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강완숙 순교자의 활동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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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5 ㅣ No.1458

[특별 연재] 이 시대, 순교신심에서 길을 찾다


강완숙 순교자의 활동과 순교



삶의 푯대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인문학, 심리학, 과학의 문을 서성이며 길을 찾고 있다. 여기, 한평생 순교신심을 연구해온 손골성지 윤민구 신부는 신앙의 유산이 담긴 순교신심에서 삶의 방향키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올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이뤄진 기쁨의 해이다. 오는 8월 시복이 이뤄지는 강완숙 골룸바의 생애를 조망한다.


지난 호에서 이야기한대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 순교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강완숙 순교자의 남편은 아내만 쫓아내면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지워버릴 수 있을 줄 알았겠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강완숙 순교자의 시어머니와 전실 자식 홍필주(洪必周, 필립보, 1774-1801)까지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강완숙 순교자를 따라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결국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강완숙 순교자가 낳은 아직 어렸던 딸까지 모두 집에서 쫓아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들이 모두 강완숙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강완숙 순교자는 신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각을 갖고 새롭게 살아감으로써 시어머니와 전실 아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손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온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는데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남편은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미처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남편은 아내인 강완숙 순교자를 소박(疏薄)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남편이 소박맞은 것이 되었다. 모든 가족이 다 떠나버린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 순교자 가족들은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1794년 말에는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를 서울로 모셔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중국인 선교사 신부였다. 주문모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면서 강완숙 순교자를 여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때의 사정을 〈신미년(1811)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갑인년(1794)에 신부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지만, 사람들이 신부님을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모셨기 때문에, 강완숙은 신부님께 가까이 가서 신부님을 뵈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이미 강완숙의 재능과 사람됨을 알아보시고는 강완숙을 여회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 당시 교우들은 신부님이 강완숙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여 선택하시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대단히 놀라워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신부님은 아직 우리나라 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하여 성사도 간신히 주실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남녀 간의 구별이 아주 엄격하였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일을 비밀리에 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잘하지만, 일을 기획하고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완숙은 온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앞에서는 사람들을 끌어주고, 뒤에서는 밀어주었으며, 내적으로는 지극히 절제하는 삶을 살면서 외적으로는 자기가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북경 교구장이었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는 얼굴과 외모가 조선 사람들과 비슷한 중국인을 파견하면 쉽게 탄로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구베아 주교의 판단은 빗나갔다. 예상과는 달리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지 6개월도 못되어 발각되었다. 1795년 6월 27일(양)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것이 조정에 알려져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주문모 신부는 피신하고 대신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과 동료인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1764-1795), 지황(池璜, 사바, 1767-1795)이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고 체포된 지 채 하루가 안 된 6월 28일(양) 심한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고 시신이 한강에 던져졌다.

주문모 신부는 간신히 몸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이리저리 신자들 집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게 되었다.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주문모 신부를 숨기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때 주문모 신부를 숨기며 그의 선교활동을 가장 열심히 도운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강완숙 순교자이다. <신미년 편지>에서는 강완숙 순교자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 3년이 지나자 박해가 다소 누그러져 신부님께서는 점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사를 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완숙은 위로는 신부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들을 아주 정숙하면서도 바르고 점잖게 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완숙이 신부님의 강론이 있다고 사람을 보내어 알리면, 마치 종소리에 북소리가 맞장구치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강완숙은 열성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마치 나무 섶에 불이 붙는 것처럼 삽시간에 사람들이 몰려들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더라도, 강완숙은 마치 얽히고설킨 나무뿌리를 좋은 연장으로 다듬어 내듯이 그렇게 그 모든 일들을 물리치고 헤쳐 나갔습니다. 또한 세상이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마치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듯이 그렇게 용감하게 헤치고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남자 교우의 수가 많긴 하였으나, 열심함에 있어서는 항상 강완숙에게 뒤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도 일하는 데 있어서 강완숙에게 많이 의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강완숙은 성교회(聖敎會)를 지키는 씩씩한 여장부였으며, 그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으니, 한낱 치마저고리 입은 여인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1801년 봄 서울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 순교자는 체포되어 포도청과 의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온갖 조사를 받으면서 겪지 아니한 고문이 없었고 당하지 아니한 고통이 없었다. 그리하여 온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으며 뼈 마디마디가 모두 부러졌으나, 평화스럽고 태연자약한 모습이었을 뿐 초췌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재판정에서도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해를 끼칠만한 말은 단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신미년 편지>에서는 강완숙 순교자의 감옥생활과 순교에 대해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감옥 안에서도 강완숙은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옆 사람들에게 공로를 쌓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을 이용하여 천주교의 도리를 증명하고 천주교의 근본을 밝혀 주었으며, 그릇됨을 물리치고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고금의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심문하던 관리들도 말문이 막혀 강완숙을 가르켜 “여성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강완숙이 온몸의 힘이 다 빠져 지쳐버릴 때까지 교리를 논하는 것을 보고는 강완숙을 “여장부”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

드디어 5월 22일(7월 2일(양)), 강완숙은 다른 교우 여덟 사람과 함께 환재치에 실려 서소문 밖 형장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레 위에서 기쁨에 넘친 얼굴을 하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이 오자, 사형 집행관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는 법대로 하자면 마땅히 옷을 벗고 형을 받아야겠지만, 저희들은 부녀자들이니 부디 당관께 속히 아뢰어, 저희들이 옷을 입고 죽을 수 있게 해 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달려가 당관에게 아뢰니, 당관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완숙과 그 동료들은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강완숙이 몸에 십자가를 그은 다음 목을 내밀어 형을 받으니, 그 때 나이가 38세였습니다.

이튿날 비가 많이 내려 아홉 사람의 시신이 진흙 구덩이에 있게 되었으나, 전혀 썩지도 않고 악취도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빛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으며 피부색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기이한 일”이라고 수군덕거렸습니다.

강완숙 순교자와 전실 아들 홍필주 순교자는 시복(諡福)이 결정된 우리나라 124위 순교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 1975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유학하여 1983년 라떼란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일하였고 안성 대천동, 성남 수진동, 이천, 분당 야탑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후 현재 손골성지 전담신부를 맡고 있다.

[외침, 2014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윤민구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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