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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저를 보내주십시오1-2: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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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4-10 ㅣ No.1356

[저를 보내주십시오] (1)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 신부 (상)


“한국에 온 지 64년째… 이 땅과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게 됐죠”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는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의 노력과 사랑이 뒷받침돼왔다. 교회 곳곳 다양한 사목 분야에서 섬김과 사랑의 사명을 실천하며 교회 성장의 디딤돌이 된 외국인 선교사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며 낯선 이국땅을 찾아 지금도 바로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선교사들. 그 자체로 한국교회의 역사인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새 기획 ‘저를 보내주십시오’의 첫 주인공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 신부(Gerard E. Hammond·90)다.

 

- 1960년 서품식 후 찍은 가족사진.  사진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제공

 

사제의 길이 가장 좋은 몫

 

함제도 신부는 1933년 8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미국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지요. 부모님도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담배 가게에서,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일하셨습니다.”

 

독실한 신자 가정에서 자란 함 신부는 어린 시절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자연스럽게 사제 성소를 키웠다. 함 신부는 “집안에 교구 사제가 두 분이나 계셨고 나를 가르친 메리놀 수녀회 수녀님도 ‘사제의 길이 가장 좋은 몫이다’라고 하셔서 점차 사제가 되고픈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947년 9월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짝꿍 장익과의 인연 그리고 선교 희망지는 1·2·3지망 모두 “코리아!”

 

함 신부가 태평양 너머 낯선 한국을 알게 된 것은 고(故) 장익 주교(십자가의 요한·1933~2020)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소신학교에서 장익 주교와 짝꿍으로 만나 절친이 됐다”며 “오랜 시간 함께 하며 한국을 잘 알게 됐고, 그는 나에게 한국 선교를 권유했다”고 회상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행에 대한 열망이 피어났다.

 

한국과의 인연은 신학생 때도 이어졌다. “메리놀 대학교 신학생 시절, 1920년대부터 북한에서 선교하다 일제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신부들에게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그는 “장익 주교와의 인연과 신부님들에게 들은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 선교를 결정한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사제품을 받은 후 함 신부는 메리놀회 총장 신부와의 파견지 결정을 위한 면담에서 한국행을 강력히 희망했다.

 

“1·2·3지망 모두 ‘코리아’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총장님은 교회가 지명하는 곳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어쨌든 전 한국 가고 싶습니다’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함 신부의 바람대로 한국행이 결정됐다. 그렇게 희망했던 나라로의 파견이었지만 막상 가족과 헤어지는 날 밤, 온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함 신부는 당시를 ‘너무나 슬퍼 잊을 수 없는 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가족은 제가 좀 더 곁에 머물기를 바랐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젊을 때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 생각했다”고 전했다.

 

한국으로의 여정은 무려 3주가 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화물선을 타고 일본, 부산, 인천까지. 인천에 도착해서 다시 트럭을 타고 메리놀회 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1960년 8월이었다. 함 신부는 초대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디(야고보·1898~1983) 주교의 비서로 한국에서의 사목을 시작했다.

 

- 한국에서의 사목 생활 중 병자성사를 주는 모습. 사진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제공

 

 

낯선 타향살이 어려움도 잠깐… 한국에 대한 호기심 키워나가

 

모든 것이 낯선 한국에서의 처음은 무척 고됐다. 함 신부는 “사제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당시엔 6개월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과 소통하며 점차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 잡았다. 함 신부는 “집에 들어갈 때 지켜야 할 예의나 식사 예절 등 한국의 풍속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고 특히 존댓말 문화가 인상 깊었다”고 기억했다.

 

“아이들에게 약간은 어눌한 존댓말로 ‘진지 잡수세요~’ 하면 모두가 막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한국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황이었다. 함 신부는 “시골뿐 아니라 수도 서울마저도 밤에는 전기가 부족해 어두컴컴한 날도 잦았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청주교구도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함 신부는 신부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사제관의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간혹 파디 주교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함 신부는 “주교님은 선교를 왔으니 한국인들과 똑같이 생활하기를 바라셨다”며 “자전거를 사고 싶다고 하자 한국인들보다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며 혼내셨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디 주교와의 인연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함 신부는 “지금도 너무 보고 싶을 때면 주교님 묘를 찾아가 인사드린다”고 말했다.

 

 

지금도 웃음 짓게 하는 에피소드… ‘묵주’ 기도 잘못 발음해 “맥주 꼭 하세요~”

 

함 신부는 이후 청주교구 북문로본당, 수동본당, 괴산본당에서 사목했다. 본당신부로 사목하던 시절도 갖가지 일화가 가득했다. 그는 “고해성사를 주다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묵주기도가 아닌 ‘맥주’를 꼭 하라고 보속을 줬다”며 “남자 신자들에게 소문이 퍼져 그 뒤로 내게 성사 보러 오는 줄이 길어졌다”며 웃었다. 지역에 오일장이 열리면 시장을 직접 찾아 ‘장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또 공소를 찾아가며 신자들과 소통하기를 즐겼다. 그는 “이 시절 소주와 삼계탕, 특히 삼계탕을 참 많이 먹었다”고 전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길래 삼계탕이라 했더니 가는 공소마다 삼계탕을 주셨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삼계탕만 먹은 적도 있습니다.”

 

 

선교는 로맨스…“선교사는 인간답게 사랑해야!”

 

함 신부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을 사랑하게 됐고, 한국인과 똑같아지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에서 이미 언급했던 ‘선교는 로맨스다’라는 말을 되새겼다.

 

“로맨스는 인간다움을 뜻합니다. 인간의 삶은 곧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곧 선교사도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며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함 신부는 “청주교구는 내 마음의 고향”이라며 깊은 애정을 표했다. 선교 초기 타지 생활의 어려움 속 벗어나고 싶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떠나기 싫은 집이 됐다. [가톨릭신문, 2024년 4월 7일, 이형준 기자]

 

 

[저를 보내주십시오] (2)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 신부 (하)


“선교는 함께 사랑 나누는 ‘로맨스’… 북한 선교는 짝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Gerard E. Hammond·90) 신부는 북한에 62회 다녀오는 등 북한 선교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특히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열심이었다. “선교는 로맨스이지만 북한과의 선교는 짝사랑 같다”는 함 신부. 지금도 북한으로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함 신부의 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파디 주교와의 약속, “꼭 북한에서 봉사”

 

메리놀 외방 전교회는 1923년부터 북한 지역에 선교사 파견을 시작했다. 함제도 신부는 한국 부임 초기 초대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디 주교(야고보·1898~1983)의 비서를 지냈다. 파디 주교는 1932년 평양교구 비현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의주본당 주임을 지내다 일제에 추방됐다가 6·25전쟁 때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파디 주교는 함 신부에게 매일 북한 선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우리는 이제 북한을 갈 수가 없어요. 나중에 꼭 북한에 가서 한민족을 위해서 봉사해 줬으면 좋겠어요.” 함 신부는 그때마다 주교님께 꼭 북한에 다시 가 선교하겠다고 답했다.

 

함 신부는 청주교구 시절부터 북한과 인연이 꽤 닿았다. 6·25전쟁 이후 충청북도에 성당이 감곡과 청주, 제천, 충주 교현, 옥천 등 5개가 있었는데, 5개 성당 모두에 북한에서 온 신부들이 사목하고 있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피난 온 신자도 많았어요. 본당의 일을 돕는 분, 식사를 준비하거나 빨래를 도맡아 하시는 자매님들도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었죠.”

 

- 2007년 유흥식 추기경(첫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평양 육아원을 방문한 함제도 신부(첫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북한 선교의 시작

 

1989년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 지부장으로 발령받은 함 신부는 본격적으로 북한 선교에 나섰다. 함 신부는 현재까지 북한에 총 62번 다녀왔다. 1년에 세 번꼴. 1990년대에는 북한에 가는 법이나, 가는 길을 아는 사람, 북한과 접촉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님께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추기경님이 참 좋은 생각이라고 화답하셨죠.”

 

첫 방문은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미국 여권이 필요했고 중국 베이징의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은 후 비행기 표를 구입하고 하룻밤 묵은 후에야 북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행여 반역자로 몰릴까 걱정도 됐다. 한국에서 사목하는, 그들이 원수라고 부르는 미국인 신부를 달갑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첫 방문 때는 무척 긴장했었죠. 하지만 그곳의 여러 사람과 만나며 이들이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점점 더 마음이 편해졌어요.”

 

1996년 방북 때는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미화 5000달러가 든 봉투도 준비해 줬다. 김 추기경뿐 아니라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유흥식(라자로) 추기경과 주교들, 전국 각 교구와 카리타스,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도 북한 돕기에 관심이 많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방한했을 때 함 신부에게 “(북한에) 꼭 가자”고 말했다.

 

- 북한에 있는 유일한 성당인 평양 장충성당.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함제도 신부는 곧 북한 신자들과 대화할 수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낙하산이라도 타고… “내년에 평양에서 우리 같이 하자”

 

북한에서의 가장 안타까운 기억은 회복이 어려운 환자들의 콜록거리던 기침 소리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꿈에서까지 생각났다. 콜럼버스 기사단(Knight of Columbus)에서 받은 기금으로 북한에 호스피스 건물도 지었다. 함 신부는 “환자들이 나아 퇴원할 때가 가장 기쁜 날”이라며 “환자들의 집까지 동행해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다 분단 전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다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내년에 평양에서 우리 같이 하자.” 함 신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바로 유다인들이 흩어져 살 때 “내년에 우리 예루살렘 간다”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앞서 “선교는 로맨스”라고 했지만 북한 선교는 짝사랑 같다고 함 신부는 말했다. 짝사랑이 해주는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는 냉면을 꼽기도 했다.

 

함 신부는 “지금은 북한에 못 가니까 낙하산으로라도 가면 좋겠다. 북한에도 속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비쳤다.

 

 

북한에서 하고 싶은 것

 

함 신부는 북한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메리놀회가 선교를 시작한 평양교구의 신의주부터 평양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두봉 주교와 함께 북한에 갔을 때다. 다 함께 묵은 변두리 호텔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가 함께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지내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함 신부는 그 염원을 담아 그곳에 조그마한 요셉 성인상을 하나 묻었다.

 

또 함 신부는 6·25 전쟁 중 공산군에 체포돼 중강진에서 순교한 패트릭 번(P. J. Byrne·1888~1950) 주교의 시신을 모셔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북한 선교를 위해 현재 준비 중인 교구 사제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도 “북한에 갈 때 나도 불러달라”는 말을 남겼다.

 

- 2014년 방한 때 메리놀회 한국지부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맨 왼쪽)과 악수 중인 함제도 신부. 

 

 

한반도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위해… “서로 사랑하세요”

 

한국에 온 지 64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함 신부는 “북한은 물질적으로 어렵지만 한국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한국이 전쟁 후에는 함께 뭉쳐서 살았는데 살기 좋아지면서 서로 무관심해졌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의 한국은 심리적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많은 이가 불평과 원망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우려했다. 본인은 먹을 것이 없어도 손님에겐 식사를 권하던 시절의 인사나 배려가 사라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함 신부는 민족의 화해와 대화, 평화를 바라며 ‘한국’, ‘북한’보다 ‘한반도’(코리아)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함 신부는 “통일까지는 어렵더라도 전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같은 역사를 가진 같은 민족으로서 내가 한국에서 기쁘게 사는 것처럼 북한에서도 평화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한민족은 순교자의 후손”이라며 희생정신을 강조한 함 신부는 북한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이나 무관심을 타파하고 계속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함 신부는 한국에서의 64년 선교사 인생을 한마디로 함축하며 가톨릭신문 독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서로 사랑하세요. 서로 관심을 가지세요.” [가톨릭신문, 2024년 4월 14일, 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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