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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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 요셉 성월 특집: 순교자의 아버지가 남긴 신앙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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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3-14 ㅣ No.2216

[성 요셉 성월 특집] 순교자의 아버지가 남긴 신앙 유산


대를 이어 굳건해진 신앙의 기틀, 오늘에 이어져 찬란히 빛나다

 

 

- 십자가와 성요셉상. 온갖 박해를 이겨낸 아버지들의 신앙은 자식에게 전해져 현재에 이르렀다. CNS 자료사진

 

 

아버지의 삶은 자식에게 거울과 같다. 책임감있고 성실한 아버지, 친구처럼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자식에게 그대로 대물림되곤 한다. 아버지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이웃사랑은 이 땅에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게 했다. 박해시기 신앙선조들은 요셉 성인을 이렇게 묵상했다. “요셉 성인은 세상에서 일상의 일을 하셨고 직업도 비천하였으며, 오랫동안 힘들게 노동하셨다. 성인은 세상에서 비천하고 곤궁한 것이 너와 같았으며, 거친 음식과 옷이 너와 같았고, 세파에 시달리며 분주함도 너와 같았다.”(「성약슬성월」 중)

 

요셉 성인의 덕행을 따랐던 오래전 아버지들의 신앙은 자식에게, 또 그 자식에게 전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성 요셉 성월을 보내며 순교자의 아버지가 남긴 신앙 유산을 소개한다.

 

 

성 김제준 - 아들 성 김대건 : 정직하고 성실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굳은 믿음

 

건장한 체격에 기운이 셌던 성 김제준(이냐시오). 그의 아들 김대건(안드레아)은 아버지의 체력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이어간 모습은 꼭 닮았다.

 

성 김대건 신부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증조부인 복자 김진후(비오) 때부터다. 면천 군수로 재직하던 김진후 복자는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신앙이 깊었던 만큼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성 김제준의 가족들. 김대건 신부의 고모 김 데레사, 증조부 김진후(비오), 숙조부 김종한(안드레아)이 순교했고, 김제준은 신유박해의 혹독함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냉담했다.

 

1816년 무렵, 성 정하상(바오로)의 인도로 되찾은 그의 신앙은 더욱 확고해져 있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움을 경험한 성 김제준은 이후 태어난 아들 김대건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봉헌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 정직하고 성실하게 신앙의 길을 걸었던 그의 삶은 아들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열심한 교우들과 교류하고자 가족들을 데리고 거처를 여러 번 옮겼던 성 김제준은 용인의 깊은 산골인 광파리골, 성애골 등을 거쳐 굴암(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에 정착했다.

 

1836년 초,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해 세례를 받고 굴암으로 돌아온 성 김제준은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고 그 무렵 굴암 공소회장으로 임명됐다.

 

모방 신부는 당시 회장의 일에 대해 “신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고 천주십계(십계명)와 성교사규를 지키도록 가르치고 신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살펴보는 일과 비신자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개종하는 이들을 새 신자로 받아들이는 직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성 김제준은 신자들과 함께 싫증이 날 때까지 교회서적을 읽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신자들은 그를 ‘신명’(信明)이라고 불렀다. 또한 대여섯 명의 장정들을 능가할 만큼 기운이 셌다고 알려진 성 김제준이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성실하게 교우들을 이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김제준의 열심한 신앙생활을 눈여겨본 모방 신부는 교우촌 순방을 하며 그의 집에 머물렀고, 이때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다.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에 나오는 “김대건이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신학생으로 뽑혔다”는 증언은 아버지의 열심한 신앙이 아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데다 아들을 마카오로 보내 유학시켰다는 죄목이 더해져 성 김제준은 다른 신자들보다 혹독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고초 끝에 성 김제준은 1839년 9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아버지의 순교는 아들이 굳건히 순교의 믿음을 지니는 계기가 됐다. 이는 순교자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에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43년 1월 15일자 서한)

 

 

성 유진길 - 아들 성 유대철 :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용감함 닮은 부자

 

허벅지 살점을 한 점 떼어내는 고문 중, “이것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라고 태연히 대답했던 13살 아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성 유대철(베드로)의 용감함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됐다.

 

유대철의 아버지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은 정삼품 벼슬까지 올랐던, 명망 높은 집안 출신이었다. 집이 부유하고 훌륭한 지위에 있었지만, 그는 영광이나 쾌락보다 진리를 탐구하는데 몰두했다. 인간과 세상의 기원, 종말에 대해 알고자 종교에 대해 연구하고 책을 탐독했던 유진길.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천주교를 믿는 탓에 처형됐다는 말을 듣고 ‘혹 그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생각하고 천주교인을 만나고자 했다. 그의 용감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권 암브로시오를 소개받은 성 유진길은 그에게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오래전부터 찾던 진정한 종교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천주교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 이를 알리고자 행동하기 시작했다. 성 유진길은 성 정하상을 비롯한 몇몇 교우들과 조선에 사제를 보내주길 간청하는 편지를 로마 교황청에 보냈고,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의 오빠 황산, 서예가 추사 김정희에게도 전교했다.

 

특히 그가 열심히 신앙을 가르쳤던 대상이 두 아들이다. 그중 장남인 성 유대철은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신앙을 끝까지 지켰고, 아버지가 옥에 갇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헌들에게 자수했다.

 

옥중에서 어린 아들이 고문을 받는 것을 알게 됐을 아버지. 성 유진길은 가족이 당한 불행에 대해 듣고 그 고통에 배교를 고민했을 법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그를 본 사람들은 “그는 바위처럼 꼼짝도 아니했다”고 증언했다.

 

육체적 고통을 이겨낸 뒤에야 영혼이 구원된다는 것을 알았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천국에 올라가 끝없는 행복을 누릴 거라 믿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강건함을 닮은 성 유대철은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움 없이 증거하며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가톨릭신문, 2024년 3월 10일,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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