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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다: 최홍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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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06 ㅣ No.67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다 ‘최홍준 회장’


하느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평신도가 되어야

 

 

2018년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설립 5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 지난 50년을 회상하는 한편, 앞으로의 50년을 전망하는 시간을 갖는다. 싸늘하지만 봄기운이 느껴지는 지난 3월 2일, 서울 명동에 자리한 가톨릭회관 5층 평협 사무실에서 최홍준 파비아노 회장을 만났다. 그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제18대와 제19대 평협 회장을 역임하였다. 1942에 태어나 경북 영천에서 성장하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KBS PD와 작가로서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다양한 드라마 · 영화 · 창극 등을 비롯한 픽션과 다큐멘터리 · 홍보 · 행사 등의 논픽션 대본, 그리고 25년간 뉴스영화인 ‘대한뉴스’ 원고를 집필하였다.

 

 

* 세례는 언제 받으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왜관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나흘째 되던 날 외할머니가 저를 성당에 데리고 가서 세례를 받게 하셨어요. 원래 사흘 만에 해야 하는데 하루 늦게 갔다고 파리외방전교회 본당신부님이 외할머니에게 대재를 두 번 지키라고, 두 번 금식하라는 보속을 주셨대요. 그 본당이 경상도에서 계산동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에요. 그렇게 저는 어려서부터 신자 가정에서 자라며 당연한 듯이 신앙생활을 했지요. 어릴 때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에서 복사를 서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때 들었던 신부님 강론이라든지 복음서 내용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하거든요. 지금까지 신자 생활의 바탕이 되는 자양분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착하게 살되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터득했다고 볼 수 있지요. 아버지가 보시던 교부들의 신앙서적이나 교회문헌이나 교회사 같은 것들을 곁에서 보며 이웃이 의롭지 못하면 정의를 내세우고, 하느님 보시기에 어긋난다 하면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어요.

 

 

* 교회활동은 언제부터 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고려대 가톨릭학생회뿐만 아니라 대한 가톨릭학생총연합회에서 활동했어요. 정부가 1961년부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는데, 1962년 7월에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가 산아제한과 생명을 주제로 한 전국대회를 개최했어요. 이어 1963년 7월에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이 발표한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라는 회칙을 가지고 제9차 가톨릭학생전국대의원대회를 열었고요. 군비축소와 공동선을 강조한 문헌이었어요.(요한 23세 교황은 ‘진리, 정의, 사랑, 자유를 토대로 하는 모든 민족들의 평화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회칙에서 하느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 차원에서 ‘지상의 평화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고 전제하였다.) 운현궁 앞 가톨릭학생회관에서 3박 4일간 토론회를 했는데, 마지막 날에 중고등국장이자 대변인을 하던 제가 선언문을 낭독했지요. 당시에 나상조 신부님과 김철규 신부님이 참석해 많이 격려해 주셨어요. 그때 신앙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 평협에서 봉사하시게 된 계기와 지향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1981년 10월 18일 여의도에서 김수환 추기경님 집전으로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제가 KBS PD를 하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던 중이었는데, 그 행사 대본을 써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교회 행사에 대본이라는 것이 없었거든요. 그 일을 계기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두 차례 주재하신 1984년 5월 6일의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과 103위 순교자 시성식’, 그리고 1989년 10월 8일의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의 대본을 쓰고 교황 제대 구역에서 진행을 돕는 영광을 얻었지요. 그동안 방송계에서 축적된 역량이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았나, 그런 나를 하느님께서 쓰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평협에 인연이 닿았지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서울평협의 홍보분과위원장과 한국평협의 교육분과위원장으로 봉사했어요. 그 후 사무총장 8년, 부회장 2년을 했지요. 그러다가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회장 때인 2010년 초에 평협회장으로 선임돼 4년간 봉사했어요.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일은 124위 하느님의 종과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시성 운동이었어요. 103위 시성식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주도로 1939년 기해박해 이후의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제는 한국 교회의 힘으로 그 이전의 순교자들을 시복시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거예요. 평신도의 열기가 시복시성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지요. 마침 2011년 한국평협 상임위원회에서 시복시성을 평신도운동으로 일으키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에 따라 시복시성 기도운동으로 묵주기도와 성지순례를 기획했어요.(실제로 한국평협은 125위 하느님의 종 시복시성을 위하여 한 위당 1억 단씩 총 124억 단 묵주기도 봉헌운동을 펼치는 한편, 제주도를 비롯한 순교성지를 도보로 순례하는 현양운동을 개최하였다.)

 

그해 12월 23일에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인 박정일 주교님과 민병덕 신부님, 전국 각 교구 평협 회장단이 교황청 시성성 장관인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님을 방문했어요. 한국 평신도들이 펼친 시복시성 기도운동의 전개과정을 담은 비디오와 자료집을 만들어 제출했지요.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국 평신도들의 열기를 교황청에 전달한 거예요. 평협이 주관하고 평신도들이 124위 시복에 불을 붙였던 셈이지요.

 

 

* 평신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에 끝났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헌이 번역이 되고 사회에 적용이 된 것은 1967년이었어요. 공의회의 교회헌장이나 평신도교령에서는 사제도 아니고 수도자도 아닌 사람이 평신도라고 나오는데, 1987년 세계주교대의원회가 평신도를 주제로 개최한 시노드에서는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봤어요. 「교회헌장」 제5장에서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을 말하면서 평신도에게도 성덕을 강조했는데,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했을 때 평신도로서의 성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평신도들은 나 자신부터 신앙 쇄신을 해야 하고, 복음을 책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야 해요. (실제로 그는 서울올림픽 전후의 3년간 안산의 예술인아파트에 살면서 포콜라레 운동을 접한 후, 머리로만 알아듣는 신자에 머물지 말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생활에서 직접 복음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이나 성모님이라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생각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이웃과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복음화가 돼서 빛이 돼야 하지요. 개인 성화 이후에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을 깨달았을 때 즉시 고쳐나가야 하거든요. 회개해서 하느님과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삶이 돼야지요. 우리 사회가 바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찰과 참회와 정개와 고백과 보속의 삶을 사는 한편, 하루 30분 이상 성경이나 교회문헌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야 해요.

 

 

* 앞으로 평협이 나아갈 길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 내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느님 뜻에 맞추고자 하는 것이 가톨릭 정신이 아닌가 해요. 평협의 명칭도 마찬가지예요. 평신도사도직협의회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냐 하는 문제는 그전부터 있었어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준비할 때, 서울대교구 사목국에서 구반장 교육을 실시하면서 본당 사목회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평협과 본당 사목회장이 협력해야 한다고 했어요. 1998년 5월 30일에 교황청에서 전 세계 운동 단체와 새로운 공동체 대표들을 모아 대회를 열었어요. 그때 라칭거 추기경님이 기조강연에서 성령의 카리스마에 의한 평신도 운동의 열기를 일선 사목자들이 꺼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2006년 6월 4일에 그분이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돼서 다시 그 행사를 개최하셨고요.

 

베드로적인 교회, 마리아적인 교회, 요한적인 교회를 말하는 신학자도 있어요. 마리아적인 교회에 속하는 운동 단체들이야말로 성령의 은사에 힘입어서 활동하고 있지요.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가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가운데 운동 단체들은 지역교회나 보편교회와 일치해야 하고, 교황과 주교에게 일치해야 해요. 그래야 교회지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셨고, 지금 교황님도 ‘복음의 기쁨’을 안고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셨듯이 교회 안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왕국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철저히 닮아 복음을 살면서 개인 성화와 교회 건설, 곧 개인 사도직과 단체 사도직을 제대로 수행할 때 사회가 변화하게 마련이지요. 여기서 운동 단체의 역할이 중요한 거예요. 더 많은 신자들이 사도직에 나설 수 있도록 본당 사목회장도 참여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가는 활동 방향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해요. 평협과 본당 사목회장이 조화를 이루어 한국 평신도의 활동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봐요.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함께 하느님의 길로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말이지요.

 

[평신도, 2018년 봄호(VOL.59), 대담 · 정리 김문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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