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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성모신심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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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1 ㅣ No.254

[경향 돋보기] 성모신심 바로 알기

 

 

1985년부터 시작된 나주 성모동산 사건은 한국 가톨릭교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고 건강한 신앙을 위협해 왔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성모 마리아에 대해 바르게 알고 바르게 공경해야 하겠다. 먼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공경에서 오는 그릇된 교리와 잘못된 신심을 바로 잡아야 한다. 특히 사목자들은 강론, 저술, 기타 표양을 통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와 신심을 바르게 전달해 주어야 할 것이다.

 

평화신문은 창간 10돌을 기념하여 ‘종교에 대한 사회일반인식’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천주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1등이 성모 마리아(15%), 2등이 미사(14%), 공동 3등이 성당(9%)과 교황(9%), 5등이 수녀(8%), 6등이 김수환 추기경(7%)의 순이었다. 여전히 천주교 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성모 마리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현실이다. 또 신부들은 등수에도 없는 것을 보니 수녀들보다도 못한 것 같아서 반성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잘못된 성모 신심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께 초점을 두면서도 마리아를 주목하면서 모든 신자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존경을 드리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마리아는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주님이신 예수님 가장 가까이서 협력하신 분으로 공경을 드리면서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르게 되었고, 교회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 그리고 거룩한 어머니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중세(500-1500년)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예수님보다도 점점 마리아께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가 마치 하느님처럼 공경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점점 더 무분별하고 과장되게 마리아를 숭배하였다. 성모 마리아가 인간인지 하느님이신지를 구별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마리아께 기도하고 매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청하는 것보다 마리아께 청하면 더 쉽게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마리아를 예수님보다도 더 자비로운 분으로 생각하여 ‘자비의 여왕’으로 불렀다. 일부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로 바꾸어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리아를 여신으로 숭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었고, 마리아 공경을 위해 수많은 성당이 건축되었으며, 순례지에는 마리아의 모유라고 하는 것까지 보관되고, 성모 미사만 드리는 신부도 있었다.

 

당시 신학자들은 더욱 잘못된 마리아 신심을 부추겼다.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 성모송이나 묵주기도를 하지 않고 주님의 기도만 하는 것은 이단이다.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없으며, 심지어 악마들은 하느님보다도 마리아를 더 두려워한다.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요, 마리아는 자비로운 구세주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단이다. 마리아는 모든 은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은총은 마리아를 통해서 온다. 아무도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으며 우리의 구원은 마리아의 손에 달려있다. 마리아의 명령에 하느님까지 복종한다. 마리아는 전지전능한 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하느님이 단죄하시더라도 마리아가 원하면 구원될 수 있다.” 나아가 마리아를 예수님과 함께 ‘공동구세주’라고 믿기까지 하였다.

 

18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계시를 주신다는 보고가 잇달아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마리아 신심을 더욱 확장시켰다. 지금까지 성모 발현에 대한 수많은 보고가 있었지만 교회 교도권이 그 진실성을 인정한 발현은 다음의 10번이다. 멕시코의 과달루페(1531년), 프랑스 파리의 뤼 뒤 박(1830년), 프랑스의 라 살레트(1846년), 프랑스의 루르드(1858년), 프랑스의 퐁멩(1871년), 아일랜드의 녹(1879년), 포르투갈의 파티마(1917년), 벨기에의 보랭(1932년), 벨기에의 바뇌(1933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1945년).

 

미국의 베이사이드나 나주의 성모 발현은 공식적으로 부인되었고, 메주고리예의 성모발현은 아직 조사 중에 있어서 최종결정이 유보된 상태다.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열풍은 교황 비오 12세의 재위기간(1939-1958년) 동안 최고조에 달했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로 교회는 지나친 마리아 공경을 반성하고, 올바른 마리아 공경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사제들과 신자들의 무분별하고 지나친 마리아 공경과 신심은 오히려 성모 마리아를 왜곡시키고 있고, 성모 마리아 발현과 관련된 잘못된 믿음은 건전한 가톨릭 신앙을 해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마리아와 관련된 잘못된 성모신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으로 공경하는 신심이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시다. 신자들은 정확한 인식 없이 무의식중에 인간이신 마리아를 하느님과 혼동하여 여신처럼 무분별하게 공경할 수 있기에 사목자들의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둘째, 성모 마리아를 구세주로 믿는 신심이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성모 마리아는 구세주가 아니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해 주시는 분이시다.

 

셋째,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은 성모 마리아 발현과 기적을 믿는 신심이다.

 

나주 성모동산 사건과 같은 경우로, 성모 마리아 발현과 사적 계시의 진실성은 교도권의 결정을 따라야 하기에 개인이 주관적으로 체험한 현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섣불리 믿어서는 안 될 것이고, 반드시 교회의 공적인 확인을 따라야 하겠다.

 

 

올바른 성모 신심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구세주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 초점이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분별한 공경을 삼가야 한다. 사적인 신심에 따라 지나치고 과장된 공경을 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올바른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사목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성모 마리아를 올바로 공경하도록 참된 신심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왜 자꾸 신흥종교가 생겨나는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심에 치우쳐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우리도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고단한 인생길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나약한 우리의 본성에 성모님은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성모님의 굳은 신앙과 삶의 태도를 본받아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야겠다. 성모님과 같은 강인한 모성과 정신력으로 지혜롭고 굳건하게 살아야겠다.

 

성모님은 여신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성모님이 초점이 아니었다. 성모님에 관한 성경의 모든 증언은 언제나 예수님이 초점이었다. 예수님이 중심이다. 성모님은 항상 예수님 뒤에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참된 성모님 공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판단의 기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여 응답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계시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가 있다.

 

공적 계시는 ‘성전과 성경’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성전은 입으로 전해지고 생활로써 실천되던 하느님 말씀이고, 성경은 글로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다. 사적 계시는 특별히 개인이나 공동체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인데, 공적 계시를 도와주는 역할이 그 최종 목적이다. 성모 발현은 하느님의 뜻을 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니 사적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모 발현과 사적 계시를 누가 진실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나?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발현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가 발현을 목격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가톨릭 신앙은 공적인 신앙이기에 공적인 기관에서 그것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아무도 자기에게 스스로 세례를 줄 수 없고, 아무도 자기에게 스스로 사제품을 줄 수 없다. 공적인 기관에서 세례를 주고 사제로 서품하는 것이 공적인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가톨릭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교회를 운영하는 권한을 주셨다. 이것이 교도권이다. 교도권은 가톨릭 신앙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유권적으로 최종적인 판단을 함으로써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고 교회의 일치를 유지한다. 이 교도권이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게 이어져 행사되는 것이다.

 

주교들은 공적 계시를 해석하거나 사적 계시를 진실한 것으로 결정하고 판단한다. 주교들의 최고 책임자가 교황이니 최종 판단의 주체는 교황이다. 따라서 사적 계시는 반드시 교도권의 결정과 판단을 따라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교회일치에 혼란과 폐단을 줄 수 있다.

 

어떤 사적 계시가 주어졌다는 보고가 접수되면 교도권은 그 사적 계시가 진실한 것인지를 판단한다. 사적 계시에 대한 전통적인 식별 기준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교리적 기준이다. 사적 계시의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해야 한다.

 

둘째, 심리적 기준이다. 사적 계시를 체험한 사람의 심신이 건강해야 한다. 균형을 갖춘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병적 소인은 없는지 면밀하게 관찰되어야 한다.

 

셋째, 영적 결실의 효과다. 사적 계시의 결과로 영적인 결실들이 드러나야 한다.

 

최근까지 한국 가톨릭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나주 성모동산 사건은 광주대교구장의 교령을 통해 최종적으로 파문 결정이 내려졌다. 모든 가톨릭 신앙인들은 광주대교구장의 교령을 성실한 순종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목자들의 배려

 

나주 성모동산 사건에 대해 먼저 각 교구에서는 사제총회나 연수를 통해 파문 교령을 거듭 공지하고 사목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야 하겠다. 결국 사목 현장에서 활동하는 일선 사목자들의 노력이 가장 확실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구민들이 잘못된 신심에 빠지지 않도록 교구 주보나 교구 홍보물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구민들을 교육해야 한다. 모든 사목자들은 광주대교구장의 교령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나주를 방문하는 신자들이 근절될 때까지 사목적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본당에서는 본당 사목자들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관건은 본당 사목자들의 활동이다. 본당 사목자들은 강론이나 훈화, 공지사항 등과 같은 기회를 통해 거듭 나주 사건과 같은 잘못된 성모신심의 부당함을 알리고 그릇된 신앙에 미혹되는 신자들이 없도록 적극 대처해야 한다. 신자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사목자들에게 맡겨진 거룩한 임무이기에 사목자들은 목자로서의 사명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순응하는 겸손한 자세

 

가톨릭 신앙은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공적인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을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들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교도권의 판단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보존한다.

 

‘사적 계시나 신비적 현상’과 같은 개인적인 신앙 체험은 반드시 교도권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교도권에 순명하지 않고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사적 계시나 신비적 현상이 없는 것이 훨씬 낫다. 교도권에 순명치 않는 사적 계시나 신비적 현상은 오히려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고, 교회를 갈라놓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도중심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너도나도 자기 주장에 따라 교회가 갈리는 것을 막으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나의 체험을 절대시하기보다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며,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이다.

 

교도권의 정당한 결정에 순명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가톨릭교회를 부정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흥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시고 그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통해 이어지는 가톨릭교회를 부정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분열을 원치 않으셨기에 예수께서는 사도들 위에 가톨릭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가톨릭교회가 일치를 보존하면서 종말까지 인류구원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신 것이다.

 

* 전광진 엘마노 - 대구대교구 신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이자 교구 사목기획실장이다.

 

[경향잡지, 2009년 5월호, 전광진 엘마노(대구대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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