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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ㅣ미사

[미사] 전례의 숲: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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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1353

[전례의 숲] 강론

 

 

강론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어머니가 자기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본디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뜻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례 거행, 특히 미사에서 하는 설교를 일컫습니다.

 

성경 본문의 봉독과 그 해설을 듣는 관습은 유다교 회당 전례에서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 관습을 계속하였습니다. 2세기 중엽 유스티노 순교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일 미사에서 “독서가 끝나면 이어서 주례는 방금 들은 아름다운 교훈들을 우리 생활에서 본받도록 권고하고 격려합니다.” 고대 교회의 강론은 미사 독서에 바탕을 두었으며, 내용이 단순하고 실제적이었습니다. 교부 시대는 강론의 황금 시대였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뛰어난 강론가로 체계적으로 성경을 풀이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동서방의 여러 교부들은 뛰어난 강론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중세에는 강론이 소홀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주제가 미사 독서를 벗어나기가 일쑤였습니다. 미사 전에, 또는 미사 밖에서(주일 오후)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강론대를 제단에서 벗어나 신자석 가까이 옮긴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강론이 미사 거행과 관계없다는 인상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강론의 중요성을 복구하였습니다. 강론은 독서들이나 화답송처럼 말씀 전례의 한 부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말씀으로 여깁니다. 미사에 장식처럼 덧붙이는 교육이나 행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했던 것처럼 강론을 시작하고 마치면서 십자 성호를 긋거나,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같은 다른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강론 앞이나 뒤에 공지사항을 발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꼭 강론을 해야 합니다. 다른 날에는 권장합니다. 특히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 시기 같은 특별 전례 시기와 신자들이 많이 참석하는 미사에서는 평일이라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장례 미사에서도 강론을 합니다. 강론에서 죽은 이를 기억하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추도사나 헌사 따위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고별 예식(영결식)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강론은 보통 주례 사제가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공동집전 사제나 부제도 할 수 있습니다. 주례석이나 독서대 또는 다른 알맞은 곳에서 할 수 있습니다. 주교는 원칙으로 주교좌에 앉아 주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합니다.

 

강론 시간에 관하여서는 지침은 “너무 길거나 짧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중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어린이 미사에는 더 짧아야 하고, 특별한 상황에서는 조금 더 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외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15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평일 미사에서는 물론 더 짧습니다. 그리고 강론 뒤에는 제1독서와 제2독서 뒤에서처럼 알맞은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강론의 최고 모범은 예수님

 

강론의 근본 목표는 하느님 말씀 선포와 성찬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이 오늘의 신자들에게 전달되고 다시 일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미사의 성경 독서들, 미사 통상문, 성경 노래나 기도문들을 활용합니다. 나아가 그 미사의 성격이나 회중의 상황도 생각합니다(미사경본 총지침 65). 그러므로 본문을 올바르게 풀이하여, 문자적 의미와 함께, 현실에 비추어 오늘의 사람들이 알아듣게 바꾸어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강론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들을 포함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본문이 말하는 사건의 상황과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상황이 서로 열리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그 거룩한 사건의 주인공이고 그 사건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곧 그 사건을 전하는 말들은 또한 우리에 관하여 하는 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감사의 제사, 곧 성찬 전례입니다.

 

강론의 최고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 32). 침통했던 그들의 마음은 놀라움으로 바뀌었고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실제로 강론을 들으며 우리는 마음을 열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살아 있는 뜻을 깨닫고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강론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합니다. 전례 거행과 회중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전례 거행이나 하느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의 생각이나 신념을 전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도록 자신은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강론자도 고전 수사학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이야기할 주제를 찾고, 자료를 정리하며, 설명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론은 연설과 근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강론자는 연설자이기 전에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미사에서,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먼저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득력에 관하여 흔히 말하듯, 내용의 논리나 분위기에서 오는 정감보다는 그 사람의 인품에서 나오는 신뢰감이 더 중요하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삶과 기도를 통하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힘이 있습니다. 그의 삶은 이미 강론입니다.

 

 

강론은 미사의 한 부분으로 거룩한 예식

 

교회법에 따르면,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지만, 미사에서 설교, 곧 강론은 서품을 받은 성직자, 곧 부제나 사제 주교만 합니다. 이 규정은 신학생, 신학을 배우는 학생, 모든 종류의 사목 협력자와 평신도 단체나 공동체에도 해당합니다(구원의 성사 64-66). 독일 주교회의는 과거에 평신도에게 예외적으로 강론을 허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1983년 새 교회법이 공포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교는 평신도에게 특별한 경우, 증언 형식으로, 강론 뒤에 미리 써서 준비한 글을 읽는 것을 허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행도 2002년 “구원의 성사” 훈령으로 폐지되었습니다. 평신도는 미사 강론을 대신하여 어떤 종류의 “묵상”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전례 규범에 따라 어떤 거행 부분을 이끌 수 있을 때 미리 준비된 짧은 해설은 예외입니다(예를 들어, 시작 예식, 신자들의 기도).

 

다만, 특별한 상황에서 사목의 선익이 있을 때 예외적으로 영성체 후 기도를 바친 다음 호소나 전달이나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해외 선교사).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강론을 생략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보통보다 짧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사 밖에서는 성당이나 경당에서 평신도들이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없는 공소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경우도 사제나 부제는 허용할 수 없고 오직 교구장만 허용할 수 있습니다.

 

매우 경직된 규정으로 보입니다. 사제가 그 나라 말을 아직 잘 익히지 못한 선교사일 수 있고, 말을 잘 할 수 없는 노인이나 환자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유로 강론을 어려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강론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평신도나 수도자 가운데 믿음과 지식을 갖추고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 맡길 필요성이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공동체에서는 평신도 강론이 허용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 교회 안에 “강론자 교육 과정”을 마련하여 이 과정을 마친 평신도에게 강론 권한을 주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신도에게 강론을 허용하지 않는 까닭은 강론이 미사의 한 부분으로서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품 받은 성직자가 이 예식을 수행합니다. 감사기도문을 오직 사제만 바칠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강론에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곧 강론은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성사입니다. 그러므로 강론에서는 사람의 설교 능력을 넘는 영적인 효과가 일어납니다. 강론은 인간적 설득이나 감동이나 위로를 주는데 그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5월호, 심규재 실베스텔(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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