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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땅: 광주대교구 남동성당 - 5․18 민중항쟁의 중심에서 인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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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4-02 ㅣ No.712

[신앙의 땅] 광주대교구 남동성당


5․18 민중항쟁의 중심에서 인권운동

 

 

빛고을 광주 전남도청이 소재하던 호남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동 5․18 기념성당(주임신부 김종원 십자가의 성요한)은 설립 초기부터 6․25 한국전쟁 발발로 수난의 시기를 거쳤다. 5․18 광주 민중항쟁 기간에는 호남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성장하였으며, 이후 전남도청의 목포 이전으로 도심지가 텅 빈 가운데 생활 터전을 잃은 많은 교우들이 시내 곳곳으로 이전하는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본당으로 호남지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본당이라 하겠다.

 

남동성당이 설립되기 이전에 광주에는 북동성당 한 곳뿐이었다. 그 후 북동성당의 신자 수 증가와 인구 밀도 및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 본당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1949년 7월, 당시 교구장이셨던 안 브렌난 몬시뇰 지도하에 광주 북동성당 주임신부였던 모 신부(파트리치오, 1951년 선종)가 광주시 남동에 새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광주 북동 모 신부는 안 교구장과 상의하여, 1949년 12월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을 기하여 준공하여 봉헌식을 갖기로 하고 본당 신부로 나주성당 주임이었던 박문규(마카엘) 신부를 발령하였다. 모 신부와 박 신부는 합동으로 1949년 12월8일 145명의 신자로 본당의 봉헌식을 거행하여 북동성당에서 분리, 본당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남동성당은 광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되는 새 본당이 되었다.

 

이후 남동성당은 사목활동에 열정을 쏟은 사제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으로 1957년 6월에 화순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64년 8월15일에는 계림동성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12월5일에는 월산동성당을, 1966년 6월13일에는 방림동성당을 분리하였다. 1968년 2월11일에는 호남동성당을, 1970년 12월25일에는 지산동성당을 분리하였으며, 본당 설립 이래 열두 분의 사제를 배출하는 등 호남지역 복음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5․18 당시 김성용 신부는 계엄군의 시민학살을 온 세상에 알려

 

남동성당은 어느 교회 못지않게 시련을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9월에는 공산당에게 본당을 빼앗기고, 당시 본당 주임이던 박문규 미카엘 신부는 체포 명령으로 감금되어 성당 부속 문간방에 기거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에는 박 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교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본당에는 많은 광주시민에게 존경을 받았던 재야 인권운동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상황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수습대책위원회가 성당을 모임의 장소로,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남동성당은 많은 시민들에게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성당에서 상황을 원만하게 수습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한 김성용 신부는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사제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민의 입장에서 대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불철주야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갔다. 그러나 김 신부의 활동이 협상 대상인 계엄사의 완고한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주위의 권고로 경계가 삼엄했던 광주를 탈출, 서울로 상경하여 광주의 실상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하였으며, 또한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제하로 광주 항쟁 때, 보고 들은 참상을 있던 그대로 수기를 써서 신앙으로 간증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언론이 은폐 왜곡보도만 했던 계엄군의 시민학살 만행이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수기는 삽시간에 국내는 물론, 해외로까지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성당은 인권운동의 성당으로 뜻 있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후, 광주에서는 독재 권력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 운동이 한때 침체되기도 했다. 국가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그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사실상 준 계엄 사태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인권운동 단체나 개인들의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남동성당에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회로써 혹은 강론으로써, 성명서를 통해서, 또는 우리의 주장 등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는 저항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5․18 기념성당으로 선포, 25번째 5․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

 

광주교구청과 사제단이 주관하는 추모미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남동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광주항쟁이 수습된 1981년부터 시작된 이 미사는 5․18의 정당한 해결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여 법 제정이 성사되었고 책임 있는 자들이 단죄 되는 등, 기대에는 미흡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까지 긴 세월동안 광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매년 지속되고 있다.

 

이 미사에 참여한 이들은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5․18 유족,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이 없었으며 본당 내외는 물론이요 인근 주변 도로까지 초만원을 이룬 경우가 많았었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때는 밖에 모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형 확성기를 옥외로 설치해 놓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추모미사는 거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강론과 사제단의 성명서, 우리의 주장, 구속자 가족 대표들이 낭독하는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또는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등의 순으로 저항의 열기가 가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군중들은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었던 시원스런 대목이 낭독될 때마다 성당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고 좌우로 젓는 등 장관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행동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 미사 시간은 보통 두세 시간씩 걸렸다. 그러면서도 군중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주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2005년 5월16일 5․18 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남동성당은 광주광역시로부터 25번째 5․18 민주항쟁 사적지로 지정되어 발표되었으며, 이때 성당 뜰에 조성된 성모동산은 호남의 중심인 무등산을 형상화 하였으며, 광주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셨고, 천주교 광주대교구로부터 5․18 기념성당으로 선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남동 5․18 기념성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정신과 기도에서 비롯되리라 믿어진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4월호, 김건 노엘(광주 S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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