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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둔 부모에게 - 교육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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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29 ㅣ No.118

[청소년을 둔 부모에게] 교육의 목적

 

 

중학교 진학을 앞둔 아들을 가진 한 친구의 고민이 깊다. 이번에는 대안학교를 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공교육에 계속 남아있어야 하는 건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공동육아를 해서 키운 아이였다. 초경쟁사회에서 아이를 다그치며 키우고 싶지 않았다. 좀 가난하고 없어 보이는 직업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걸 남과 더불어 즐길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립심이 있으면서도 공동체를 존중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려고 하니 당연히 대안학교로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도 주변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은 결과 초등은 공교육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초등은 과거보다 훨씬 더 열려있다는 말이 힘이 되었다. 성적에 대한 중압감도 그리 강하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고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여지가 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이한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방과후학교를 하면서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문제는 중학교 때부터는 학업에 대한 부담감이 초등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의 공부하라는 압력을 받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대로 마음껏 놀고 자란 자기 아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학교가 강제하는 규율과 훈육 역시 중학교부터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이가 얼마나 적응할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자기가 잘 버틸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왕따나 학교폭력의 문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여기저기 대안학교를 알아보고 있었다.

 

 

공교육? 대안교육?

 

그런데 대안학교에 이미 아이를 보낸 다른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공교육에만 ‘널브러진 아이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안학교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끈기를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보다는 금방 싫증을 내고 원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크고 자기 의사가 분명한 것까지는 좋은데 좀처럼 철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또 흔들렸다.

 

작년에 있었던 ‘대안학교한마당’에서 있었다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대안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학에 진출한 아이가 일어나서 발언을 했다. 대학에 와서 보니 자기가 살아야 하는 현실은 대안학교에서 말한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고 했다. 오히려 자기에게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시키고 정신 차리게 한 것은 대안학교가 아니라 대학이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대안교육에 몸을 바친 한 교사의 말도 생각났다. 대안학교는 아이들을 상처 없이 자유롭게 키우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지만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제 삶을 책임질 수 있게 하는 데는 아직까지 못 미친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안학교에도 학교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공교육에 빠진 ‘돌봄’은 강조되지만 이것이 ‘교육’인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에는 ‘돌봄’이 없는 ‘학습’만 있다. 이건 ‘교육’이 아니다. 반면 몇몇 영악한 부모들이 대안학교는 대안학교대로 ‘돌봄’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집에서는 엄청나게 ‘학습’을 시키는 것이다. 여기도 ‘교육’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돌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학습’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이기를 바라는 이 친구의 입장에서는 공교육도, 대안교육도 선뜻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돌봄과 학습 사이에서

 

우리는 ‘돌봄’과 ‘학습’ 사이에서 교육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전에도 교육의 위기를 이야기하였지만 2010년대의 교육 불가능성은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

 

먼저 규모부터 다르다. 교육의 불가능성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공교육뿐만 아니라 대안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이라는 것을 표방하고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2010년 교육 불가능성은 그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이나 시도도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깜깜한 절망과도 같다. 진정한 위기인 셈이다.

 

그러나 교육 불가능성의 시대는 우리에게 교육 그 자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전의 교육 위기론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조금만 고치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교육 불가능성의 시대에 우리는 고맙게도 ‘교육’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효용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공교육이냐, 대안교육이냐는 허구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어떤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떤 것이 바람직한 성장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가 타인과 더불어 동시대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주는 일이다. 동시대인이란 시대와 교감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공명하고 공감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오늘의 교육은 자율적인 개인을 만드는 것보다는 증오와 분열, 그리고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며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고취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우리는 아이가 부단하게 ‘다름’과의 만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주선해야 한다. 평생 같은 그룹의 친구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만나 윤리에 눈을 뜨게 해야 한다.

 

 

자율적 인간에서 공감하는 인간으로

 

공감이란 무엇일까? 정신의학자 하지현은 동감과 공감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거지를 보고 동감하는 사람은 거지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는 사라진다. 대신 그 거지만 남는다. 거지를 향한 불쌍한 마음에 그는 자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감은 다른 것이다. 공감은 그 거지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는 사람이다. 거지는 다만 개별적인 한 명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암흑과 실체를 드러내는 신적인 존재이다. 이런 공감이야말로 동시대인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교육은 공감능력을 키우고, 그 공감능력을 통하여 동시대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다. 자율적 인간에서 공감하는 인간으로.

 

* 엄기호 미카엘 -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금 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아시아 태평양 부회장으로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등의 저서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0월호, 엄기호 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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