? 동네 어르신들은 성당 교리실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셨고, 내 또래 아이들은 작은 안마당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성당의 모든 살림은 신부님과 수녀님이 꾸려가셨는데, 아무리 작은 시골 성당이라고 해도 온갖 대소사를 하나씩 다 챙기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해나 추석, 부활과 성탄대축일에는 성당에서 작은 잔치가 열렸다.

 

당시 복사 활동을 한 나는 성당에서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마당을 쓸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등 신부님과 수녀님을 도왔다. 아직 어린 탓에 돕자고 한 일이 오히려 말썽이 된 적도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를 돕는 일이 공을 차며 뛰어노는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 세상에 여러 가지 종류의 행복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행복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던 때였다.

 

 

더불어 사는 삶의 행복

 

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가 쾌락적 행복으로, 의식주와 관련한 본능적인 욕구가 충족될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두 번째는 성취적 행복으로, 돈이나 명예, 출세 등 이른바 성공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다. 곧 목표를 이뤘을 때의 성취감이 이런 즐거움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온전한 행복으로, 남을 위해 헌신했을 때 느끼는 충만감을 뜻한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마하트마 간디, 마더 데레사 수녀 등이 이런 행복을 추구하며 산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타적 삶이 주는 기쁨이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긍정적 감정 가운데 최고 수준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쾌락적 행복과 성취적 행복에 너무 과도하게 몰입되어 살고 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며 한층 나아가 자기 중심적 자아실현을 하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신체적 감정적인 일시적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에 의미를 두고 가치를 갖는 내적 욕구를 충족해 주지는 못한다. 특히 물질적 혜택이나 목표 성취 등으로 말미암은 행복은 너무 짧아서,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즐거움과 더 큰 목표를 찾게 한다. 불행하게도 이 악순환은 끝이 없다.

 

반면 이타적인 즐거움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준다.  재난을 입은 사람들을 도와줄 때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기쁜 것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가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행복감은 그 가치 자체가 늘 기억에서 재생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영화 한 편을 본 즐거움은 희미해도,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감동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지 않은가.

 

이제 부모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행복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모든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이나 마더 데레사 수녀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부모라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남과 더불어 사는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줄 의무가 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할 때 얻을 수 있는 쾌락적 행복과 성취적 행복도 있지만, 그런 행복 외에 남을 위하고 봉사하면서 남과 더불어 살 때 느껴지는 온전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청소년 시기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 문용린 요한 보스코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주교회의 자문위원. 한국가톨릭교육자연합회 회장. 2000년에 교육부장관을 지냈고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부모가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 “행복한 도덕학교” 등의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문용린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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