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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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20-21: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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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28 ㅣ No.98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0)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정화 (상)


세속의 때 벗기 위해 영적 정화 필요

 

 

- 우리가 세속 안에서 살아가며 범할 수 있는 죄를 멀리하기 위해서는 고해성사 등 각종 성사와 묵상을 통해 정화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신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최근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논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논문의 내용 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평신도는 세속 가운데 살아간다. 평신도의 존재는 세속적 존재이다.… 하지만 세속적 성격에 완전히 예속된 인간은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세속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 존재로 불렸다. 평신도가 세속에서 하느님의 소명을 받는 것이 세속성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속에 머무르는 가운데, 세속적 임무를 다하면서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강명호, ‘평신도 신학의 시작, 이브 콩가르’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7)

 

논문은 이브 콩가르의 저서 「평신도 신학」에서 다음의 글도 인용했습니다.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의 일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해온 것이 하느님의 일을 위한 것이다.”

 

 

세속 안에서 하느님 일 하는 평신도

 

그렇습니다. 평신도는 세속에서 하느님의 일을 위한 초월적 존재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세속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한, 평신도 영성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해 보려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이지만, ‘이미’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세속에 구현하기 위해선 우선 평신도 개개인의 삶부터 영성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신도 영성으로 들어가는 첫 문을 ‘정화’(淨化)라고 부릅니다. 높으신 분을 만나러 갈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깨끗이 몸을 씻고 마음을 정갈하게 한 뒤, 깨끗한 옷을 입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보다 죄로부터 나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 정화의 예비 수단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묵상과 고해성사를 비롯한 다양한 ‘성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축구 선수들이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몸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축구 경기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영적 단계로 접어들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영적인 준비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화이고 그 첫 단추가 묵상과 고해성사 등입니다. 이처럼 성사 생활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우리는 성사의 의미에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종전에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따뜻하고 좋다’고 느끼는 것에 그쳤지만, 정화를 통해 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느님 고맙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창조물을 지금 만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실수를 했을 때도 ‘나의 삶에서 이 작은 부족함을 당신께서 함께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매일 일상에서 조금 더 하느님을 느끼면, 지금까지 세속적으로만 살아왔던 습성이 몸에서 빠져나갑니다. 이것이 정화입니다.

 

 

정화되기 위해선 성사를 

 

우리가 정화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영혼에 작용하십니다. 하느님은 성직자 수도자의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평신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평신도들이 세속 안에서 살아가며 범할 수 있는 죄를 멀리하도록 이끄시고, 고해성사 등 각종 성사로 이끄시고, 묵상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상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다가오심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평신도 영성 생활의 첫 단계, 정화가 바로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화의 단계에서는 종종 고통이 수반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다음 호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28일, 정치우 안드레아(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21) 이 시대에 요구되는 평신도 영성  정화 (하)


고통의 벼랑 끝에서 만나는 주님의 은총

 

 

고통의 끝에서 만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를 통해 타인의 아픔도 알게 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CNS 자료 사진]

 

 

정화의 단계에서는 종종 고통이 수반됩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프란치스코 성인도 정화의 단계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고통이 다가오면 우리는 대부분 불평을 합니다. “하느님 왜 저를 아프게 하십니까?”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지만 이런 고통은 역설적으로 더욱 깊은 정화의 길로 이끕니다. 죽음을 앞둔 암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않겠습니까. 정화되어 하느님 대전으로 나갑니다.

 

 

고통 그 자체로 큰 은총 

 

물론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신앙의 견지에서 볼 때 고통은 그 자체로 큰 은총입니다. 지금 상태로 살면 지옥의 비참함을 체험할 것 같으니까 하느님께서 고통까지 허락하시며 당신 품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높은 차원의 고통입니다. 어린 나이의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무슨 잘못이 많길래 그렇게 큰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이냐시오 성인이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길래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고통 앞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그 고통의 신비를 마음으로 받아들였기에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참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은 이웃에 대한 연민을 가능케 합니다. 고통을 승화시킨 사람만이 어떤 사람이 목발을 짚고 걸어갈 때 그 사람을 위해 연민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죄에서 오는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연옥 영혼을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고통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받으실 때 인류를 위해서 당신을 모두 봉헌하셨습니다. 

 

고통은 나 자신만의 고통이 아닙니다. 내 고통만 해결해 달라고 울부짖을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연옥 영혼들을 위해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 다가왔을 때도, 피하려고 한다거나, 나만 어떻게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낮은 차원의 영성입니다. 정화의 단계를 통해 겸손하고 부드럽고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세로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큰 은총이 찾아옵니다.

 

 

정화 통해 나 중심에서 벗어나게 돼 

 

이렇게 정화의 단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과거를 반성하게 됩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 은총을 느낀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적인 사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태어난 것이 은총이고, 좋은 이웃을 만난 것이 은총이고,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은총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읽고 있는 것도 은총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영적인 차원에서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나의 외적인 잣대, 세속적 잣대가 모두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나를 창조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정화의 단계를 지나면 조명의 단계가 찾아옵니다. 조명의 단계를 거치면 새롭게 눈이 열립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오라. 한번 싸워보자.” “생로병사가 은총이라는 것을 나는 증언하겠다.” “지금 고통스럽게 병을 앓고 있지만, 지금보다 더 아파도 나는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어려운 사건이 다가온다더라도 나는 자신 있게 하느님을 증언할 것이다.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5월 5일,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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