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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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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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03 ㅣ No.880

[레지오 영성]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우리가 비록 신앙인이지만 늘 직면하게 되는 크나큰 유혹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피조물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하느님의 섭리, 그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것이지요.

 

다른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되 선악과는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죄는(창세기 3장 참조) 결국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느님을 자신의 삶에서 서서히 밀어내는, 나아가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치 자신이 에덴동산의 주인인 양 행동하는, 즉 하느님을 주님의 자리에 두지 않는 유혹과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도 비록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의 섭리를 믿고 따르고자 노력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하기보다는 내 뜻을 관철시키고 기도 중에도 내 계획이나 욕망에 맞추어 하느님을 조종하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 이어 창세기 4장에서도 인간의 죄로 인해 아프게 얼룩진 상흔의 역사를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죄를 지어 하느님으로부터 숨은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토록 가깝고 서로 아꼈던 부부의 관계에도 흠을 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자신의 혈육인 동생을 죽이게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는 서로 연대하고 또 확산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기심과 질투심이 증오심으로 불타오른 카인은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하느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아끼며 보살폈을 사랑스러운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입니다. 그리하여 땅을 부치며 살던 카인은 결국 이 죄로 말미암아 동생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나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많은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우선 카인과 아벨은 서로 직업이 달랐습니다. 아벨은 유목생활을 하는 양치기였지만 카인은 정착생활을 하는 농부로서 어쩌면 더욱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6-7)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리고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라는 히브리서(11,4)의 말씀에서 우리는 형식적인 제사를 바친 카인과는 달리 아벨은 믿음과 정성의 향기로운 제물을 주님께 바쳤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비교의식을 극복하는 비결은 겸손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카인의 태도와 행동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너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고 자신의 제물은 굽어보시지 않자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립니다. 심각하게 질투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자신을 돌아보도록 촉구하시며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며 죄악에 대한 경고와 함께 그것을 극복하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카인은 이 하느님의 충고조차 무시하고 맙니다.

 

무엇이 카인을 이렇게 이성을 잃고, 잔인하도록 몰아붙였을까요? 물론 이렇게 파괴적으로 나아가도록 몰아붙인 힘의 핵심 세력은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 즉 하늘에 있는 악령들이지만(에페 6,12 참조) 카인이 그것에 휘말려 들도록 불을 붙여준 것은 바로 자신의 비교의식입니다. 이 비교의식 속에서 카인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아벨에 대해서는 시기심과 질투심에,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 부정적인 비교의식은 타인으로부터 배우고 좋은 자극을 받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나아가는 타산지석의 수양정신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비교의식은 사실 비교되는 그 타인보다도 자기 자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부족한 자신을 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거나 어떤 평가에 맞추어진 거짓 자아 속에서 자기만족에 머물거나 교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부정적인 비교의식은 쉽게 상대방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에 빠져들게 하고, 나아가 카인처럼 그 비교되는 대상을 제거해 버리는 파괴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결국 자기도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상대방도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이 비교의식을 극복하는 비결은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에게서 잘 배울 수 있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또 존중해줍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자리에, 나는 나의 자리에, 이웃은 이웃의 자리에 두고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이웃의 나약함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 불완전함을 딛고 일어서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보다 낫게 여깁니다. 그가 다름 아닌 하느님의 피조물,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하느님의 따끔한 충고에 겸손하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주님, 과연 그렇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었다면 카인은 인격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처한 상황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으로 진일보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세상에 만연한 죄의 연대성에 사랑의 연대성으로 대응해야

 

카인의 반항과 잔인한 행동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거듭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러하셨듯이 카인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되 결코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에게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우리 모두를 위한 질문이기도 하고 특히 행동하는 그리스도인, 레지오 단원들은 잊지 말아야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카인처럼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종종 우리가 이해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우리 인생의 해답이 있음을 우리는 겸허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부족한 대로 서로를 받아주고 존중해주고 용서해주면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봉사의 책임을 수행하면서 세상에 만연해 있는 죄의 연대성에 사랑의 연대성으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시며 평생을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셨던 성모님, 이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음은 레지오 활동의 뿌리이며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성모님과 함께 겸손하게 주님을 따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7월호, 안정호 이시도르(이주노동자 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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