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레지오ㅣ성모신심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리투아니아 실루바(1608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06 ㅣ No.878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리투아니아 실루바(1608년)

 

 

– 현재 실루바의 성모 탄생 대성당의 제단화인 게드가우다스가 로마에서 가져온 성모화

 

 

1) 시대적 배경

 

1387년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대공은 유럽 나라 중에서 가장 늦게 가톨릭을 받아들였으나 비타우타스와 함께 가톨릭 전파에 온 힘을 쏟았다. 그의 후임 비타우타스 대공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리투아니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대공은 승리의 원인을 가톨릭 신앙에서 찾았다. 이에 대공은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으며 리투아니아는 강력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외교관이었던 게드가우다스는 대공의 지시를 받아 실루바에 최초의 가톨릭 성당을 봉헌하였으며, 로마 여행 중에 호데게트리아 성모화(길을 인도하시는 성모)를 받아와 실루바 성당에 모셨다.

 

그런데 1532년 실루바의 새로운 영주 자비샤가 칼뱅주의를 신봉하면서 모든 주민을 칼뱅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가톨릭 미사가 금지되었고 가톨릭 재산은 몰수되어 칼뱅교도들에게 넘어갔다. 이어 모든 성당은 폐쇄되고 사제는 추방되어 실루바는 완전히 칼뱅주의가 지배하였다. 실루바의 마지막 신부가 된 홀룹카는 게드가우다스의 성모화, 미사 도구, 토지 등 성당이 보유한 재산이 비타우타스 대공에 의해 가톨릭에 봉헌되었음을 증명하는 문서 등을 철제 궤짝에 넣어 봉인한 다음 바위 옆에 묻었다. 얼마 후 칼뱅주의자들은 성당을 폐쇄하고 파괴하였다. 이후 80년의 세월이 흐르자 실루바에서 가톨릭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나이 많은 소수의 노인만이 실루바에 성당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었다. 이때 성모님이 실루바의 외곽에서 발현하셨다.

 

 발현한 성모님을 목격한 4명의 목동과 칼뱅교 목사(좌), 박물관에 보관 중인 울룹카 신부가 바위 옆에 묻었던 철제 궤짝(우)

 

 

2) 성모님의 발현

 

1608년 여름, 성모님이 실루바에서 양 떼를 치던 4명의 목동에게 나타나셨다. 성모님은 성자를 품에 안은 채 눈물을 흘리시며 바위 위에 맨발로 서 계셨다. 성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시다가 곧 사라지셨다. 목동 중 한 명이 달려가서 칼뱅교 목사에게 방금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였지만 목사는 비웃으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목동들은 부모와 이웃들에게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린 여인에 대해서 말하였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바위 앞에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목사도 따라나섰다.

 

칼뱅교 목사는 바위 앞에서 이러한 상황을 가톨릭의 음모로 간주하여 “이것은 사탄의 소행이 분명한데 여전히 로마의 미신을 믿는다”라며 사람들을 질타했다. 그가 그곳을 떠나려고 돌아서는 순간, 여인의 가슴 저린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깜짝 놀라 다시 뒤돌아선 목사는 목동이 이야기한 대로 바위 위에 서서 아이를 안고 울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목사는 잠시 마음을 진정한 후 용기를 내어 “당신은 왜 울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여인은 슬픈 목소리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이 땅에서 경배받았다. 그러나 이제 이 신성한 땅이 그저 농사짓고 가축을 놓아 기르는 곳으로 전락하였다”라고 답하고 사라지셨다.

여인의 대답을 들은 목사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주민들은 여인이 바로 성모님이시고 아이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목사는 도망쳤으며, 발현 장소에 있었던 주민들에 의해 성모님이 성자와 함께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 실루바 성지 전경. 가까이 보이는 흰색 경당이 성모 발현 기념경당, 멀리 보이는 성당은 성모 탄생 대성당

 

 

그동안 가톨릭 신앙을 잊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성모님의 메시지에 자신들의 행동과 생활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성모님의 발현은 강력한 영향을 미쳐 칼뱅교를 신봉하던 마을 주민 전체가 회심했고, 인근 주민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발현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1629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는 1만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실루바에 모여 발현하신 성모님을 생각하며 성체를 영하는 감동적인 일도 일어났다.

 

 

3) 성모님의 발현 이후

 

성모님이 발현하실 때 서 계셨던 바위는 바로 훌룹카 신부가 성모화와 주요 문서들을 궤짝에 넣어 파묻은 곳이었다. 성모님이 특별히 그 바위 위에서 발현하셨다는 것은 궤짝 속에 있는 성모화와 각종 문서와 성물 등의 진정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톨릭으로 복귀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내리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모님의 발현이 있은 지 4년 후 카자케비추스 신부는 주교의 지시로 성모님의 발현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소식은 한 눈먼 노인에게도 전해졌다. 100세가 넘은 노인은 약 80년 전 훌룹카 신부와 함께 바위 옆에 궤짝을 묻었던 밤을 기억해 냈다. 신부와 마을 주민들은 그가 궤짝이 묻혀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장소로 데려갔다.

 

– 성모 발현 기념 성당 내 제단 아래에 있는 성모님이 발현한 바위

 

 

바위에 가까이 다다르자 노인에게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다. 노인은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으며 궤짝이 묻혀있는 자리를 가리켰고 사람들은 바위 옆에서 궤짝을 찾아내 열었다. 그 속에는 완벽하게 보존된 성모화, 교회 증서 등 문서, 황금 성물과 예복들이 그대로 있었다. 1663년 주교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성스러운 바위 위에 제단이 있는 작은 경당을 만들었다. 1770년 런던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성모상을 가져와 바위 위의 제단에 봉헌하였는데, 그 앞에서 기도한 신자들이 영육 간의 건강을 회복하여 성모상은 ‘병자들의 건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1908년 성모님 발현 300주년을 맞이하여 성스러운 바위 위에 새로운 경당을 세우는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1924년 9월 8일 복되신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에 44m 높이의 흰색 경당이 새로이 봉헌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바위는 경당 중앙에 위치한 제단 아래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가까이서 볼 수도 있으며 만져 볼 수도 있다. 바위에는 성모님의 발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한편 1612년 주교는 궤짝에서 찾아낸 주요 문서들을 바탕으로 빌뉴스 법원에 가톨릭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은 판사들 대부분이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10년이나 걸렸지만 명확한 근거 문서들이 충분하여 어쩔 수 없이 1622년 가톨릭교회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가톨릭의 재산을 반환하라는 판결은 전 국민이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는 현상이 광풍처럼 전국으로 확산하여 리투아니아는 개신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래의 가톨릭 국가로 회복하였다.

 

– 성모 발현 기념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93년, 좌), 광장에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상과 성모 탄생 대성당(1786년 봉헌, 우)

 

 

리투아니아는 북쪽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트 3국으로 불린다. 이 세 나라는 면적과 인구가 비슷하고 문화와 풍속, 심지어는 사람들 생김새까지 비슷하며, 나아가 외세의 지배와 독립 시기도 똑같아 마치 하나의 운명 공동체처럼 보인다. 이런 유사함 속에 확실히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종교다. 세 나라 모두 상당 기간 신교의 지배를 받았지만 리투아니아만은 신교로부터 벗어나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여 다시 가톨릭 국가가 되었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그대로 신교인 루터교가 주된 종교로 있다. 리투아니아가 가톨릭이 완전히 잊힌 상태에서 다시 가톨릭 국가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실루바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6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 도곡동성당 인자하신 모후 Pr.)]



7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