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성경자료

< 요한복음 해설 (3장 1절-3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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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 [kyungju46] 쪽지 캡슐

2014-11-17 ㅣ No.2859


복음사가 1625-30년경,
야콥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
캔버스에 유채, 134 x 11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성화 해설>

마태오, 마르코, 루카 그리고 요한(중앙의 흰 망토를 두름)의 복음사가는 중세부터 널리 그려진 주제로, 일반적으로는 각자 복음 기록에 전념하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표현을 추구한 플랑드르 바로크의 요르단스가 그린 모습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모습이 아닌 친근한 모습이다. 깊게 파인 주름과, 붉게 상기된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와 잔뜩 인상 쓴 모습은 성인이기 이전에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다. 이들은 놀라운 성령의 힘으로 천상의 메시지를 조심스레 받아 적고 있다(박혜원 소피아). / 자료 : 심재엽파스칼



제 1권. 표징의 책


제2부. 예수의 첫번째 표징과 그를 믿는 이들


가나의 혼인잔치(2,1-12)
성전정화의 표징(2,13-25)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세례자요한의 마지막 증언(3,22-30)
계시자이신 예수(3,31-36)
생명수-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1-4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43-54)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세례자요한의 마지막 증언(3,22-30)
계시자이신 예수(3,31-36)

자료 : 테오필로신부님 / 삼위일체 성당. 계단을 내려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물쪽에 지어진 지붕 있는 건물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옷을 벗어놓은 곳을 기념하는 장소


1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성서본문>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해를 돕는 글>

대부분의 성서 주석학자들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원래 12절 또는 15절까지라고 본다. 13절(또는 16절)부터는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이곳에 합쳐져 있는 것이다. 후반부는 예수의 공생활을 전제로 한 주제로서 전반부의 본문의 문맥과는 다르다. 또한 예수를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독백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 단원에서 공부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을 행하셨다. 이 표징을 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기적가로 여기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적으로 믿는 깊은 신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기적을 보고 찾아온 이들은 예수를 마법사나 스승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기적을 요구하고 기적을 바라는 이들은 예수를 끊임없이 오해한다.
예루살렘 시민들과 니고데모는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그를 단지 기적가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적을 통한 믿음은 하느님 아들의 신비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기적은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는 오해를 낳게 한다. 영적인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보이는 것은 물질의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여진다는 영적인 현상이나 기적은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 공부하게 될 이 단원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만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신다. 그래야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예수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마태16,4) 예수님은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악하고 절개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신다. 기적은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끊임없이 오해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감명을 받고 그분께 끌리지만 그분을 대단한 예언자요, 백성을 회개시키도록 파견된 ‘하느님의 사람’ 이상의 존재로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개혁가로 본다. 또한 신기한 일을 하는 마술사로 보기도 하고, 이 사회를 변혁시킬 혁명가로 보기도 한다. 예수에 대한 끊임없는 오해이다. 마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몰아낼 혁명가로 보고 “호산나”를 외쳤듯이,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는 그런 분이 아니다. 니고데모는 여기에서 예수를 오해하는 모든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완전한 신앙은 철저하게 새로운 삶의 출발이며 “물과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라는 점을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기적을 보는 것이 필수요소가 아니라, 철저하게 “새로 태어남”에 있다. 육신은 지상의 아버지에게서 받지만, 영원한 생명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새로 태어나야 만이 받을 수 있다.
그럼 이“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오늘의 핵심주제이다.
신학자 ‘호세 꼼불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요약)

“생명은 요한 복음의 기본 주제 중의 하나이다. 생명, 혹은 영원한 생명의 그 첫째 의미는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이다.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의 새로운 생명, 다시 태어남이다. 성령으로 다시 나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다.
신앙은 새 생명을 누리게 한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감정적인 매달림이나 일시적인 감정, 또는 철학이 아니다. 신앙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임을 아는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신적인 것을 마법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주석>

[1절] ‘니고데모’는 바리사이로서 유대 최고의회(쉬네드리온)에 속한 자로 소개된다. 그는 또한 예수로부터 유대인들 가운데에서 명성 높은 “선생(율사)”으로서 예루살렘의 명사 가운데 한 사람 이 그런것도 모르느냐는 꾸중을 들은 사람이다. 복음서에서 ‘유다인들’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예수께 적대적인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긍정적인 말로 하느님의 백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중 처음 만나게 되는 이 사람은 예외이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우호적이다. 그렇지만 그의 믿음은 기적에 의존한 것이었기에 아직 불충분한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던”(2,24), 기적을 보고 예수께 온 이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도 역시 어둠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한다.
요한 복음서에만 보도된 그는 장차 예수를 옹호하고 예수편에서 활동하며 단계적으로 예수를 가까이 따르고자 한다(7,50-51). 그리고 나중에 예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오기도 한다.(19,39이하)

[2절] 니고데모는 예수를 “밤에” 찾아온다. 이에 대해서 네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유대인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밤에 찾아왔을 수도 있다(19.38참조),
둘째로, 니고데모가 어둠에서 빛(예수)으로 온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3,21참조).
셋째로, 랍비들은 주로 율법 공부를 밤에 행해지는 당시 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넷째로, 배신자 유다스의 경우처럼 불신앙의 어두움을 암시하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어느 랍비보다 뛰어난 “선생”으로 인정하고 고백한 내용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께 호감을 갖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불신앙의 밤에 살고 있다. 예수에게서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온 스승 또는 큰 기적가의 모습만 보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단지 기적가로 본다면 불신의 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라는 표현 속에는 자신과 같은 신분의 여러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시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에게 대한 과장된 예의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절] “새로 나지 아니하면...” 이 말은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예수는 이 말을 통해 니고데모를 한 차원 높이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위로부터”는 천상적﹡ 신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위로부터 나다“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난다“라는 뜻과 같다.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4절] 니고데모의 오해가 언급된 내용이다. 예수의 말씀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말이다. “위로부터‘란 말보다 ”태어난다“는 말에 역점을 둔 니고데모의 생각이다. 예수는 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하고 있지만, 니고데모는 육신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한다.

[5절]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오늘 공부하는 이 단원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1) “물”이란 말은 초대교회에서 행해진 세례와 관련된 말이다. 기적을 보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요건이 아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28,19)

(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영”, 곧 “성령”에 역점을 두고 있다(6,6참조). “위로부터 난다”는 말은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언급된 것이다. 영을 통해서 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과, 인간의 새로 나기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열린 마음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며 세례순간에 우리 안에 이미 오셔서 머물러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없이 성령은 활동하시지 않는다. 잔이 준비되지 않은 이는 향기 나는 포도주를 맛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늘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우리 삶은 늘 새로 태어나고 늘 새로워지고 늘 쇄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새로움으로,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은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기적을 쫒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기적의 주인공이라고 자랑하거나 혹은 자기도취에 빠진다. 결국 이는 자기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거나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6-7절] 비록 절대적인 구분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람들 중에는 그 삶이 “육”에 속한 이들이 있다. 반면 “영”에 속한 이들도 있다. “영”으로부터 난 자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 태어날 때부터 “육”의 영역에 속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영”, 곧 “위로부터” 새로 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8절] 아무리 기상대에서 태풍의 방향을 예측한다 하더라도 바람은 결국 불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분다. 이와 같이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육신의 틀에 박힌 삶이 아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누리게 된다.

[9-10절] 니고데모의 몰이해가 시사된 내용이다. 이런 오해나 몰이해는 니고데모가 예수의 가르침을 아직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말 속에는 율법을 권위있게 가르칠 수 있는 자로서 인정받은 선생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표현과 함께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에 대한 비난이 더욱 고조된 셈이다.

[11절] “우리”란 복수개념의 말 속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니고데모가 “우리”라고 표현한 것(2절)과 대칭을 이룬다. 따라서 12절의 “너희들(당신들)”이란 복수개념의 말은 니고데모와 그와 같은 신분을 가진 자들을 가리킨 것이다.

[12절] “세상의 일”과 “하늘의 일”이 서로 대칭을 이루는 뜻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늘의 일”이 “세상의 일”을 능가한다는 의미 아래 비교되었을 뿐이다. 즉, “세상의 일”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늘의 일”을 말한들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의 일”은 예수가 이미 언급한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늘의 일”은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계시적인 행위들을 뜻한다. 현 문맥상으로는 13절 이하의 내용들을 가리킨다.

[13절] “천상의 것”(12절)을 계시할 수 있는 자로서 “사람의 아들”이 언급된 셈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 취한 “길”, 곧 지상으로 내려와서 머물다가 천상으로 올라가는 그 “길”도 간략하게 시사되어 있다. 즉, “사람의 아들”만이 천상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14,6).




구약성서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인 체험은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어가는 일임을 강조한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이 있느냐? 바람을 손아귀에 움켜잡은 사람이 있느냐? 물을 옷자락에 감싸 둔 사람이 있느냐?.....”(잠언30,4) 그 영역을 넘어가는 일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가능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천상의 지식을 가지지 못했으며 알 수도 없다.

[14-16절] 민수21,4-9; 이사52,13참조
“들어올려지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이 죽음은 모세의 구리뱀 사건과 비교되어 있다. 민수기에 보면 하느님은 광야에서 당신께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시기 위해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불뱀을 보내신다. 그런데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어,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고 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미리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공생활 초부터 십자가의 수난이 예고된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올려져야 하는 목적은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12,32참조).

[17-18절] 세상에 “아들”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세상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에 있다고 강조된다(4,42참조). 이 목적은 또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나타낸다. 하느님은 오로지 세상 구원만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결코 심판을 원치 않으시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미 심판이 주어진다는 내용이다. 즉, 심판은 인간이 자초한 것으로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불신은 심판을 자초한다.

[19절] "빛“은 하나의 실체로서 세상에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8,12; 9,35). 그러나 ”어둠“은 악의 세력이 인격화된 개념이다(1,5참조). 빛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어둠, 곧 악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거부하게 되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 악의 지배를 받게 되니, 그 자체가 심판에 떨어진 것이다.



[20절]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리적인 설명이다. 즉, 계시의 빛이 믿지 않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행실을 폭로하고 그들 자신의 실체까지 들추어내기 때문에 그들은 심리적으로 그 빛을 미워하게 되고 또한 그 빛을 더욱 거절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의 원조들의 모습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아담과 에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바로 한 일은 몸을 가리고 숲으로 숨는 일이었다.(창세기3,7-8) 이는 악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동굴의 어둠에 익숙해있는 사람이 갑자기 밝은 빛가운데 나오면 눈을 가린다. 빛을 차단하지 않으면 시력장애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에 깊이 물든 사람일수록 빛을 멀리하게 된다. 성격이 어두운 사람은 자기 방이나 주변 환경도 어둡다. 성격이 밝은 사람은 주변을 밝게 꾸민다. 그의 삶은 활력이 넘친다.

[21절]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데로 나아간다.” 믿는 자들에 대한 심리적인 설명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곧 기쁨이며 행복이다. 이 빛을 따라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늘 쇄신되고, 늘 새로워지고, 더 깨끗해지고, 더 성스러워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바꾸어 새로 나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묵상하기>

어느 날 스승이 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제가 수행을 하면서 신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가 영성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겁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하였다. “그 신을 찢어죽이고 너는 계속 정진하여라.”

만약에 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오감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거짓임을 자각하고 과감하게 그것을 떨쳐버리고, 계속 정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하느님은 진실이 아니라 우상이다. 하느님은 몸으로 느껴지는 분이 아니다. 보여지지 않는 분이 보여지는 표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사(聖事)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니고데모, 그는 예수님께 매력을 느끼고 밤을 이용해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가 예수께 온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온 것은 기적에 의존한 것이었기에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왜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새로움으로 오신 분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가5,37) 우리는 새로움으로 오신 예수님을 담는 새 부대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앞 단원에서 묵상한 대로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새 포도주는 향기롭고 풍성하다. 그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우리 마음의 항아리는 비어있어야 한다.
세상 것과 욕심과 죄악으로 가득차 있다면 포도주의 표징은 우리 안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새로움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인 우리 자신을 깨끗이 정화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이 잡상인들로 가득 찬 예루살렘의 성전과 같이 오염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진노하시는 채찍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음으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기본적인 조건은 이미 갖추어진 셈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을 살아내지 않는 한, 이러한 조건들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관객처럼 그저 보고만 있다면, 청중처럼 그저 듣고만 있다면, 몸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허사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관객으로 남아 있는 한 절대로 예수를 깨달을 수 없다. 복음을 생활로 살아 내는 사람이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기적으로 알게되는 분이 아니라 삶으로 깨달아지는 분이다.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서문의 말씀이 메아리 치고 있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1,9-11) 말뿐이고 그저 바라볼 뿐인 마음만의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어떤 노사제에게 행실이 건전하지 못한 한 여인이 찾아와 자신의 그동안의 삶을 눈물로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청하였다. 그 여인의 방탕한 삶을 모두 들은 노사제는 갑자가 옆에 있던 유리 물병을 들어 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사죄경을 해주며 말하였다. “이제 가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삶을 이와 같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주셨습니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마시오.”
그 여인은 산산이 깨어진 유리파편을 보면서 주님 안에서 자신의 과거의 삶이 깨어지고 새 삶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깨어지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거듭 새로 나는 삶, 진리를 따라 사는 삶,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다음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행동이 있소. 나는 내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당신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오.”(야고보2,14-18)


자료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2.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증언(3,22-30)

<성서본문>

22 그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지방으로 가셔서 그 곳에 머무르시면서 세례를 베푸셨다. 23 한편 살림에서 가까운 애논이라는 곳에 물이 많아서 요한은 거기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세례를 받았다. 24 이것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의 일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 예식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26 그 제자들은 요한을 찾아 가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계시던 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바로 그분인데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 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들은 증인들이다. 29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해를 돕는 글>

이 대목은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증언 내용이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가 혹은 예언자 혹은 단순한 개혁가로 보고 찾아왔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히 그런 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창시한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제 복음사가는 예언자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킨다.

세례자 요한의 이 증언은 우선 예수의 활동 가운데 이루어진 점이 다른 증언(1,19-37)이나 공관복음서에 보도된 증언(마르 1,2-8 병행구)에 비해 독특하다. 이는 각 복음서마다 구전으로 전해질 때 약간씩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이후부터 예수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도한다(마르 1,14).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장소만 다를 뿐 동시에 펼쳐진 것으로 보도하고(22-23절),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의 상황이라고 강조한다(24절).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계곡은 지구상에서 가장 황량한 장소 중 하나이다. 뜨겁고 소금기가 많은 사해 근처의 사막에서는 어떤 생물도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황색의 불모의 땅 사막 건너편에는 초록색 물결이 넘실대는데, 요르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든 것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군중이 모여 든 장소가 바로 땅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곳이었다. 그들은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물이 상징하는 진리를 선언한다. 즉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설 때 살아나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등장하시자 세례자 요한은 모든 것을 예수께 양보한다.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고 그분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한다. 이제부터 참 빛이신 예수의 활동이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의 이 활동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불만이었지만(25-26절), 세례자 요한에게는 오히려 결정적으로 예수를 증언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27-30절).



<주석>

[22절]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 동편에서, 예수는 서편에서 세례를 베푼 것으로 말들 하지만,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을 뿐더러 함께 세례를 베풀지도 않았으리라 추정된다(23절).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보도가 전혀 없고 다만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인정한 보도(마르 11,30-33; 루가 7,29-30; 마태 21,32)나 부활 이후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의 명령 보도만 있을 뿐이다(마태 28,19; 마르 16,16).
사실상 요한 복음서에도 상반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도하면서(3,22; 4,2)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가 친히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고 보도한다(4,2).
예수가 세례를 베풀었을 경우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는 분명히 다른 세례였을 것이다. 즉, “회개의 세례”(마르 1,4)를 능가한 세례였을 것이다(요한1,26.33; 마르 1,8). 만일 제자들만이 세례를 베푼 것이라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중 어떤 제자들(1, 35-37참조)이 예수를 따르도록 세례를 베풀었을 것이고(4,1참조), 예수는 다만 그것을 허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령의 세례”는 예수의 부활 이후에 비로소 베풀어졌다.

[23-24절]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의 등장 후에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을 뿐더러 유대 지방 어느 곳, 즉,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중요한 곳에서 예수가 활동하도록 그 장소까지 배려했다는 내용이다.

[25-28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세례행위에 대해서 그들의 스승에게 하소연한 내용이다. 그들의 말에서 일종의 질투와 반감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질투하지 않는다. 예수의 세례행위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보조적 역할을 기쁘게 수행할 따름이다.

[29절] 신랑은 그리스도를, 신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신랑의 친구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특히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의 관계는 당시 결혼 풍습에 따른 신랑과 신랑의 친구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30절]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커지다”와 “작아지다”란 말은 활동의 힘과 영향력에 관련된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의해 세례자 요한의 임무 내지 활동은 이제 끝나가고, 예수로 인해서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묵상하기>

“질투” -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함.

한 농부가 염소와 나귀를 기르고 있었다. 주인은 무거운 짐을 묵묵히 잘 나르는 나귀를 매우 사랑했다. 염소는 주인의 이런 태도가 못마땅했다. 염소는 시기와 질투를 느껴 나귀를 해칠 계략을 꾸몄다.
"나귀야, 너처럼 불쌍한 동물도 없을 거야. 주인은 네게 힘든 일만 시키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니. 내가 한가지 꾀를 가르쳐주지."
염소는 나귀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짐을 싣고 개울을 건널 때 자꾸 넘어지렴. 그러면 주인은 네 몸이 쇠약한 줄 알고 다시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을 거야" 나귀는 개울을 건널 때 일부러 계속 넘어졌다.

주인은 평소 건강하던 나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나귀의 기력이 약해졌으니 염소의 간을 먹이면 금방 낫는다고 일러주었다. 주인은 즉시 염소를 잡아 나귀를 치료했다. 시기와 질투는 부메랑 같은 것이다.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면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염소들은 여름엔 서로서로 엉켜붙어 잠자거나 쉬기를 즐겨하고 겨울이면 한 우리 안인데도 각각 떨어져 있기를 좋아한다. 참 이상하다. 우수한 보온력과 체온을 가진 염소들은 여름엔 차라리 서로서로 떨어져 있어야 시원할 게고 겨울엔 서로서로 엉겨 붙어 있어야 따뜻할텐데... 그 이유는 염소가 시기와 질투가 많아서 란다. 도무지 이웃이 잘되는 것을 못보는 성격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 친구가 여름에 시원할까봐 서로 붙고, 겨울에 따뜻할까봐 그게 싫어서 서로 떨어져 있는다고 한다. 물론 염소에게 무슨 질투가 있겠는가? 이는 그저 짐승의 생태나 습성에 대한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이를 질투하지는 않는다. 자기보다 아름답거나, 자기보다 똑똑하거나, 자기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을 질투하게 된다. 그러나 강자 앞에서는 비굴하고 약자 앞에서는 오만한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하고 그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잘난 체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고민하고 질투하였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질투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왔고 반면에 자신은 땅에 속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 질투하지 않는다.

사람은 전면에 나서서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때가 있고, 또 물러서야할 때가 있다.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유종의 미를 잘 거두는 사람이지만, 그것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추한 모습을 남기게 된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b절)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명성과 영향력을 점점 증가시켜야 한다. 구원의 역사의 장에서 이제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시대는 물러나고 메시아의 시대가 떠올라야 한다. 그는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예수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증언하고 구세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3. 계시자이신 예수(3,31-36)

<성서본문>

하늘에서 오시는 분
31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32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 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36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이해를 돕는 글>

이 대목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13-21절과 함께 예수가 어떤 분인지에 관한 복음사가의 해설이다. 모든 인간은 땅에 기원을 둔 존재이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하여 땅의 먼지로 만들어졌다(2,7). 세례자 요한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땅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는 땅에 속한 분이 아니다. 그분의 천상적 기원은 그분이 성령으로 충만된 분임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아래에서 났지만 그분은 위에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다. 반면 그분을 배척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주석>

[31절] “위에서 오시는 분”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과 함께 예수를 가리킨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13절), 천상적인 계시자요 증인(32절),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는 유일무이한 “아들”(35절; 참조: 16-17절)과 맥락을 같이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땅의 것”(12절)에 얽매여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16절 참조)에 놓여진 지상 인간 모두를 가리킨다. 즉, “땅”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땅에서 난 이”를 뜻한다.
“땅”(지상)과 “위”(천상)가 서로 분리․구별되듯이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이“도 대립되어 있다(8,23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대립적인 존재 상황보다는 천상과 지상 사이에 놓여진 엄청난 거리를 시사하고 천상과의 관계 속에서 지상이 상대화되었을 뿐이다. 즉, 지상이 천상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32절] 예수의 증언, 곧 계시 말씀이 천상적인 것임을 , 즉 자기를 파견한 하느님의 것임을 언급한 내용이다. 그리고 예수의 계시는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참된 증언이라는 점도 시사되어 있다. 천상적 참된 증언, 즉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의 증언인데도 불구하고 거절당했다. 이것은 복음사가가 체험한 그 슬픈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3절]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느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는 것이다.

[34절]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기 때문에 새롭고 유일무이한 파견이다. 하느님께서 예수께 성령을 충만히 주심으로써 예수의 말들을 성령이 충만한 신적인 말씀들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증언이나 계시는 완전하고 결정적이며 능가할 수도 없다.

[35절] 하느님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결속관계로 언급되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의 손에 맡겨주다”란 말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준다는 뜻이다.

[36절]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 곧 “아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란 말은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떨어질 "하느님의 진노“는 일반적인으로 종말론적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그 심판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즉,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 아래 머무는 자라는 것이다.



<묵상하기>

“불신의 죄”
사람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죄이며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창조주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 구세주를 믿지 않는 것, 충만케 하시는 성령을 믿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믿음'을 주제로 지은 기도문을 보면, 기도문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서 그분께서 지니셨던 믿음이 얼마나 극진한 믿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을 잃기보다는
생명을 잃는 편을 저는 택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믿음 없이는 생명도 생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이 결실을 맺고
하느님을 위하여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하려면
믿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에게 득이 되는 일만을 찾는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은 섬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인 것,
서로 보충하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 마더 데레사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일은 다른 사이비 종교나 무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진리 중에 진리,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가 예수님이시다. 믿음 중에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축복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 매순간의 삶이 축복임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이다.
참된 신앙인은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에 더 이상 고통이나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믿음을 버리지도 않는다. 삶의 십자가가 힘겨울 때도 십자가 안에 긷든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눈여겨보면서 힘차게 일어서야 한다.






자료출처 : 언제나 처음처럼(예로니모)
http://www.mncatholic.or.kr/sub3/john/john_3.htm
집: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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