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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7-10: 헨리 나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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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4 ㅣ No.768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7) 헨리 나웬 신부 ①


“행복은 성공의 사다리를 ‘내려오는’ 길에 있다”

 

 

헨리 나웬 신부. (출처 위키피디아)

 

 

영성

 

헨리 나웬(Henri M. Nouwen, 1932~1996) 신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위로와 깨우침을 주는 대표적인 영성가입니다. 이미 고전이 되었다 할 「상처입은 치유자」나 「탕자의 귀환」을 포함한 그가 남긴 40여 권에 이르는 영성 저작들은 묵상의 깊이와 심리학적 이해, 섬세한 감성, 사려 깊은 표현들과 함께 저자 자신의 삶의 고민과 흔들림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진솔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저서들은, 1996년 그가 심장마비로 타계한 지 20년이 된 지금도 낡은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 여기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같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외적인 풍요와 쾌락, 화려함의 뒤편에서 현대인들이 겪는 불행감과 불만족,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 성공과 권력에만 매달리는 마음의 병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가 현대인들의 ‘깨어진 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바라보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이러한 깨어진 마음, 흔들리는 감정, 올라가기 위해 버둥대는 삶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많은 인정과 성공, 정서적 친밀감에 매달릴 때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함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오직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생 여정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내려오는’ 길에 있으며 그것이 또한 예수님 십자가의 길이 보여주는 신비이자 모범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이러한 진리를 머리로서만 알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면서 공허감, 실패, 집착, 분노와 건강하지 못한 자기연민 등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민하게 대면한 사람이었고, 각고의 시간 끝에 한발씩 치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삶의 여정을 거쳐 몸과 마음으로 이러한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저서에서 잘 보게 됩니다. 책들은 그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과 결단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이 점이 우리에게 그의 글들이 그토록 깊은 감동과 귀중한 영적 도움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삶의 여정과 죽음, 그리고 마지막 여행

 

헨리 나웬은 1932년 네덜란드 네이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는 것을 꿈꿨고, 마침내 1957년 25세 젊은 나이에 네덜란드 유트레흐트 교구의 알프링크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됐습니다. 서품 후 네덜란드 네이메헨 가톨릭 대학에서 심리학 공부를 마친 후, 미국에서 심리학 연구를 심화하고 사목신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킨 자신의 식견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심리학 영역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인식들을 신학과 사목, 신앙 안에서 사려 깊게 또 유익하게 활용하는 길을 모색하고 시험하며 현대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자신의 영성 토대를 튼튼히 했습니다.

 

그의 저술과 강의와 강연, 세미나는 많은 관심과 높은 평판을 얻게 되었고 이제 그는 학자이자 저술가로서 경력의 가파른, ‘올라가는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는 40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한 외국인 사제이자 심리학자로서 이미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험을 거쳐, 예일대학 교수가 되었고 저서는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 속에서 그는 자신 안에 상처와 공허가 깊어가고 있음을 점점 감지하게 됩니다. 일찍이 자신의 교구를 떠나 외국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부터 뿌리가 단절된 근원적 외로움이라는 짐을 안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주 대학이라는 보호받는 공간 안에서 “학적 언어로 영성과 사목신학을 펼치는 것이 일종의 자기모순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더욱이 자신의 강의와 강연, 저서에 쏟아지는 찬사와 인정에서 행복을 찾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 또한 찬사를 얻지 못할까 보이지 않게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불안감, 순간의 찬사가 지나간 후 홀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고독감과 공허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갈망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가의 범위를 벗어나, 스페인어를 배운 후 당시 독재정권의 억압 하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던 남미로 떠납니다. 나웬 신부는 남미의 한 슬럼가에서 머물며 가난한 사람들과 실제로 함께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현지 가톨릭 신자들이 예언자적 용기와 소명으로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데 연대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며 수많은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는 그에게 사회적 영성에 눈뜨게 한 소중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론 그가 많은 상처를 얻고 육체적, 영적 소진을 겪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시 하버드대학의 초대를 받고 다시금 대학으로 돌아옵니다만, 하버드대학 교수로서의 삶은 그에게 최종 해답이 될 수 없었고, 저술가로서의 세계적 명성도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1985년 그는 50대 나이에 대학 세계를 떠나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봉사하며 사는 작은 공동체인,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리치몬트 힐 소재 ‘새벽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생일대의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역시 현대의 매우 중요한 영성가이자 라르쉬 공동체(L’Arche Community)의 창시자인 쟝 바니에와 만나고 라르쉬 공동체를 체험하면서 이르게 된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동료 교수들은 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는 라르쉬에서 ‘약함의 힘’과 ‘내려가는 길’이라는 평생의 깨달음을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가 라르쉬에서 보낸 시간이 물론 고민과 고뇌, 좌절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끝까지 이 공동체에 충실하였고 그 안에서 진정한 성찬의 삶을 깨닫고 체험하였습니다.

 

1995년 가을 헨리 나웬 신부는 라르쉬 공동체의 배려로 안식년을 얻어 가족들과 친구들을 방문하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매일매일 묵상했습니다. 또한 라르쉬에서의 실천적 삶을 다시금 새로운 차원에서 내면에 자리한 깊은 관조에 대한 열망과 조화시키는 길을 모색하는 소중한 한 해를 보냅니다. 안식년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탕자의 귀환」과 그 책이 쓰여지도록 영감을 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렘브란트 그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한 네덜란드 방송국 제안에 따라 러시아로 떠나기로 합니다. 그 중간에 잠시 네덜란드에 머물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타계합니다.

 

이른 죽음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가 안식년 기간 동안 매일 남긴 묵상일기는 그의 평생의 영적 여정과 모색을 잘 담고 있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제 앞으로 3주간에 걸쳐 그의 안식년 동안의 마지막 일기를 살펴보면서 그가 삶에서 길어낸 영성을 만나고 우리 각자 사순시기에 걷게 되는 회심과 치유의 여정에 길벗으로 삼고자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8) 헨리 나웬 신부 ②


아버지 쏙 빼닮은 자신에게서 아버지를 보다



‘안식의 여정’을 시작하다

 

헨리 나웬 신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은 「안식의 여정」(Sabbatical Journey)입니다. 이 책은 후에 보다 넓은 독자층을 위해서 축약본으로 출판돼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에 걸쳐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영성을 음미하려 합니다. 이 책은 그와 마찬가지로 라르쉬 새벽 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그가 자신의 사후 저작 관리를 생전에 맡길 만큼 신뢰했던 수 모스텔라 수녀에 의해 편집 출간됐습니다. 내용은 그가 안식년 기간 동안 남긴 일기입니다. 물론 그 안식년 기간이 자신이 지상의 삶과 이별을 준비하는 시기가 되리라고 예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심 그는 장수하는 집안 내력을 감안하건데, 아직 긴 날들이 자신에게 남았다고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그는 예순을 넘어 맞이한 이 안식년이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가고 자신이 투신하는 소명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안식년 첫날의 일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1995년 9월 2일 토요일, 온타리오 주 오크빌: 오늘은 안식년 첫날이다. 흥분되면서도 불안하고, 기대에 부풀면서도 두렵고, 피곤하지만 오만 가지 일을 하려는 의욕이 생긴다. 다가올 한 해가 꽃들이 가득하고 잡초가 무성한 길고 넓은 들판마냥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저 들판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마침내 저 건너편에 도착할 때쯤 나는 무엇을 터득할 것인가?… 자유로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통절하게 느껴 보고, 일찍이 해보지 못했던 기도도 해보는 거다. 지난 아홉 해 동안 마음과 정신 속에 쌓아둔 수많은 체험을 자유로이 글로 써보는 거다. 자유로이 우정을 다지고 사랑하는 참신한 길을 모색하는 거다. 무엇보다 자유로이 하느님의 천사와 드잡이해 보고 새로운 축복을 청하는 거다.”(헨리 나웬, 마지막 일기, 성찬성 옮김, 바오로딸, 2009).

 

그러나 이 안식일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그동안 삶의 여러 단계에서 겪은 체험들과 시기별 주요 저작들의 주된 주제들이 안식일에 겪은 체험과 사유들 속에서 잘 종합되고 열매 맺으며 깊은 차원의 화해와 조화를 맺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는 그가 평소에도 죽음과 이별이라는 문제를 늘 대면하며 살려고 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왔지만 신비롭게도 마지막 일기는 가장 완전한 죽음의 준비이자, 그의 벗들과 독자들에게 더없이 사려 깊고 우정에 찬 마지막 이별의 선물이 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작품 ‘돌아온 탕자’.

 

 

아버지를 이해하기, 아버지가 되어가기

 

헨리 나웬 신부의 안식년 일기 중, 그가 아흔세 번째 생신을 맞는 아버지와 함께하기 위해 유럽에 체류했던 12월 말에서 1월 말까지 한 달간 쓰인 내용은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하기도 하고 또한 스스로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12월 21일의 일기에서 나웬은 “아버지는 아버지다”라고 씁니다. 나웬 신부에게 육친의 아버지는 존경스럽지만 버겁기도 하며, 고뇌를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깊은 영적 성숙으로 이끈 도전이 되었던 존재였습니다. 마이클 오래플린은 통찰력과 애정이 가득한 그의 나웬 신부에 대한 영적 전기에서 나웬 신부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했던 아버지 로렌트 나웬은 아들의 감수성을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아들에게 수치심을 주입시켰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헨리에게 감탄하거나 그를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변호사이자 법학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건설적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좌절과 분노를 심어주었습니다. 1984년에 헨리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실패자’로 간주한 사람들을 일체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약자는 늘 당신의 관심권 밖이었습니다.” 자신을 그런 실패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헨리는 결코 아버지의 눈에 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이클 오래플린,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 서한규 옮김, 분도출판사, 2008).

 

나웬 신부는 아버지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풍요한 영적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명저 「탕자의 귀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아버지를 쏙 빼닮은 생김새에 깜짝 놀랐습니다. 내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불현듯 스물일곱 살 때 보았던 한 남자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비판하면서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이였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내 자신을 찾는데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습니다. 현재의 정체성과 미래의 자아상을 묻는 질문 가운데 상당수는 그의 아들이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태껏 다른 점이 참으로 많은 줄 알고 살았는데 닮은 점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통감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바로 상속자요 후계자였습니다.”(헨리 나웬, 탕자의 귀환, 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아버지와의 내면적 화해와 받아들임은 나웬 신부에게는 죽을 때까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점점 그러한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었으며, 이는 그 스스로가 영적 의미에서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그의 안식일 일기 중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확인합니다.

 

“1월 6일: 아버지의 아흔세 번째 생신에 독일에서 함께 지낸 시간은 언제까지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이 우리가 그동안 함께해 온 시간 가운데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이런 일은 필경 아버지는 아흔세 살이 되고 나는 예순네 살이 되어야 가능했으리라… 내가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를 깊이 존경하면서도 상당히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늙어가고 방어하는 마음이 한결 줄어들면서, 나는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알게 되었다. 요즈음 거울을 보면 예순네 살때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내 특이한 성격과 성급함, 사물을 통제하려는 경향, 이야기 방식을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두 사람의 주된 차이는 성품이 아니라 나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어른이 된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드물다. 이번 안식년 동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부여된 특별한 은총이다… 내가 서른두 살이고 아버지가 예순한 살 때, 우리는 세대가 달랐고 그래서 사이가 아주 멀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같은 세대에 속하게 되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서 서로 더욱 가까워진 듯싶다. 나는 아버지를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올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든 나는 우리가 이처럼 다시 없는 시간을 함께했다는 사실에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의 이런 개인적 소회를 읽으며 그가 「탕자의 귀환」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매개로 묵상의 차원에서 탁월하게 전해주는 영적 지향이, 실제 그의 삶과 인격에도 깊이 뿌리내렸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다음 주에는 「탕자의 귀환」에 나타난 묵상이 마지막 일기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8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9) 헨리 나웬 신부 ③


렘브란트 작품을 보며 강렬한 영적 체험



나웬과 반 고흐 그리고 렘브란트

 

헨리 나웬 신부가 미술 작품들 안에서 깊은 영성의 샘을 찾곤 했다는 것은 그의 저작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자 열렬하게 하느님을 추구한 구도자였던 빈센트 반 고흐에 일찍부터 매료되었습니다. 반 고흐가 뜨겁고 타협 없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추구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진정한 연민과 일체감을 느꼈던 것을 깊이 존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예술 안에 일체의 허위와 위선과 교만에서 자유로운 영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는 비록 고흐에 대한 독립된 책을 생전에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강연이나 강의에서 고흐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그의 작품들과 편지들을 영적 묵상으로 다가가는 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헨리 나웬 신부가 삶의 마지막 시기에 다가서면서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가 생전에 활동하던 모습.

 

 

나웬 신부는 렘브란트의 강렬한 미술 작품을 통해,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황하며, 속함을 갈구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영성을 길어내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통절하게 바라보는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만이 아니라 이 화가의 삶의 여정이나, 성정들 모두가 나웬 신부에게는 매우 강렬한 영적 자극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렘브란트가 보여준 위대함만이 아니라 분노, 허영, 욕망 등의 수많은 약점과 과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렘브란트는 삶의 단계마다 남긴 수많은 자화상이 말해주듯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여하간에 대면하고 미화하지 않고 드러내려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고, 이 점이 나웬 신부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렘브란트의 작품만이 아니라 그의 전기들을 깊이 연구하면서 나웬 신부는 렘브란트의 어둡고 추한 모습들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습들이 자신 안에도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에겐 자신의 영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그의 영성을 성숙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체험의 중심에 렘브란트가 인생의 영락을 겪고 모든 세속적 영화를 잃은 만년에 더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그린 ‘탕자의 귀환’이 있습니다.

 

 

‘탕자의 귀환’에서 발견한 영성의 문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은 헨리 나웬 신부가 영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성 저자이자 강연자라는 명예와, 중남미의 독재와 폭력, 가난의 현장에 참여하고 그 체험을 미국 전역을 다니며 강연하는 양심적 참여자로서의 활동들로 그의 삶은 빛났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집을 나간 아들과도 같은 소진과 외로움이 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즈음인 1983년, 그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트로슬리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지인을 만나러 들어간 한 사무실에서 문에 붙여진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복제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무릎을 꿇은 청년의 어깨에 놓여진 노인의 두 손에 ‘일찍이 느낀 적이 없었던’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트로슬리를 떠난 후에도 이 그림은 나웬 신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에게 새로운 영적 지향과 삶의 변화로 이끌어갔습니다. 2년 뒤 하버드대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나웬 신부는 다시금 트로슬리를 방문해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이 자신의 소명인지를 식별하기 위해 한 해를 보내게 되었고, 마침내 토론토의 라르쉬 공동체인 ‘새벽’에 속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에 그는 생각지도 않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그림의 원본을 만나고 며칠간 깊이 묵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그의 가장 아름다운, 또한 잘 알려진 책이라 할 「탕자의 귀향」(최종훈 옮김, 포이에마, 2009)이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이 자신의 영적인 삶에 갖는 의미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 일부를 처음 본 순간, 나의 영적인 여정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이 책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마무리 지어야 하는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멀고도 긴 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나웬 신부는 고향 없이 방황하고, 세상이 주는 허상에서 잠시 지속되는 위안과 행복을 찾다가 점점 우울함과 절망에 빠지는 둘째 아들의 입장, 숨겨진 분노와 완고함으로, 회심의 기회조차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큰아들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성찰합니다. 그러나 결국 나웬 신부가 이 그림을 통해 눈을 뜨고, 삶으로 살아내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영적 깨달음은, 우리 모두가 아버지가 되어가고 아버지를 닮아가는 귀중한 소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웬 신부는 사람이 그 소명을 기쁘게 책임을 가지고 수락할 때 행복할 수 있으나, 수많은 이들이 자기자신을 교묘하게 속이면서 그러한 일생의 가장 중요한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다고 「탕자의 귀향」에서 말합니다.

 

“정말 아버지를 닮고 싶기는 한 걸까요? 진정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용납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는 한 걸까요? 집으로 돌아와 환영받을 뿐 아니라 돌아온 이를 환영하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걸까요? 불쌍히 여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되기를 참으로 소망하는 걸까요?

 

의존적인 어린 아이 상태로 남아 있으라는 교묘한 압력이 교회와 사회 양쪽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아버지가 되는 두려운 과업을 회피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지는 않았나요?”

 

나웬 신부는 자신의 새로운 영적인 길은, 바로 그분의 사랑 받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닮고, 그분처럼 되기 위한 일상을 사는 것임을 깨닫고 다짐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를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더 이상 아들의 신분을 이용해 아버지가 되기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충분히 만끽했다면, 이제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눈앞에 있는 저 노인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진리를 주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책을 맺습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나웬 신부의 안식년의 일기 중 5월 30일자를 보면 그가 흔쾌히 이 그림과 자신의 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한 네덜란드 방송국 제안을 받아들여 9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겠다고 적어놓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해 9월, 그는 방송 작업을 위해 네덜란드에 갔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운명합니다. 그러니 이처럼 나웬 신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그림인 ‘탕자의 귀환’은 결국 그의 삶의 마지막도 동반한 셈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6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0) 헨리 나웬 신부 ④ · 끝


죽음은 진정한 만남을 위한 마지막 선물

 

 

헨리 나웬 신부의 책 「마지막 일기」(왼쪽), 「탕자의 귀향」. 헨리 나웬 신부 (출처 paulhickernell.com)

 

 

헨리 나웬 신부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존재 깊이 체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는 라르쉬 공동체에서의 체험이었습니다. 나웬 신부 저서 「탕자의 귀향」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 루카 복음 15장의 ‘잃었던 아들’에 대한 렘브란트 그림 앞에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소명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체장애우들과 함께하는 라르쉬에서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지체를 가진 이들의 공동체를 방문했다가 렘브란트의 그림과 대면하면서 구원의 신비에 깊이 뿌리내린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은총과 가난한 이들이 베풀어준 축복 사이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겁니다… 라르쉬가 준 가장 큰 선물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아버지가 되라는 도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 도우미들의 공동체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작은아들과 큰 아들이 씨름했던 문제들과 투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오는 아버지는 온갖 고통을 통해 텅 빈 상태에 이른 아버지입니다. 아픔과 괴로움을 안겨주었던 수많은 ‘죽음들’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주고받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앞으로 내민 노인의 두 손은 구걸하거나, 무언가를 붙들거나, 요구하거나, 경고하거나, 심판하거나,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은총을 베푸는, 가진 것을 다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손입니다… 4년 전,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만 해도 본 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경외감을 품은 채, 거장이 이끄는 자리에 서 있었을 따름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라르쉬에서의 삶도, 렘브란트의 그림과의 만남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웬 신부가 사제로서의 소명을 시작하고, 사목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영적인 저서를 쓰기 시작한 젊은 시절에 이미 그의 마음에 뿌려지고 자라나기 시작한 영성이 이러한 결정적 시간을 필연적으로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찍이 뿌려진 영성의 씨앗이 고뇌와 회의, 스스로의 약점과 불완전함, 세상의 고통과 함께 성숙되고 정화되고 화해를 이루며 이제 나웬 신부가 「마지막 일기」에서 ‘약함의 영성’(spirituality of weakness)이라 부른 열매로 드러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웬 신부는 자신의 영성의 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이미 젊은 시절에, 자신을 유명하게 한 명저 「상처받은 치유자」(이봉우 옮김, 분도출판사, 2001)에서 이미 예견한 듯싶습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의 영적 삶에게 가장 큰 위험은 자신들에게 ‘두려움이나 고독, 혼란이나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전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온전함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봉사와 섬김의 사목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로서의 삶이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그의 영성의 기본방향은, 그가 이제 사회 생활을 힘차게 시작하는 스무 살 난 조카를 위해 쓴 편지 형식의 영적 권고인 「내 인생의 의미?마르코에게 보내는 편지」(이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8)에서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영성과도 근원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나웬 신부는 이처럼 섬세하고 예리한 자신의 직관을 통해 발견한 영성의 길이 관념이 아닌 실재임을 확인하는 여정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실제로 걷고, 살아내고, 결단하고, 그러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두움, 확신과 불안한 회의 등을 남김없이 겪으며 자신 안에 ‘약함의 영성’을 체화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길을 걷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라르쉬에서 만나고 우정을 나눈 아담 에르네트(Adam Ernett)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나웬 신부는 아담이 순수한 ‘약함의 영성’으로 그를 이끌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 아담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축복이었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탁월하게 증언했는지를 알리고 싶어 했고, 그의 바람과 노력은 「아담」(김명희 옮김, IVP, 1998)이라는 작은 책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아담, 그리고 이별

 

나웬 신부는 안식년 중 2월 12일에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들을 통해 아담이 곧 선종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급히 달려와 병상의 아담을 바라보고 그의 부모들과 슬픔을 나눕니다. 그날 밤, 숙소에서 나웬 신부는 아담이 주님 품에 안겼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아담이 주님께로 간 날부터, 아담의 장례미사 때까지, 그리고 그 한 주 후인 2월 21일 ‘재의 수요일’까지 나웬 신부 일기들은 아담의 삶과 죽음이 가진 의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즈음 그의 묵상은 「마지막 일기」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아름답고 마음을 움직이는 대목일 것입니다. 나웬 신부는 이미 자신이 생사의 기로를 넘겼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죽음에 대해 깊은 묵상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아담의 죽음을 보면서도 그는 다시금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한, 마지막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신앙 안에서 발견하고 확신합니다. 그는 아담이 주님께로 간 날 이렇게 일기에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죽었고 그의 삶은 끝났다.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나는 크나큰 슬픔과 감사의 정을 느꼈다. 나는 동반자 한 사람을 잃었지만 남은 생에 후견인 하나를 얻었다. 아무쪼록 모든 천사가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고 고향에 따뜻이 맞아들여 그가 사랑하는 하느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담을 눈여겨보며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 여기 한 젊은이가 평화로이 누워 있다. 이제 길고 긴 고통은 끝났다. 그의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스스로를 표출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 육신 속에 갇혀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이 서른네 해의 포로 생활이 갖는 심원한 의미에 대해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믿고 기다려야 한다.”

 

몇 개월 후, 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시점에, 아마도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때에 나웬 신부는 지상의 벗들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벗들에게,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아담의 죽음이 그러하듯 그의 죽음 역시 가장 깊은 의미에서 하느님과의 화해를 증언하는 선물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삶과 글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13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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