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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발칸: 두브로브니크 눈부신 햇살보다 빛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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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9 ㅣ No.1428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두브로브니크 눈부신 햇살보다 빛나는 역사


 

 

 

발칸은 눈부신 두브로브니크의 햇살로부터 왔다. 그 고도(古都)의 실루엣과 아드리아해의 절경으로 우리에게 왔다.

 

오랫동안 ‘유럽의 화약고’라는 수식어나 ‘사라예보 사건’ 등으로 각인된 곳이라, 한 작가가 「두브로브니크는 그날도 눈부셨다」며 찬탄한지 15년이 넘도록 발칸은 우리에게 멀고도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배우가 커피 광고를 찍고,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그램에서 크로아티아를 다녀오자, 마침내 발음도 어려운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짐을 싸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29년 버나드 쇼가 방문했던 두브로브니크는 천국의 한나절이었던 것일까? 그는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려면 두브로브니크를 찾아라.”고 권했다. 그가 발견한 천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지만, 바이런이 “아드리아해의 진주”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로버트 카플란이 “영광스러운 불사조 도시 두브로브니크”라고 쓴 것이 비단 아름다운 자연환경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상 두브로브니크는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포용력 있는 시민 정신의 상징이었으며 무기에 의존해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평하는 기록들을 봐서도 그렇다.

1991년 유고 내전 당시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를 저지하기 위해 8개월이나 계속된 세르비아군의 폭격에 맞서, 프랑스 작가 장 도르메송 등 유럽의 지성인과 부호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 도시를 더 이상 파괴하지 말라며 인간방패를 자처한 것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필시 그들은 찬탄을 자아내는 자연환경 너머의 어떤 의미들을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일 테다.

이 도시는 ‘라구사’라는 이름으로 거의 천년을 이어온 해운 공화국이었다. 이미 7세기부터 베네치아와 경쟁하며 발전해 온 라구사 공화국은 해상무역으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뜻밖의 시스템을 갖추었다. 예를 들어, 이미 13세기에 보육시설을 갖췄고, 15세기에는 의료 체제와 무상 공교육이 시행되었다. 1436년에는 스르지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로 상수도 시설을 정비해 24시간 모든 가정에 차별 없이 공급했다.

비단 도시의 공공 시스템만이 아니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동맹이었음에도, 패전국인 세르비아의 왕자들이 망명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또한 1416년에는 지중해에서 수지맞는 사업이던 노예무역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매매제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들은 정직과 자유를 모토로 삼았고 허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렉터 제도 또한 타락하기 쉬운 권력을 견제하고, 최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최고 통치자로서 선출직이었던 렉터의 임기는 딱 한 달이었는데, 그동안 렉터는 집을 떠나 렉터궁에 머물며 직무를 수행했다. 명예로운 임무였지만 여러 번 렉터에 뽑혔던 사람들의 불평을 들으면 그다지 할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집무실이 ‘금박을 입힌 감옥’과 진배없다고 고충을 털어놓곤 했다. 문 위쪽에 블라시오 성인의 조각상이 서 있는 필레게이트를 통과해 구시가로 접어드니, 오노프리오 샘이 단아하게 자리잡은 플라차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브로브니크의 혈관과도 같은 그 거리는 원래 좁은 바다였던 곳을 양쪽의 시민들이 돌로 메웠다고 한다.

샘 맞은편에 있는 프란치스코수도원은 희귀한 고대 필사본을 많이 소장한 도서관으로도 유명한데, 이 수도원은 흑사병이 창궐하기 전인 1317년부터 진료활동을 시작해 1391년에는 세계 최초로 일반인에게 약국을 개방했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약국은 질이 좋고 가격도 저렴한 제품 덕분에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지나가고 나면 수분 크림이나 립밤 등이 동나버린다고도 한다. 60개의 기둥이 우아한 안뜰을 둘러싸고, 각각의 기둥머리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장식되어 있는 회랑을 지나 정말 오래된 냄새를 풍기는 박물관도 구경했다.

플라차 거리의 끝자락인 루차 광장에 성 블라시오 성당이 있었다. 316년경 아르메니아 세바스테의 주교로 순교한 블라시오 성인이 어떻게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이 되었는지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대략 11세기경에 라구사 공화국의 한 사제 꿈에 그가 나타나 베네치아의 공격을 예언했다. 이에 서둘러 로브리예나츠 요새(114쪽 사진)가 구축되었고, 실제로 삼개월 후 감행된 베네치아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성인은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와 함께했다. 블라시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초 두 자루를 이용해 ‘목병의 수호성인’인 블라시오에게 전구하며 축복도 받았다.

눈부신 태양이 빛나는 오후였다. 성곽에 오르니 사방으로 환히 열리는 아드리아해와 구시가의 정경이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하지만 성 안 마을 집에는 폭격으로 부서진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균일하지 않은 붉은 지붕 역시 그날의 상흔이었다. 무심한 햇살 속에 빨래만 평온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거기 사람이 살았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진이나 외침(外侵)으로 무너지고 다치고 죽기도 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공동선을 염두에 두었고, 자유를 귀하게 여겼다.

두브로브니크의 작가 이반 군둘리치(Ivan Franov Gunduli?, 1589-1638년)는 외쳤다. “신은 우리에게 세상의 보물인 자유를 주었다. 자유만이 두브로브니크를 빛내는 유일한 장식이다. 세상의 모든 금을 주어도 아름답게 빛나는 자유와 바꾸지 않는다.” 이렇게 장담할 수 있는 자긍심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아직도 풋내 나는 어린 자유가 때로 상처를 입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된서리를 맞기도 하는 이 땅에서,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자유를 귀하게 여기고 타인의 자유와 권리까지 소중하게 여기며, 소박하되 명예롭게 살 줄 알았던 두브로브니크의 역사가 더 없이 부러운 이유였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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