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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평양의 순교자들9: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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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4 ㅣ No.1628

[평양의 순교자들] (9) 장두봉 안드레아 신부

협박과 폭력에도 “기도로 응하라” 신자들에 권고

 

 

1938년 6월 19일, 강계성당 앞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하는 본당 신자들. 더피 신부가 추방된 뒤 홍도근 신부에 이어 강계본당에 부임한 장 신부는, 이 본당은 물론 중강진본당까지 돌보며 사목해야 했다.

 

 

장두봉(안드레아) 신부는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성품이었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자상한 면모를 보여줘 ‘성인 신부’로 불렸지만, 내면은 강인하고 올곧은 성품이어서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끊임없는 박해에도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면하며 자신도 기도 속에서 순교의 길을 걸었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올곧은 성품으로 자라

 

장두봉(안드레아) 신부는 1917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현 남포특별시 천리마군) 송호리 조개 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어머니는 수산나라는 이름만 전해지며, 6형제 중 셋째였다. 무척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과묵하고 착실한 성격이었다.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공소 회장 김덕연의 권유와 추천 때문이었다. 1931년 4월 서울로 유학을 와서 5년제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했고, 1936년 소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 뒤 1년을 쉬고 나서 1937년 4월 덕원신학교에 진학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생 시절의 장두봉은 몸가짐이 늘 단정했고 신앙심이 독실했기에 방학이 돼 고향으로 돌아가면 공소 교우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온순하고 명랑한 성품이어서 신학교 동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몸이 늘 허약해 축구와 농구를 즐기며 몸을 단련하곤 했다.

 

사제품을 받은 것은 홍용호 신부가 평양대목구 감목대리로 있던 1943년 12월 5일 경성(서울)대목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였다. 선배들과 달리 경성대목구에서 노기남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게 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미국 출신의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전원 감금됐다가 추방되면서 노 주교가 대목구장 서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제 수품 당시에 이미 폐결핵으로 투병 중이던 그는 그 뒤로도 대목구청에서 몇 달 동안 요양을 해야 했다.

 

1942년 3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김동철(가운데) 신부의 사제 서품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장두봉(왼쪽에서 두번째) 부제.

 

 

신앙의 불모지에서 ‘성인 신부’라 불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사제가 부족한 교구 현실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추방으로 사제가 부족하던 터여서 장 신부는 1944년 4월 비어있던 순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안주본당 주임 조인원 신부가 임시로 순천본당을 돌보던 터여서 2년 만에 본당 신부를 맞이하게 된 본당 공동체는 신앙의 활력을 되찾았다. 물론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여서 본당에 대한 일경의 핍박은 극심했지만, 장 신부는 신자들의 내적 신심을 강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신앙의 기쁨을 되찾도록 하는 데 애를 썼다.

 

그해 11월, 당시 경성대목구에서 평양대목구에 파견됐던 사제들이 본 교구로 돌아감에 따라 장 신부는 순천본당에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강계본당으로 전임됐다. 병이 채 낫지 않아 건강이 그리 좋지는 못했지만, 그는 강계본당에 부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계와 중강진 일대는 천주교 신앙의 불모지였기에 신자들의 신심 강화와 함께 예비신자를 늘리기 위한 전교 활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장 신부는 성실한 덕행 실천이 남달랐기에 신자들에게서 ‘성인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교우 집에 은신했으나 결국 발각돼

 

강계에서 8ㆍ15 해방을 맞은 장 신부는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종교 활동의 자유를 되찾게 되자 전교에 박차를 가하려 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공산당이 득세하며 종교 활동에 제약이 걸렸고 건강마저 악화해 장 신부는 결국 1946년 9월 한도준 신부에게 본당을 인계하고 평양대목구청으로 돌아왔다. 이어 고향인 조개 섬에 들어가 3년 가까이 휴양해야 했다.

 

1949년 8월 중화본당 주임으로 있던 강현홍 신부가 정치보위부원들을 피해 월남하자 장두봉 신부는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그해 9월부터 중화본당에 부임했다. 목자 잃은 양 떼를 돌보겠다는 그의 마음에는 이미 ‘순교 원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랬기에 사제들이 다 잡혀가는 상황에서도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줄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압박으로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장 신부는 신자들을 격려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말고 신앙으로 대처하라며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하곤 했다.

 

그해 12월 6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다가올 즈음 장 신부는 본당 출신 지학순 신학생(훗날 원주교구장 주교)과 신자 한 명을 데리고 중화본당 소속 공소를 순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7일 평남 중화군 마정면 검암리(현 평양시 낙랑구역 송남리) 공소에서 판공성사를 주고, 강 건너 중화군 남곶면 애포리(현 평양시 낙랑구역 금대리) 공소에서 성사를 집행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평양 대신리본당 청년 신자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급히 그를 찾아와 그날 새벽에 평양 시내에 남아 있던 박용옥ㆍ서운석ㆍ이재호 신부가 체포된 사실을 알리면서 장 신부도 체포령이 떨어졌으니 잠시 몸을 피하라고 권유한다. 이에 그는 애포리 공소 신자들과 의논한 뒤 그날 밤으로 평양에서 온 청년들과 함께 간 것처럼 꾸민 뒤 애포리에서 다시 검암리로 돌아가 교우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다음 날 장 신부 일행이 사용한 배의 원주인이 자신이 정박시킨 곳과 다른 곳에 배가 있는 걸 보고 누군가가 자신의 배를 타고 검암리로 건너간 것 같다고 보안서에 신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보안서원들은 검암리공소 교우인 윤희식(미카엘)을 연행해 고문했고, 고문을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장 신부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실토했다. 장 신부는 은신한 지 닷새 만인 12월 12일 보안서원들에게 체포돼 평양으로 압송됐으며, 평양 인민 교화소 특별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50년 10ㆍ20 평양 수복 직전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두봉 신부는

 

■ 1917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송호리 출생

■ 1936년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 1943년 덕원신학교(대신학교) 졸업

■ 1943년 12월 5일 경성대목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사제 수품

■ 1949년 12월 12일 중화본당 검암리공소 교우 집에서 체포 연행돼 행방불명

■ 소임 : 순천본당 주임, 강계본당 주임, 중화본당 임시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4일, 오세택 기자, 자료 제공=평양교구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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