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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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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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92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이가 많지만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죽는 만큼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한 그분을 뵙지 못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먼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마치 새로운 사람처럼 정신이 맑아질 것입니다. 더러워진 생각을 마음속에서 모두 뽑아 버리십시오! … 당신의 영혼은 순수하고 당신의 뜻은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다 마치고 육신의 껍질을 벗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갈림 없는 깨끗한 마음

 

인간의 마음은 칼 구스타프 융이 지적하듯 마구간처럼 지저분하여 온갖 생각이 들끓고,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교차합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처럼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 않으시는(1사무 16,7 참조) 하느님 앞에서 감출 수 없는 인간의 가장 내면적 층입니다. 인간은 마음에서 선하거나 악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18-20ㄱ).

 

더욱 하느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끝없는 투쟁이자 영혼의 정화를 의미하는 깨끗한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요 분열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갈라진 마음은 산란함의 징후이며, 영혼의 분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단순함은 필요한 단 하나, 최고선에 대한 관상에만 집중합니다. 모든 행동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한 사랑으로 이루어질 때 티 없는 것이 됩니다.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사하고 이웃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시편 15,1-5은 주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곧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 위한 조건으로 깨끗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24,3-5도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만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두 마음의 표현인 유혹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연결됩니다. 두 마음으로 세상의 선과 영원의 선을 동시에 추구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추구하고 찬사를 바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에 마지막 장애물로 등장합니다. 남들 앞에서 주의를 끌기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명예욕에 대해 에바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명예욕이야말로 생각하자면 난처한 녀석이다. 덕성스럽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안에 즐겨 나타난다. 그들 안에 자신의 투쟁이 얼마나 힘든지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원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자 한다.” 신클레티카 암마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드러난 보화가 얼른 쓰여 없어지듯이, 덕행도 유명해지거나 잘 알려지면 쉽사리 사라져 버린다. 밀초가 불에 빨리 녹아 버리듯이, 영혼도 칭찬을 들으면 텅 비게 되고 견고한 덕을 잃게 된다.”

 

결국 명예욕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유혹입니다. 이상형과 현재의 모습을 동일시해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지 않도록 하여 자신을 우상화하고 교만으로 눈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의 권고대로 거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마태 6,1.33 참조).

 

 

통달의 은혜를 통한 찬미

 

마음이 깨끗한 이들은 통달(intellectus)의 은혜를 받기에, 그들은 정화된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1코린 2,9 참조)을 보게 됩니다. 마음을 정화하려는 노력은 하느님을 보려는 희망에 기반을 둡니다. 지금은 인간적 연약함으로 인해 신앙으로 빛을 받아 보지만, 부활 후에는 하느님을 직접 뵐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마음을 정화하고(사도 15,9 참조), 정화된 마음은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을 보고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느님을 보게 할 뿐 아니라 사랑하고 찬미하게 합니다. 7세기의 위대한 성인 시리아의 이사악은 마음이 순수할수록 창조 안에서 창조주를 더 알아본다고 가르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한 마귀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이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눈으로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며, 그것에 굶주리고 목말라하게 합니다. 믿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동한다 해도 자녀가 아닌 종으로 움직입니다. 벌이 무서워 움직이는 것이지 정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향주삼덕(向主三德)은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향유할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랑 행위의 목적이요 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느님을 뵙게 되면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눈앞에 계시기에 찾을 것이 더 없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뵙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시편 17,15). 하느님을 완전히 뵙는 부활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노가 천명하듯 믿음과 희망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 남을 것입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0월호(통권 463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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