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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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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62: 박경진 · 오 마르가리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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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01 ㅣ No.1492

[복자 124위 열전] (62 · 끝) 박경진 · 오 마르가리타 부부


배티 교우촌서 수계생활하다 체포, 형벌에 굴하지 않고 관아서 순교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


1866년 병인박해는 ‘배티 교우촌’도 뒤흔들었다. 1820∼30년대에 형성돼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온 공동체였기에 배티 교우촌은 박해에 따른 피해가 더 컸다. 일시적으로는 거의 ‘와해’하는 국면을 보였고, 신자들 또한 뿔뿔이 흩어졌다. 1866∼68년 사이에 배티 교우촌에서 체포돼 순교한 신자들은 오반지(바오로)와 이 생원 등 27명에 이른다. 배티와 발래기, 지장골, 동골, 용진골, 정삼이골, 굴티, 절골 등지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이들이 박해로 순교의 화관을 쓰면서 배티 교우촌은 ‘순교자의 땅’이 됐다.

이 가운데 박경진(프란치스코, 1835∼1868)ㆍ오 마르가리타(?∼1868) 부부는 ‘절골’에 살았다. 지금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진길 일대다. 원래는 충청도 청주에서 열심히 수계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아들 넷을 데리고 진천 절골로 피했다. 아무래도 청주에선 수계 생활에 방해가 있었고, 고향의 친지들이 다칠까 하는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밀리에라도 믿음을 지켜 신앙생활을 하려면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절골 교우촌에서의 2년은 꿈결 같았다. 평온한 가운데서 마음껏 교리를 실천하고 수계하며 믿음살이를 해나갔다. 19세기 후반 교우촌은 대부분 화전으로 일군 밭농사, 분업을 통한 옹기 제작이나 숯막 운영으로 생계를 이었는데, 배티 교우촌에도 옹기 제작의 흔적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 생계를 잇기 힘든 가난이 계속됐지만, 하느님만 바라보며 기쁘게 가난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 농사일은 자신의 본업이었기에 가난했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1868년 무진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지면서 신자들은 위험에 놓이게 된다. 마침내 그해 9월 6일 경기도 죽산 관아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박경진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박경진의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있던 터라 멀리 가지 못하고 산에 숨어있다가 포졸에 잡혀 매를 맞아야 했다. 박경진 또한 가족 소식이 궁금해져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동네의 비신자 신털숙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런데 “내 집에서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게 좋겠다”고 안심을 시키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알린 그의 밀고로 박경진은 체포되고 만다.

복녀 오 마르가리타


이렇게 붙잡힌 부부는 함께 죽산 관아로 끌려갔다. 옥중 생활을 하던 박경진은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는데,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며 죽을 터이니, 혹 너희가 잡혀 죽지 아니하거든 아무쪼록 네 조카를 위로하여 잘 지내고 부모께 효양하여 본분을 다하고 살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게 하여라”(「병인 치명 사적」 23권).

순교를 결심하며 보낸 이 편지는 아쉽게도 박해 중에 성물과 함께 소실되고 만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으며, 그해 9월 28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했다. 그러나 동생과 맏아들은 박해에도 살아남아 각각 충청도 공주와 강원도 홍천으로 떠나 신앙의 맥을 잇는다.

박해로 배티 교우촌은 일시 와해했으나, 배티의 40년 신앙 전통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1870년대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신자들은 다시 배티로 모여들었다. 1888년 충청도 일대를 사목하게 된 두세 신부는 배티 교우촌 신자들을 위해 배티공소를 세웠다. 또 간양골본당(훗날 공세리본당)을 관할하던 파스키에 신부는 1892년 새울ㆍ용진골공소를, 1893년 삼박골공소를 각각 설정한다. 이들 공소는 훗날 합덕과 공세리, 안성본당 관할 공소가 됐다가 1956년 진천본당 관할 공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신앙의 맥은 이처럼 연면히 이어지고, 그 순교 얼은 우리 교회의 씨앗이 돼 순교의 땅에 복음을 퍼뜨리고 있다.

※ 복자 124위 열전은 이번 호로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3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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