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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벽으로 에워싸인 거룩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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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3 ㅣ No.276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벽으로 에워싸인 거룩한 공간

 

 

제의와 성당은 공간을 격리한다. 제의는 제사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나타낸다. 제의를 입고 제단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다른 사람과 공간적으로 구별된다.

 

성당도 마찬가지다. 사제가 제의를 입듯이 하느님의 백성도 제대를 겹겹이 에워싼다. 제단을 중심으로 하는 의식 공간을 에워쌈으로써 바깥 세계와 분리되고 백성은 그 안에 함께 있을 수 있다.

 

사원을 뜻하는 ‘temple’은 라틴어 ‘templum’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잘라낸다’는 뜻이다. 이쪽과 저쪽을 잘라내어 이쪽을 저쪽과 구별한다는 말이다. 집이나 학교, 도서관, 병원 등 크고 작은 건물은 사람을 에워싸는 것이고 그것으로 바깥 세계와 격리된 하나의 ‘세계’를 확립해 준다. 건축은 이처럼 인간의 삶을 에워싸며 인간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게 해준다.

 

종교는 담이나 견고한 벽 또는 회랑으로 거룩한 곳을 속된 세상에서 떼어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전을 포함한 외부 공간을 모두 신역(神域)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성당 안에 있는 공간만이 성역이고 벽의 바깥은 세속이었다. 바라보려고 지은 그리스 건축과 달리, 그리스도교 교회 건축은 벽으로 분명하게 에워싸인 공간을 만들었다. 성당 벽의 내부만이 예배의 장소이며 ‘에워싸는 벽’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성당은 에워싸인 내부 공간에 중요한 기능과 의미가 있으므로 당연히 표현의 주안점은 내부에 있다. 어디까지나 외부는 내부 공간이 표현된 결과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성당이 곳곳에 일제히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성당을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이라고 하는데, 이 건축은 여전히 로마 건축의 연장선에 있었다. 로마 건축처럼 원기둥 위에 수평 부재인 ‘엔태블러처(entablature)’를 올리고 다시 이것으로 그 위의 벽과 지붕을 받쳤다. 그렇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에서는 원기둥 위에 엔태블러처가 아닌 아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왜 그랬을까?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 걸리는 엔태블러처는 크고 길면서 하나로 된 돌이어야 했다. 이런 큰 돌을 잘라내 운반하고 가공하는 데에는 대단한 노력과 기술이 요구되었다. 원기둥도 마찬가지여서 한 개의 큰 돌에서 정확하게 잘라내야 이런 기둥을 얻을 수 있었다.

 

도시가 쇠퇴하면서 여러 건물에 있던 원기둥을 가져와 사용했는데, 기둥이 짧으면 다른 돌을 잇대어 썼다. 그러나 수평으로 걸리는 엔태블러처는 그만한 돌을 구할 수도 없었으며 다른 건물에 쓰인 돌을 가져다 쓸 수도 없었다. 실제로 엔태블러처로 쓸만한 돌을 얻었다고 해도 그 위에 벽을 더 높게 얹어야 하는 성당에서는 구조형식으로도 엔태블러처는 불리했다.

 

 

벽과 아치와 볼트로 지은 이유

 

더구나 6세기 이후 고대 말기에는 이런 건설 기술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전적인 교양을 갖춘 건축가들과 기술이 뛰어난 장인들도 사라져 버렸고, 로마 시대의 채석장도 생산을 중지해 버렸다. 건설공사 중에도 가장 어려운 것이 돌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생각해 낸 것은 성당이 지어지는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작은 돌을 쌓아 만든 벽과 아치로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원기둥 대신에 작은 돌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사각형의 ‘피어(pier, 교대)’가 사용되었다. 이 피어는 원기둥과는 달리 벽에 아치 형태의 연속적인 개구부를 뚫고 난 뒤에 생기는 기둥이다. 이 피어 위에는 아치가 놓이는데, 이렇게 하면 다시 그 위에 높게 놓이는 두꺼운 벽을 받쳐주는 데 유리해진다. 로마네스크나 고딕 성당에 들어서면 좌우에 기둥과 아치가 늘어서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벽으로 에워싸여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에서는 천장에 목조를 노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로마네스크에서는 벽면과 함께 ‘볼트(vault)’라고 하는 돌로 된 둥근 천장을 길게 만드는 데 열심이었다. 자른 돌로 만든 아치를 한 방향으로 연속시키면 대나무를 반으로 자른 것처럼 둥근 지붕이 생기는데, 이를 바렐 볼트(barrel vault) 또는 터널 볼트(tunnel vault)라고 한다.

 

이렇게 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부를 견고한 돌벽으로 둘러싸서 천장과 벽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내부는 외부와는 다른 세계,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되고 에워싸인 감각을 더욱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목조의 경사 지붕을 올려 비를 막았다.

 

실바칸의 시토수도회 성당(12세기 중반).

 

 

그러나 돌로 만든 볼트 천장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평탄한 천장은 밑으로 떨어지면 그만이지만, 볼트에는 따로 떨어진 돌들이 원을 이루기 때문에 볼트에는 이것을 받치고 있는 벽을 수평으로 강하게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 이 힘을 추력(推力, thrust)이라고 한다.

 

이 수평의 추력과 수직으로 내리누르는 힘이 합쳐지면 대각선으로 벌어지려는 힘이 생긴다. 스케이트를 탈 때 자꾸 두 다리가 대각선 방향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비나 눈이 흘러 떨어지기 쉽게 물매가 급한 높은 지붕은 겨울의 강한 계절풍을 받기 쉽고, 지붕을 받치는 벽의 상부에는 커다란 부하가 걸리게 된다. 이 힘을 막지 못하면 볼트 지붕이 무너지고, 한 번 무너지면 긴 볼트의 지붕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이런 위험을 막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벽을 훨씬 더 두껍게 쌓는 것이다. 그러나 벽을 두껍게 쌓으면 반대로 창을 내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중앙 통로 좌우의 벽에 이보다는 낮게 또 다른 통로를 덧붙이면, 더 큰 공간을 만들면서도 중앙 통로의 벽을 두껍게 하지 않고 좌우로 벌어지는 벽을 받쳐줄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 통로의 높은 부분에 제법 큰 창을 둘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렇게 창을 낼 수 있는 건물의 윗부분을 ‘클리어스토리(clerestory)’라고 한다. 여기에 다시 가장 바깥쪽 벽면을 보강하려고 기둥처럼 생긴 ‘버팀벽(buttress)’을 덧댔다.

 

 

성당은 벽으로 만든 최고의 초월 공간

 

벽과 창은 반대의 관계에 있다. 창이란 결국 벽의 일부를 없애서 만든 ‘벽에 뚫린 채광용 구멍’이다. 크게 뚫리면 창이고, 작게 뚫리면 벽 사이에 남은 공간이다. 벽을 뚫어 창을 내면 돌로 만든 구조 벽이 하중을 지지하는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 때문에 빛을 받아들이겠다고 이런 육중한 구조 벽에 구멍을 뚫어 창을 낸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벽이 지붕을 지지할 수 있게 견고해야 했던 초기 교회에서 창은 작을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벽에 작게 뚫린 창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은 어두운 바닥과 벽의 석재에 비춘다. 뚫린 부분이 작으면 반투명하고 노르스름하여 따듯한 느낌을 주는 ‘앨러배스터’라는 얇은 대리석 조각으로 막아 빛의 양을 줄이고 거룩한 느낌을 자아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로마네스크 성당에서 변함없이 나타나던 빛과 그림자의 드라마였다. 그 빛은 안에 모인 인간에게 어두움 속에서도 조용히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이었다.

 

12세기에 고딕 대성당에서 이런 중후한 돌벽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육중한 벽을 공중으로 날아가듯이 건너는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를 발명한 덕분에 훨씬 더 큰 창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늘고 긴 선이 기둥 밑에서 상승하며 올라가 저 높은 천장에서 볼트를 받쳐주는 ‘리브’로 이어졌다.

 

이렇게 고딕 벽면의 모든 부분은 로마네스크의 두꺼운 벽과는 정반대로 가늘고 긴 선으로 분할되고 이어지며 짜여졌다. 그 결과 실제의 구조는 뒤로 감춰지고, 마치 모든 하중을 받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얇게 보이는 벽의 선들이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딕 성당의 공간이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고 가볍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베의 생피에르 대성당(프랑스, 13세기).

 

 

여기에 다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화려한 빛이 놀랍게도 내부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는 벽에 뚫린 창이 아니었다. 그것 역시 바깥세상을 결정적으로 단절하는 빛나는 벽이며 빛의 영역이었다. 마음이 땅에 있지 않고 중력의 지배를 받는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 이 세상에 없는 신비로운 빛의 공간은 건축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산물이었다.

 

벽은 높게도 낮게도 두껍게도 얇게도 에워싼다. 벽은 단호하게 서서 우리를 에워싸면서 이쪽과 저쪽을 끊어내어 공간을 구분하지만, 부드럽게 벽에 감싸일 때 우리는 마음의 쉼을 얻는다.

 

벽이 없으면 창도 없고, 창이 없으면 안에 빛이 비칠 수도 없으며 그림자를 떨어뜨릴 수도 없다. 실바칸의 시토수도회 성당과 보베의 생피에르 대성당을 보라. 그런 벽이 로마네스크에서는 두꺼운 벽과 희미한 빛으로, 고딕에서는 얇은 벽과 가득찬 빛으로 바깥세상과 단절된 빛나는 공간이 완성되었다. 한 장의 벽으로 바깥의 세속적인 세계와 확연하게 구별하여 만들어낸 최고의 초월적인 공간, 그것이 성당이라는 건물이다.

 

* 김광현 안드레아 - 건축가. 서울대교구 반포본당 교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전주교구 천호성지 내 천호부활성당과 천호가톨릭성물박물관, 성바오로딸수도회 사도의 모후 집 등을 설계하였다.

 

[경향잡지, 2016년 8월호, 김광현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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