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문헌ㅣ메시지

복음의 기쁨 해설37-39: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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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06 ㅣ No.706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7) 강론 I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삶의 모범으로 보여줘야

 

 

교황은 계속해서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음 선포인 강론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비교적 많은 분량의 말씀을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셨다. 성령께서 강론자를 통해 전해주시는 치유와 위로, 사랑과 평화를 세상 만민이 감동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은 선포하는 사람을 통해 다른 이에게 다가가시기 때문이다. 교황께서 하신 말씀을 3회에 걸쳐 요약해 보겠다. 강론의 책무를 지닌 사제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앞으로 강론의 주요 지침이 될 내용으로 꾸며주셨다. 특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없다. 사제들 스스로 반성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선포자의 전형 예수 그리스도 

 

먼저 교황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의 모습을 상기하도록 이끄셨다. 선포자의 전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마르 1,45 참조).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마르 6,2 참조). 사람들은 주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마르 1,27 참조).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마르 3,14) 하신 사도들은 말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교회의 품 안에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마태 16,15-20. 참조).

 

 

강론 준비는 매우 중요한 책무 

 

교황은 강론에 대한 평신도와 사목자의 불편한 감정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우리 모두의 소망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강론은 사목자가 자신의 백성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는 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어렵고 사목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사실 강론은 성령을 강렬하고 기쁘게 체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쇄신과 성장의 지속적인 원천이신 하느님 말씀, 위로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만나는 것입니다”(135항). 

 

사목자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자신의 직무를 즐겁고 유익한 멍에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이끄셨다. “강론 준비는 매우 중요한 책무이기에 창의적인 사목을 위하여 연구와 기도와 묵상에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 준비되지 않은 강론자는 ‘영성적’이지 않고 정직하지 않으며 자신이 받은 은사에 무책임한 자입니다”(145항).

 

 

준비한 만큼 사랑받는다 

 

교황은 사목자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강론 준비에 바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준비하는 데에 들인 시간만큼 신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재주나 지식으로 신자들을 울고 웃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론자가 그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에게 신자들을 향한 사랑은 부족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관리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강론 준비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에만 서두르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바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참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시간을 얼마든지 낼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146항).

 

 

모범을 보여야 

 

교황은 강론 내용이 사목자의 삶 자체가 되도록 이끈다. 신자들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실제 삶으로 보여주라는 말씀이다. “용기를 잃지 맙시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151항). 

 

필자도 사목자이다.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강론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은 사목자인 내게 어떤 충고와 훈계로 다가오는가? 내가 개선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 물에 적신 솜이불처럼 묵직한 부담이 밀려온다. 그러나 용기를 내 본다.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시어 필요한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6일,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8) 강론 II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강론을 시작되해야 한다고 말한다. 테살로니카 바오로 사도의 설교 기념터 모자이크화는 베로이아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담았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교황은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교의 전형적 형태의 선포는 본질적인 것, 즉 필수 불가결한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것이고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며 마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강론은 첫 선포, 즉 구원의 선포와 함께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선포보다 더 견고하고 심오하며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두 분 교황님과 함께 52-53). 

 

첫 선포, 가장 중요한 것,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선물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으로 강론은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강론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 전체가 지향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지속적 성숙 통해 완성되는 복음화 

 

위의 첫 선포의 내용이 사도들의 케리그마(kerygma, 선포)이다. 권고 「복음의 기쁨」 3장 후반부에서는 케리그마의 내용을 다음의 문장으로 친절히 요약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날마다 여러분 곁에 사시면서 여러분을 깨우치시고 힘을 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십니다”(164항). 

 

첫 선포의 내용은 더욱 발전되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그분의 생전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그 내용 전체가 전달되어야 한다. 교황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첫 선포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심화되고 발전되어야 하는지를 ‘케리그마의 심화를 통한 복음화’라는 주제로 설명하였다. 복음화는 지속적인 성숙을 통해 완성된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그렇다면 케리그마를 심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스스로 지키고 다른 사람이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쳐 지키도록 한 모든 내용이 해당된다. 모든 덕과 계명이 그 내용이다. 기회 닿는 대로 교회의 교리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무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이 이 모든 계율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명 가운데 으뜸이며 모든 율법의 완성인 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이 가르침을 실행하도록 끊임없이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우리가 심판받는 기준도 바로 이 사랑의 계명을 얼마나 실천하였느냐에 달려 있다(마태 24,31-46 참조). 사제들의 강론에서 늘 강조되어야 할 부문이다.

 

 

선포, 신앙인 삶의 중심이 돼야 

 

교황은 신자들에게 베풀어지는 교리교육의 내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케리그마와 신비 교육’에 대해 소상히 설명한다. 신비 교육이란 새롭게 세례받은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 시기 동안 특별한 관심과 배려 속에 뿌리내리도록 이끄는 교육을 의미한다. 「어른 입교 예식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성사들에 자주 새롭게 참여함으로써, 새 신자들은 성경 말씀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고, 사람들을 좀 더 알게 되고 공동체 생활을 해 가면서 다른 신자들과 더 쉽고 유익하게 친교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신비 교육 기간은 새 신자들이 대부모의 도움을 받아 다른 신자들과 더욱 친밀해지며,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다”(어른 입교 예식서 39). 

 

“우리는 교리교육에서도 첫 선포 또는 케리그마가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재발견하였습니다.… 교리교사의 입에서 첫 선포가 되풀이하여 울려 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날마다 여러분 곁에 사시면서 여러분을 깨우치시고 힘을 주시고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이 선포가 ‘첫’이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부터 있었는데 나중에 잊히거나 이보다 더 중요한 내용들로 대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질적인 의미에서 첫째입니다. 그것이 으뜸 선포, 곧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가 거듭 들어야 하는 것이고, 교리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모든 단계와 시기에 언제나 우리가 거듭 선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64항). 

 

신자들의 재교육 차원에서도 케리그마는 그 중심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이 케리그마는 교리교육에서 다루는 모든 주제의 의미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도록 해주고,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무한에 대한 갈망에 응답할 수 있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13일,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9) 강론 III


비유의 언어와 신자 기도가 명강론 만든다

 

 

교황은 계속해서 모든 형태의 교리 교육은 ‘아름다움의 길’(via pulchritudinis)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땅하고 옳은 일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의미”(167항)라고 설명했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새로운 빛과 심오한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에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된 아름다움의 모든 표현은 주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될 수 있으므로 ‘예술’을 적극 활용하도록 권고했다.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우리는 말씀을 전달하는 데에 필요한 새로운 표지와 새로운 상징과 새로운 형체를 찾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상황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형태들을 찾는 것입니다”(167항). 

 

사목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구원의 메시지를 담는 ‘비유의 언어’는 아름다움의 총화가 돼야 한다.

 

 

비유의 언어를 계발해야

 

스스로 질문해 본다. 케리그마의 심화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을 읽었다. 우리가 본당에서 교리교육 혹은 특강을 하거나 일상적인 신자 재교육을 준비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교황은 이와 같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지와 새로운 상징과 새로운 형체를 찾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비유의 언어’를 계발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교황은 계속해서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는 성숙과정의 동행인들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며 참다운 영적 동행으로 지상 여정을 순례하도록 권고했다. 이들의 함께함을 ‘동행의 예술’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했다. ‘예술’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 말이다(탈출 3,5 참조). “이 동행은 힘차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이루어지고 존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시선이 담겨 있어야 한다”(169항). 

 

바오로가 티모테오와 티토와 맺은 관계는 사목 활동 중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동행과 교육의 모범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복음화의 원천은 성경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신자들까지 성경 연구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 연구는 모든 신자에게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우리는 하느님을 눈먼 채로 찾지 않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기를 기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의 숭고한 보화를 받아들이도록 합시다”(175항).

 

 

명강론은 신자들의 기도에서 나온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 3장 후반부 ‘강론’에 대해 말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동행의 예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좋은 동행자는 좌절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치유되어 다시 일어나고 십자가를 지며 모든 것을 뒤로하고 복음을 선포하고자 언제나 새롭게 출발하도록 권유합니다”(172항). 

 

베트남 반 투안 추기경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00년 희년에 교황청 사순 피정 강론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반 투안 추기경은 예화를 들었다. “미국의 한 작가가 군중을 매혹 시킨 유명한 설교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설교를 충실히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성공 앞에서 몹시 행복해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명설교를 축하드립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려고 늘 당신 앞에 앉아 있는 그 노인을 기억하시나요?’ 그가 ‘예, 기억하고말고요’ 하고 대답하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기도하려고 온다는 사실을 알아두세요. 그분의 기도 덕분에 당신의 설교는 신자들에게 언제나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강론에 대해 충분한 가르침을 받았다.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강론이 시원찮으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평신도들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억지로 푸념해보고 싶어 위의 예화를 인용해 보았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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