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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세례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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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6 ㅣ No.81

[전례 상식 / 교회 건축] 세례당 (1)

 

 

세례예식

 

그리스도교의 입교예식은 초기 그리스도교 전례 중 가장 장엄하고 감동적인 예식이었다. 그러나 이 예식이 지니고 있었던 장엄함은 갓난아기들에게 세례를 주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상당히 쇠퇴하게 되었다. 이 입교예식은 성찬례의 거행과 마찬가지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거행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를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 첫째가 구마식과 사탄의 포기를 약속하는 예식이고, 두 번째가 물로 씻는 예식으로 이루어지는 본연의 세례예식이며, 세 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예식이 도유 또는 크리스마의 도유(견진)였다.

 

예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구마식에 참여하여 죄와 죽음의 자리인 서쪽을 향하여 사탄을 끊어버린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동쪽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했다. 이러한 첫 예식들을 마친 뒤, 예비자들은 지정된 곳에서 옷을 벗고 구마기름으로 도유를 받는다. 그런 다음 수조(水槽)에 들어가 세 번 잠기거나 머리나 이마를 물로 씻기는 형식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예비자들은 바로 그 장소나 혹은 다른 장소로 옮겨 이마와 감각기관들에 크리스마 성유로 도유를 받는다. 그때 새 영세자들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재생의 상징인 흰 예복을 입고 주교의 강복을 받는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최종적으로 성찬례에 참여하기 위해 성당으로 갈 수 있었다.

 

세례를 주는 이는 주교나 사제 또는 부제였다. 본래 세례식은 많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년에 한 번, 부활성야 때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성탄 밤과 성령강림대축일에도 행해졌고 더 후기로 가면서는 커다란 축일들에 세례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습은 특별히 동방교회들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전례의 예식과 세례당의 구조물들은 모두가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의미를 강조하는 일련의 상징들이었다. 예를 들면, 테르툴리아노는 부활성야 때에 세례식을 거행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세례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날 중간에 행해지는 것이며, 세 번 물 속에 잠그는 것은 골고타의 죽음에서 부활하시기까지 예수께서 무덤에 묻혀 계셨던 3일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들은 세례식의 동작과 세례당 내부의 벽을 장식하는 모자이크나 부조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밀라노의 성녀 테클라 세례당과 로마의 라테라노 세례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례당의 기원

 

세례는 사도시대부터 베풀어졌지만 두라 에우로포스(Dura Europos) 세례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유적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로마의 카타콤바들에 있는 세례소들이 자주 거론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후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특히 프리쉴라(Priscilla) 카타콤바에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례소가 있었던 것으로 거론되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폰치아노(Ponziano) 카타콤바의 세례소가 유일한 예이다. 그러나 이것은 6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또 나폴리의 성 제나로 카타콤바의 세례소는 8세기 중엽의 것으로 확실시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거의 요르단강을 연상케 하는 샘이나 강에서 베풀어졌다. 그러나 점차로 필요에 의해 세례 전용의 인공적인 수조나 샘을 만들어 그곳에서 세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또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와 에게해협의 섬들에서 발견되듯이 어떤 특정한 장소에 커다란 대야 같은 것을 갖다놓고 세례소로 쓰기도 하였다.

 

아마도 콘스탄티노 대제 이전의 로마 성당들에 세례소가 있었다는 정보를 발견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3세기 초에 이미 전례와 세례를 위한 구조물들이 특정한 형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들도 발견된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두라 에우로포스의 성당이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세례소는 예배의 장소와 분명히 구별하여 네 기둥 위에 닫집을 만들어 그 안에 수조(1.61m x 0.95m x 0.65m 깊이)를 놓은 것이다. 이 수조의 벽면에는 구약과 신약의 여러 장면들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례소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방은 애찬(agape)을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또한 인호를 새겨주거나 크리스마의 도유를 위한 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예와 고대 그리스도교 입교예식을 전해주는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세례예식과 세례의 장소가 전례적으로 또 건축학적으로 완성되어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례소가 예배의 공간과 확실히 구별되는 세례당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전해주는 역사적인 유적 증거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세례당의 명칭과 바실리카 안 위치

 

세례당, 또는 세례대(baptisterium, βαπτιστηριον)는 건물 본연의 기능에서 유래한 고유한 이름 외에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이 구조물은 원형이나 다각형으로 지어지거나 또는 물과 숲의 요정인 님프의 신전이나 욕조, 물탱크와 유사하게 만들어져 ‘님프당’(nymphaeum)이나 ‘샘’(fons)으로 불렸다. 또 세례예식이 ‘물에 적심’(tinctio)으로 행해진다고 해서 ‘적심당’(tinctiorium)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우리 물고기들(piscicu1i)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물고기처럼 물에서 태어난다.”는 테르툴리아노의 표현(세례론 1,8)에 따라 피쉬나(piscina :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항’이나 후기에는 수영장을 뜻하는 단어로도 쓰인다.)로 불리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영이 구원되고 조명된다는 개념을 지닌 ‘정화소’(lavacrum, φωτιστηριον)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세례당 또는 세례소의 위치는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남쪽에 있는가 하면 북쪽에서도 발견된다. 제대 후진(abside, apse) 근처에 배치하기도 하고 측면의 한 공간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안마당(atrio)이나 성당 입구의 현관(nartece, narthex)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서방에서는 성당과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세례당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으나 시리아와 소아시아 그리고 에게해의 여러 섬들과 같은 동방의 여러 지방에서는 바실리카에 연결해 건축했다. 이런 지방들에서는 주로 제단(presbyterio) 측면의 익랑(翼廊)에서 세례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에집트의 엘 플루시에(El Flousiyeh)와 같은 곳에서는 바로 제단에 연결해 세례소를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4세기에 건축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례소는 차단하는 공간이나 복도로 예배의 공간과 구분되지만 알제리의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처럼 제단 밑 지하에 만드는 경우도 있고 크레타섬의 고르티나(Gortyna)의 경우처럼 예배의 공간 안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바실리카와 관련해 그 위치가 어디이든지 세례소 또는 세례당은 바실리카의 한 부분이고 공동체의 예배공간에서 큰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세례당(소)은 주교좌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징이 되기도 했다.

 

보통으로 공동체가 아주 큰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례당은 하나로 충분했다. 혹시 두 개나 그 이상의 세례당이 한 도시에 있는 경우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공동체가 그 도시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탈리아의 라벤나는 그 좋은 예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가톨릭 교회의 정통신앙과 아리아니즘의 세례당을 각각 발견할 수 있다.

 

[경향잡지, 1995년 6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본지 주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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